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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동의 동북아 기로에 선 한반도]<1> ‘동북아체제’를 말한다-분단체제·동북아체제·세계체제
[격동의 동북아 기로에 선 한반도]<1> ‘동북아체제’를 말한다-분단체제·동북아체제·세계체제
  • 백원담 성공회대
  • 승인 2001.08.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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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08-14 10:05:56

백원담 / 성공회대·중국학과

 

중국의 부상과 미국 헤게모니의 약화, 정상회담을 계기로 한반도에 찾아든 데탕트의 물결, 동북아시아는 그 어느 시기보다 급격한 세력관계의 변화를 겪고 있다. 이 지정학적 공간의 중심에는 놓여있는 것은 역시 한반도다. 이 기획은 6·15 정상회담 이후 한반도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4강의 역학관계 변화와 한반도 및 동북아 정세의 미래를 진단하기 위해 마련된 것이다. 이번호에는 기획의 총론 격인 ‘‘동북아체제’를 말한다’를 실었다. 동북아시아를 독자적인 분업과 재생산구조를 갖는 하나의 ‘체제’로 볼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하지만 거시적인 정세의 조망은 엄밀한 실증성에 기반한 사회과학적 추론뿐만 아니라 인문학적 직관과 통찰력이 요구되는 작업이기도 하는 만큼 문명론적·운동사적 관점에 입각해 씌어진 백원담 교수의 이 글은 급격한 변화의 소용돌이에 직면해 있는 오늘의 한국사회와 지식인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으리라 여겨진다.
글 싣는차례
①‘동북아체제’를 말한다
② 두개의 헤게모니 세력, 미국과 중국
③ 러시아와 일본의 선택
④ 남북관계의 향방과 한반도

 

남북정상회담에서 평화협정체결 운운에 이르기까지 최근 한반도와 동북아에 감도는 기운을 어떻게 볼 것인가. 분단을 종식시키고 민족사의 생환을 일으킬 신바람, 세계화를 강타하며 한반도를 새로운 문명의 대장간으로 화하게 할 生氣일까. 아니면 미국의 금융제국주의라는 현상에 압도돼 ‘관악기처럼 우주의 안개를 빨아올리다 말거나’, 그리하여 민족사 전체가 세계사의 전진으로부터 또다시 소외당하는 천형을 받을 전조인가. 이처럼 6·15 남북공동선언, 그것은 우리 앞에 희망과 절망의 빛으로 명멸한다. 그러나 문제는 의외로 간단하다. 생존을 도모하는 일개 정치행태수준일 때, 그것은 책략의 운명으로 역사 속에 산산히 흩어지고 말 것이다. 그러나 민족적 대원칙으로 관철해간다면, 그것은 명현한 빛으로 어둠을 갈라치면서 새로운 형질을 부여받으며 민족통일, 동북아 평화, 새로운 문명세상의 핵질, 생명의 씨알머리로 단단하게 여물어 갈 것이다.
여기서 민족적인 대원칙은 무엇이며 그것이 배태해낼 새로운 형질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다름아닌 민족자주성의 원칙이며, 그것이 빚어낼 새로운 형질이란 원칙의 상위단계 보편성, 상생의 원리, 관계성의 원리이다. 예컨대 우리의 분단문제와 중국의 양안문제는 정확하게 逆像으로 도립해있다. 따라서 지나온 궤적을 마주 비추어 본다면 민족국가단위에서의 주체적 해결경로 속에서 자주성의 원칙을, 그 한계 속에서 관계성의 원리를 체득해낼 수가 있다. 한편 우리의 전통과 근대에 대한 성찰적 反思 속에서도 진정한 관계성의 원리는 터득된다. 곧 인간주의적 전통이 풍부한 동양적 가치와 정서에 대한 재조명, 나아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적 가치를 비롯해 인류가 창조해 온 수많은 경험을 발전적으로 지양해가는 ‘사상의 회통’을 통해 21세기 새로운 패러다임을 모색해내려는 지속적인 노력들이 ‘인간’주의와 ‘사회’주의의 통일적 원리, 노나메기의 관계적 원리를 오늘의 창궐한 병마를 치유하는 근원적 해법으로 보아내고 있는 것이다.

