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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왜 배신당하는가?
혁명은 왜 배신당하는가?
  • 김영민 한일장신대
  • 승인 2006.09.16 15:0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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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비평

'인형의 집'(1879)에서 나가려는 '나의 귀여운 종달새' 노라에게 헬머는 기어코 가부장의 본심을 외치고 만다: "사랑하는 사람 때문에 나 자신의 명예까지도 희생한다니, 그렇게는 할 수 없소!" 그러나 "수많은 여성들은 몸소 그렇게 해왔어요!"라고 응수하면서 노라는 집 밖으로 나간다. 노라를 향한 구애와 이어지는 혼인을 작은 혁명에 비긴다면, 친절하고 능력있는 헬머는 그 자신의 표현대로 '노라를 위해 밤을 낮삼아 일하면서' 그 혁명의 현실을 유지하고자 애쓴 편이다.

그러나 그 혁명의 마스코트인 인형-아내는 집을 나가고, 남편 헬머는 그 가출의 動因조차 깨단하지 못한다. 물론, 그 혁명의 주체가 '남자의 명예' 아래로 낮아질 수 없었기 때문이며, 여자/약자의 현실이 요청하는 '사랑의 헌신'에 몸으로 응대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大義는 혁명을 부르고 정당화한다. 그러나 혁명 이후의 생활을 건사하기에 대의와 명분은 거칠고 直切하다. 그 모든 혁명적 創業과 달리 나날의 수성守成은 낮디낮은 일상이며, 일상의 촘촘한 조직은 창업의 명분만으로 감쌀 수 없고 당위의 슬로건만으로 보듬을 수 없다.

가령, 이미 마음벽을 쌓은 부부가 아이를 볼모로 인연의 끈을 유지한다면, 그것은 혁명적 창업기(연애시절)의 달콤한 과실(!)에 의탁한 채 일상적 수성기(생활)의 쓴 비용을 지불하지 않으려는 수작이다. 혁명만이 아니라, 일상의 화해는 꾸준한 비용을 요청하며, 오히려 그 비용이야말로 일상적 관계의 실체인 것이다. 일상이야말로 그 모든 혁명이 실패하는 원인이자 바로 그 결과물이라는 르페브르(H. Lefebvre)의 말을 나는 그렇게 해석한다.

혁명의 동인과 창업의 명분이 되었던 사연을 질기고 세세하게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배신과 타락을 줄일 수 있을 것이다. 망각처럼 편리한 화해는 없고, 내현기억(implicit memory)의 조작만한 평화도 없기 때문이다. 나는, 루카치가 '자본주의적 삶의 산문성과 퇴행적으로 대치하는 낭만주의'를 불신했던 일마저도 이같은 기억의 문제로 번역할 수 있다고 본다.

생각을 조금 멀리 이끌어 나가면, 기억에 터잡지 못한 화해를 강하게 불신했던 까뮈, "적을 기억하면 힘이 더 난다"는 몽양, 그리고 "적들이여 나를 계속 미워하라 나도 나의 적들을 한 사람도 용서하지 않을 것"이랬던 루신(魯迅)을 생산적으로 떠올릴 수 있다.

물론 기억만으로 생활의 나눔과 돋움은 가능하지 않다. '기억의 교조주의'조차 가능하며, 종종 퇴행적 노스탤지어에 젖어 상호작용의 미래적 실용성을 외면하는 오류에 빠질 수도 있을 것이다. 더불어 사는 일은 혁명의 비용과는 다른 종류의 비용을 조목조목 요구한다. 헬머 역시 그 구애시기에(만) 가능했던 자신의 능동적이며 사려깊은 변신과 응대를 기억할 것이다.(짧은 구애기는 가부장제 아래의 남자가 자신의 자아를 재구성하는 유일무이한 시기!) 그러나 그 기억은 생활을 바꾸지 못했고, 가부장적 '명예'의 그늘 아래에 자신의 아내를 오래 잡아둘 수도 없었다.

그러나 여전히 기억은 중요하며, 갖은 종류의 혁명은 기억이 새거나 조작됨으로써 스스로의 명분과 희생을 배신하게 된다. <동물농장>(1947)의 배신당한 혁명은 자주 기억의 문제를 중심으로 언급된다. "나이든 동물들은 기억을 더듬어...혁명 초기의 농장이 지금보다 더 살기 좋았던 것인지 아니면 더 못했던 것인지 기억해 보려고 했다. 하지만 기억이 나질 않았다." 문제는 세월과 망각이 주는 만고의 보수주의만이 아니다. 기억은 체계적으로 조작되고, 그 조작된 기억 속에서 동물들의 일상은 체계적으로 억압, 착취당한다.

고백이 섹스가 아니듯이, 혁명의 기억만을 먹고 살 수는 없다. 그 혁명을 배신하지 않는 길은 그 기억의 가치를 일상 속에 실천적으로 전유하는 자잘한 노릇과 버릇 밖에 없다. 그러나 자신의 몸과 동선을 '가부장적 명예'보다 낮게 끌어내릴 수 없었던 헬머처럼, 구애든 창업이든 쿠데타든, 갖은 혁명의 주체들은 그 혁명의 대의를 망각 속에 퇴색시킨다. 혹은 생활 속에 내려앉혀 새로운 삶의 양식을 재구성하는 데 실패한다. 혹은 혁명의 육성이 식기도 전에 대의 속에 은폐된 권력의지가 따뜻한 구더기처럼 꿈틀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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