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4 01:55 (수)
잘못된 관행, 표절의 생태학 ② 어디까지가 표절인가
잘못된 관행, 표절의 생태학 ② 어디까지가 표절인가
  • 최장순 기자
  • 승인 2006.09.15 20:05
  • 댓글 1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인용의 원칙’ 마련 시급 … 미간행 지적재산 도용도 표절

개별적인 표절 사례가 속속 적발되고 있다. 하지만, 이런 개별 사안들을 넘어 지금은 ‘숲’을 볼 때다. 표절에 대한 학계 내부의 공감대나 사회적 합의가 부재한 상황에서 의도하지 않은 선의의 피해자가 발생하고 있으며, 무엇이 표절인지에 대한 명확한 개념도 정립돼 있지 않아, 과연 어디까지가 표절인가에 관한 논의가 필요한 시점이다.

노명우 아주대 교수(사회학)는 “그간 표절과 관련한 사회적 합의가 없었고, 공론화되지 않아 표절 문제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서로 감을 못잡고 있는 것 같다”며 “사회적 합의를 만들어가는 방향으로 이 문제에 접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국내 안팎에 도입되고 있는 ‘표절방지 프로그램’에서는 글쓰기의 기술, 인용의 기술을 강조한다. 하지만, 이처럼 표절의 문제는 논문 형식의 문제로만 귀결되지 않는 모호한 측면이 있다. 한 연구물이 아무리 적절한 순간에 올바른 형식으로 출처를 인용하고 있다 하더라도, 논문의 대부분이 인용으로 구성돼 있어 사유의 독창성이 없다면 표절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표절은 단순히 세련된 ‘인용의 기술’로서 방지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이에 표절은 점점 더 애매한 개념이 되어 간다. 과연 표절은 무엇이고, 그 경계는 어디인가.

표절, 그 애매한 경계들

학계에는 이미 많은 표절의 유형이 보고돼 있다. △ 원출처를 각주에 표기한 채, 문장의 어미나 뉘앙스를 달리하고 본인의 생각을 살짝 덧붙이고 있는 경우 △ 특정부분을 적절한 방식으로 인용했지만, 다른 부분은 출처를 명기하지 않은 채 자기 주장화하는 경우 △ 논문의 본문을 다른 논문들로부터 발췌·짜깁기해서 구성한 후, 머리말과 꼬리말에 자신의 감상 또는 제언으로 보충하는 경우 등이 그것이다.

이 가운데 가장 전형적인 유형의 표절은 타인의 글 일부분을 출처인용 없이 그대로 복제하는 것이다. 이보다 좀더 신중을 기하는 사람이라면, 문장의 어미를 뒤바꾸고, 분리돼 있는 문장과 문장을 연결하는 등 문장의 외양을 바꾸어 표절이 아닌 것처럼 위장하기도 한다. 그 의도성을 확인할 길은 없으나, 연구자들이 점점 세련된 글쓰기 스타일을 구사하면서 표절 여부를 확인하기가 더욱 어려워지는 게 사실이다.

□ 개념 표절 = 학문에는 각 분야별로 핵심을 이루는 개념들은 특정 저자에게 귀속돼 있다. 물론, 개념이 특정 저자에게 고유한 것이라 하더라도 이미 알려진 개념들의 출처를 모두 밝힐 필요는 없다. 문제는 같은 개념을 이름만 바꾸어 사용하는 경우인데, 이 경우 자신만의 ‘독창성’을 요구하려 한다면 문제가 된다는 게 학자들의 시각이다.

학문에는 각 분야별로 핵심을 이루는 개념들은 특정 저자에게 귀속돼 있다. 물론, 개념이 특정 저자에게 고유한 것이라 하더라도 이미 알려진 개념들의 출처를 모두 밝힐 필요는 없다. 문제는 같은 개념을 이름만 바꾸어 사용하는 경우인데, 이 경우 자신만의 ‘독창성’을 요구하려 한다면 문제가 된다는 게 학자들의 시각이다.