포스트 정상회담 시대의 한반도

이러한 원리는 자본의 지구화를 강화하려는 목적 하에 추동되는 지역블럭화, 그 팽창주의원리와는 근본적으로 태생을 달리한다.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체결 이후 이를 전미지역(FTAA)으로 확장하려는 미국의 음모, 미국동조화현상이 심화되고 있는 미주지역의 지역블럭화는 진정한 상생과는 거리가 멀다. 유럽통합 역시 진정한 ‘사회적 유럽’을 위해 험로를 넘지 않으면 안된다. 국가와 시장, 정치와 문화의 관계성을 새롭게 문제화하고 새로운 관계성과 정체성을 찾아나가는 장도를 구체화하지 않는 한, 그것은 미국이 주도하는 신자유주의의 파트너이자 그 시장역할을 수행하는 엄연한 현실의 벽을 넘을 수 없거니와, 동유럽의 소외와 ASEM의 실체는 문제의 심도를 여실히 입증해준다.
아시아에 엔블럭을 구축하려는 일본의 의도는 어떠한가. 이는 기미가요 제창, 히노마루 게양의 법제화, 가이드라인법제정 등 ‘제국주의화’추진기획과 함께 ‘아시아주의’의 망령을 실감하게 한다. 최근 중국이 받고 있는 ‘신중화주의’의 혐의 또한 우려스럽다. 그러나 최근의 애국주의, 민족주의경향을 중국 자체의 시각 속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거니와 바로 그 지점에서 동북아의 문제에 대한 접근법과 해결방식을 달리해야 한다는 역설이 성립한다.
‘미국의 금융자본이 한반도를 장악하는 음모도 통일이라는 명분으로 다가오게 돼 있는’ 현실의 고지에 우리가 가파르게 서 있다고 한다면 과도한 표현인가. 미국을 위시한 신자유주의의 한반도공세 역시 통일이라는 명분으로 닥쳐오고 있다는 실감에 전율스럽다면. 10월말 열리는 ASEM2000은 남북정상회담 이후 한반도에 작용하는 장력들의 실체를 가늠하는 척도가 될 것이다. 유럽의 동아시아 신흥공업국에 대한 자본관철요구에서 비롯된 ASEM의 서울 개최근거는 자명하다. 한반도에 화해분위기가 무르익은 시점에서 정권은 민족주의이데올로기를 광범하게 유포해나가는 한편, 남북화해국면에 대한 지지를 ASEM참가국들로부터 조직화하면서, 신자유주의의 길트기임무를 충실하게 완수해내고자 할 터, ASEM2000은 현 정권의 하반기 신자유주의적 구조개혁의 외적 장치로 정확히 설치된 것이다.
그러나 반ASEM2000의 대항전선이 민중역량을 중심으로 스펙트럼을 그리면서 하반기 안팎정세에 적극적으로 개입해간다는 점에서 결코 비관적이지만은 않다. 반ASEM2000전선은 BIT등 신자유주의공세에 대한 저항전선 속에 정확하게 자리매김된다. 그리고 남북정상회담 전후 고도의 정치프로그램 속에서도 지속적으로 설치됐던 민중전선의 구체지점들과 신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적 인식의 확산은 한반도정세를 전향적으로 강타해내는 실질적 힘으로 작동하고 있다. 씨애틀로부터 반ASEM 전선으로 이어지는 신자유주의에 대한 세계적인 대항전선은 이제 80년대말 이후 복류했던 제3세계운동의 문맥들의 부력을 받으며 한반도를 중심점으로 21세기 세계지도 위에 선명하게 부각되고 있는 것이다.
한편 미국의 한반도에 대한 정치적 관철력이 경제적 측면과 달리 상대적으로 약화돼 갈 것이라는 판단 또한 새로운 국면전환의 계기로 포착된다. 남북정상회담에서의 중국의 역할, 북한의 선택이 한미일 삼각체계가 주도했던 한반도와 동북아정세에 일종의 균열을 낸 셈인데, 따라서 신중화주의의 우려가 높은 속에서도 중국이 동북아에 뿜어내는 장력과 새로운 역학관계, 그리고 통일한국의 온전한 경로를 구체화해가는 데 있어서의 북한의 선택들을 구체적 성과를 길어오르는 희망의 우물로 조직해나가는 것이 중요한 문제로 대두되게 된다.