신중섭 강원대 교수(윤리교육)는 개념의 표절을 두고 “적발의 대상이 되는지 애매하다”고 말한다. “잘 알려져 있는 개념을 쓰는 경우, 독창성을 요구한다고 보기 힘들어 표절로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다만 “학술논문에서 독창성을 요구하고 있는 경우라면 문제삼을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하지만 이 경우에도, 개념이 사용되는 맥락과 해당 분야의 학문적 성격에 대한 명확한 이해가 있어야 하기에 “전문가적 판단이 요구”되는 만큼 애매모호한 측면이 있다고 신 교수는 전한다.

□ 논리구조 및 분석체계 표절 = 한 논문에서 그 근간을 이루는 논리 구조 및 분석 체계의 형식이 다른 논문과 쏙 빼닮아 있다면, 표절 시비가 일어날 수 있다. 타인의 연구물에서 핵심이 되는 논리 구조를 그대로 가져와 표현만 바꾼다거나, 기존의 분석 체계를 새로운 대상에 적용시켜 새로운 논문인 양 주장하는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

오동석 아주대 교수(법학)는 “가령 설문조사에서 약간의 변형을 가해 다른 대상에 적용시킨다든지 하는 건 문제가 될 수 있다”고 전했다. 실제로 최근 적발된 사례를 보면 중학생들의 환경의식을 조사하기 위한 기존의 설문조사문항을 그대로 가져와 초등학생에게 적용하기도 했다. 분석대상을 고려하지도 않았고, 설문문항을 대상에 맞게 만들려는 노력을 기울이지도 않은 것이다. 물론, 이 경우에도 표절의 의혹을 제기할 수는 있지만 표절이라고 단정지을 수 있는 기준은 없다.

하지만, 자연과학의 경우는 이와 다르다. 강창원 카이스트 교수(생명과학)는 “예를 들어, 식물을 대상으로 이뤄졌던 실험을 그대로 동물에 적용시키는 연구를 가정해 볼 수 있다. 이 경우 실험방법이 동일하다 하더라도 적용 대상이 다르면 새로운 연구로 간주된다”고 전했다. 단, 기존의 실험방법을 그대로 적용시킨 연구는 그 가치가 높게 인정되지 않는다는 것.

□ 부적절한 혹은 아주 이상한 인용 = 또 겉으로 봤을 때 인용의 원칙이 준수되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표절로 간주될 수 있는 유형이 있다. 2차문헌에 의존했으면서 1차문헌을 참고한 것처럼 속이는 경우가 그것. 이 경우 “나 역시 1차문헌을 참조했다”고 밝히면 표절로 판정하기 힘든 측면이 있어 표절여부를 밝히기 어렵다. 박헌호 성균관대 교수(국문학)는 “이러한 사례는 왕왕 있으나 증거를 갖춘 적발이 어렵다”고 전한다. 물론, 양심있는 자들은 ‘겹인용’을 통해 2차문헌과 1차문헌을 동시에 기재하지만 문제는 1차문헌의 출처만 밝힌 경우다.

이와 관련해 박 교수는 “인용문의 출처가 공중에 떠버린 경우”를 예로 든다. 이 같은 경우, A 논문에서 1차문헌의 출처를 명기한 부분에 오류가 있어 도저히 그 출처를 통해서는 1차문헌을 찾을 수 없는 경우가 발생했다면, 그리고 B 논문이 그 오류마저 복제해왔다면, 이는 B 논문이 1차문헌을 직접 참조하지 않았다고 보여진다는 것.

배철현 서울대 교수(종교학)는 “한국에서 古典번역은 대부분 그럴 가능성이 농후하다”고 전했다. 국내에 고대어 독해능력을 갖춘 지식인들이 많지도 않으며, 구할 수 없는 텍스트도 많기 때문이다. 이어 그는 “산스크리트, 아랍 텍스트에 관한 연구는 거의 90%”가 1차문헌을 직접 보지 못하고 2차문헌만 참고했을 것이라고 전했다.