미국이 한반도를 교두보로 중국의 영향력을 최대한 억제하는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면 중국은 경제적 측면에서 동북아평화와 경제협력이 절실히 요구되고, 정치군사적 측면에서 한·미·일 군사동맹이 직접적으로 중국을 겨냥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의 전환이 시급한 시점이다. 이를테면 중국은 실리적 방향으로 동북아전략을 구사해가고 있는데 미국의 아시아에 대한 패권적 관철에 대응, 경제적으로는 동북아국가간 협력과 이를 위해 정치군사적으로 거리감을 해소해가고자 하는 것이다. 남북정상회담에 대한 중국의 ‘당사자해결’이라는 적극적 의사개진은 바로 이러한 시각에서 비롯된 것이고, 북한에 대한 관심은 동북아에서의 중국의 위상 및 동북아평화유지와 관련하여 집중되고 있다. 한반도 통일에 대해 중국은 당사자협의에 의한 일국양제의 상을 가지고 있다. 북한의 유지가 사회주의중국으로서는 중요한 문제이며, 북한의 정상상태유지가 중국의 동북아질서재편에 큰 변수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이는 동북아에 새로운 질서가 구축될 가능성을 암시한다. 따라서 중국의 동북아시아에 대한 실리적 관계의 관성을 깨고 동북아의 미래상에서 본 중국의 역할에 대한 문제제기를 지속적으로 감행해나가는 노력이 절실하다. 이번 반ASEM전선 역시 중국의 전환적 시각을 유도하는 중요한 고리로 삼아야 할 것이다. 중국이 WTO가입으로 자본주의세계체제에 전적으로 편입된 이상, 그 미래지향에 대한 깊은 숙고가 요구되는 바, 그것은 지속적인 문제제기와 주체적 해결과정의 광범한 확산과 심화에 의해 견인될 수 있는 것이다. 한편 분단체제와 양안체제가 정확하게 도립해있는 현실을 직시하면서 아래로부터의 연대를 고민해야 할 것이다. 동아시아전체에 걸린 문제의 보편성에 터하여 실천운동의 맥락들을 짚어가면서 낮은 단계의 연대형식을 조심스럽게 모색해갈 필요가 있다. 엔블럭과 한미일 삼각공조체제가 조성하는 긴장에 대응, 새로운 지역단위 공동체의 주역들의 자기개진을 연계해내면서 연대수준을 높여나가는 상향적 경로가 기획돼야 할 것이다. 연대수준의 제고에 의한 체제적 전환, 그것은 정확히 세력화의 문제와 맞물려 있다. 기능적이고 사안적인 연대체계로 불특정한 민간단위의 일상적 운동수준을 유지해가는 정도라면 그간 시민운동의 경험에서 드러나듯이 그것이 반동적으로 역기능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미국이 획책가능한 NGO를 양산해내고 있는 현실인 것이다. 따라서 아래로부터의 연대를 꾸준히 추진하고 세계적인 연대양식들을 포진해내는 가운데 지역적 중심을 세워내고, 이를 진지로 다시 세계적인 연대수준들을 제고해내는 수렴과 확산의 탄력적 체계를 구조화해나가야 할 것이다.
실리적 관계에서 상생적 관계로의 질적 비약, 나아가 지속적이고 안정적인 평화체제의 구축은 아래로부터 연대만으로는 불가능하다. 따라서 지역적 경계를 우선 짓는 문제와 더불어 국가와 시장, 정치와 문화의 관계성을 성찰하면서 지역단위의 새로운 관계성과 정체성을 새로운 가치체계로 정립해나가는 ‘사상의 준비’ 또한 병행해가야 할 것이다. EU를 비롯한 지역블럭화의 ‘현상’들은 명확히 그 반면으로 극복과 성찰의 대상이지, 지향이 아니다.