“학문적 충고도 가로채는 경우 있어”

□ 타인의 아이디어 도용 = 세미나, 학회 등 공식적인 자리나 사적인 자리에서 나온 타인의 학문적 아이디어를 자신의 생각인 양 인용하는 것 역시 표절 혐의를 받는다. 고려대의 한 교수는 “어느 교수가 내 분야에 대해 물어 자세히 설명해줬다. 그런데 며칠 뒤 내가 말한 내용이 그 교수 이름으로 저널에 실렸다”고 전한다. 이런 경우 증명하기는 어렵지만 표절의 한 유형으로, 지양해야 마땅하다.

또 다른 유형은 공동연구가 중간에 틀어질 경우이다. 공동연구자 중의 어느 한 사람이 대개는 핵심 아이디어를 내놓고 공동작업이 이뤄지는데, 중간에 빠져나간 구성원이 먼저 이를 주제로 단독논문을 발표하는 경우라 할 수 있다.

公刊되지 않은 아이디어라도, 그 아이디어에 신세를 졌다면 윤리적으로는 밝히는 것이 맞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다고 연구자를 표절로 몰아붙이기도 어려운 실정이다.

이러한 상황과 관련해 박희제 경희대 교수(사회학)는 “예전 같으면 학회에서 참신한 아이디어를 서로 제공하며 활발히 토론했지만, 지금은 남들이 베낄까봐 구체적 사실들을 완전히 공개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며 “학회가 재미없어졌다”고 전했다.

이어 그는 “수업시간에 교수가 학생들로부터 아이디어를 얻어 논문을 썼다고 할 때, 그걸 표절이라고 봐야 하는가”라는 문제를 제기한다. 어디까지가 베낀 것인지 그 경계가 애매하다는 것. 이에 박 교수는 “그 경계에 대해서는 문화적 맥락을 고려한 내부적 합의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획일적으로 규정을 만들기 곤란하다는 것이다.

□ 출판되지 않은 지적재산권 도용 = 출판되지 않은 타인의 지적재산을 옮겨와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 이 경우 발각될 위험도 없고, 적발되더라도 물증 확보가 어려워 특별한 조치를 취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

출판되지 않은 타인의 지적재산을 옮겨와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 이 경우 발각될 위험도 없고, 적발되더라도 물증 확보가 어려워 특별한 조치를 취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

제자의 수업발표문, 학술대회 논평문, 인터넷 자료 등을 출처 언급 없이 사용할 경우 원칙적으로는 표절에 해당한다. 이와 관련해 오동석 교수는 “가령, 이러이러한 부분이 보완돼야 한다는 식의 학술대회 논평문을 참고할 때에도 윤리적으로 그 출처를 밝힐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출판되지 않은 특정 출처를 베낀 경우에도 전문적인 지식을 통해 보다 정교하게 분석해냈다면 표절로 보기 어려울 수도 있다”는 게 박희제 경희대 교수의 의견이다.

표절을 구분하는 세부 기준들이 마련돼 있지 않고, 기준을 획일적으로 마련하기 어려운 상황들이 존재한다. 이에 유재원 한양대 교수(행정학)는 “표절 규정은 권면적이고 선언적인 차원에서 경구정도로 그쳐야 한다”고 언급해 우선 규정이 구체적이어야 하는가 대한 논의가 필요함을 시사했다.

최장순 기자 che@kyosu.net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1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밝음 2006-10-18 14:20:11
"수업시간에 교수가 학생들로부터 아이디어를 얻어 논문을 썼다고 할 때, 그걸 표절이라고 봐야 하는가”이때에는 아이디어가 중요한 것이라면, 기본적으로 그 학생을 논문의 공동저자로 참여시키는 것이 당연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공대 수업의 경우 수업시간에 소규모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발표하는 경우가 많은데, 해당 과목의 지도 교수는 해당 연구 분야의 연구자이기 때문에 학생들의 아이디어가 교수의 연구에 매우 유용한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경우 아이디어의 중요도에 따라 학생을 공동 연구자로 섭외하여 같이 연구를 진행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봅니다. 특히 그 아이디어가 매우 핵심적이라면 제 1 저자로 해주어야 하겠죠. 제 경우에도 이런 경우가 있었는데, 그 교수님은 학부생이었던 저를 제 1 저자로 해주셨고, 논문지도를 통해 두 사람의 이름으로 논문이 출판된 적이 있습니다. 이런 것은 어쩌면 매우 당연한 것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