지역블럭화, 지향 아닌 극복과 성찰의 대상

자본주의의 막바지 기승에서 오히려 문명의 가을을 예감해내는 것, 그것은 만물이 생화육성되는 道의 운행으로 보면 지극히 자연스런 통찰일 것이다. 동북아에 감도는 기운을 瑞氣로 읽는다면, 무리한 정치적 공동체의 모색보다 문화적 동질성을 추출하여 그것을 가치차원으로 고양시켜내는 것, 그로써 물질적 과학주의를 본색으로 하는 서양을 되감아내는, 곧 인간주의적 전통이 풍부한 동아시아적인 것으로 싸서 도로 내보내는 문화적 경로를 모색함이 어떠한가. 우리의 지향은 민족적 동질성을 핵질로 한 문화공동체에서 민족국가단위를 뛰어넘는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의 상생적 문명공동체의 세상을 열어내는 것이므로.
“북동풍이 분다,/바람 가운데 가장 사랑스러운/바람은 불과 같은 정신을,/좋은 항해를 선박들에게 기약해준다”(횔덜린, ‘회상’에서).

arum@mail.skhu.ac.kr

●‘동북아체제’라는 문제설정

세계체제와 분단체제 매개하는 중범위 분석범주

 

지금의 동북아 정세를 둘러싼 핵심적인 쟁점은 역시 미국 헤게모니 체제의 미래와 중국이라는 변수, 그리고 6.15 정상회담 이후 남북관계의 향방에 집중되어 있다. 하지만 이러한 문제들을 독립적인 각각의 변수들로 보아서는 곤란하다. 세 가지의 쟁점들은 서로가 서로를 규정하고 제약하는 긴밀한 연관 아래 놓여있기 때문이다. 3백년이 넘도록 인간의 삶을 규정해 온 보편적 생존환경으로서의 자본주의 세계체제, 그리고 세계체제적 모순의 응축고리이자 ‘적대적 상호의존’이라는 유사체제적 논리를 통해 반세기가 넘도록 지탱되어 온 한반도의 분단체제란 결국 ‘부분을 보유한 전체’, ‘전체의 온전한 속성을 담지한 부분’이 아니고야 무엇이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풀리지 않는 난점이 있다. 세계체제와 분단체제 사이에 일종의 ‘구조적 상동성’이 존재한다고는 하지만 그것이 두 체제의 긴밀한 결합기제와 그 내적 동학을 낱낱이 설명해주는 것은 아닌 까닭이다. 다소간의 무리를 감수하면서까지 동북아를 하나의 ‘체제’로서 상정하려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체제란 무엇인가. 월러스틴은 하나의 체제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그 안에서의 생활이 자기충족적이고, 발전의 동력이 내적인 것이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런데 이러한 체제의 조건을 만족시켰던 것은 상대적으로 작고 고도로 자율적이었던 생존경제와 세계체제 뿐이었다. 왜냐하면 종족이나 공동체, 국민국가 모두 체제로서의 두 가지 필요조건을 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동북아 체제’ 역시 엄격한 의미의 체제라고 보기는 힘들다. 오히려 그것은 실재하는 체제라기보다 ‘요청되는’ 체제에 가깝다. 요컨대 세계체제의 보편성과 분단체제의 특수성을 매개하는 중위의 분석범주, 굳이 말하자면 하나의 이념형적 구성물인 셈이다.
‘체제로서의 동북아’를 하나의 이념형적 분석단위로 다룬다 하더라도 난관은 뒤따른다. 체제를 움직이는 각각의 벡터들이 예측하기 힘든 이중적 논리구조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한반도 주변의 4강들은 반패권주의와 패권주의, 친미와 아시아주의 사이를 불안하게 오간다. 이중적이기는 신자유주의와 민중주의를 오가는 남한이나, 反美와 用美 사이에서 줄타기를 시도하는 북한 지도부의 행보 또한 마찬가지다. 결국 동북아 체제란 이처럼 모순적인 제 경향들의 조합으로 그 행로가 결정되는 매우 불안하고 유동적인 체제라고 할 수 있다. 과학적 이성의 냉철함 못지 않게 인문학적 직관과 상상력의 개입이 요구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세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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