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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로세평] 인문학 정책의 기본방향
[신문로세평] 인문학 정책의 기본방향
  • 조동일 / 서울대
  • 승인 2001.08.13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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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08-13 17:36:39
조동일 / 서울대·국문학

인문학 육성 방안을 논의하는 모임을 정부에서 개최하면서 오라고 하면 반드시 참석해, 좋은 방향으로 일이 추진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장문의 글을 써서 발표하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그런데 의견 수렴은 형식적인 절차로 삼고 정해진 각본대로 일을 추진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떨칠 수 없다.

내가 모임에 참석했다고 이름은 서두에다 밝히고 무슨 말을 했는지는 전혀 언급하지도 않아, 마치 정해진 각본에 찬성한 것 같이 보이도록 하는 보도가 가끔 나돈다. 이름이 쓸데없이 나서 도용되는 피해를 입는다고 혼자 개탄하고 말 일이 아니다.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해명해, 사태가 그릇되는 것을 막고 바른 길을 제시하기 위해 끝까지 노력해야 한다.

인문학을 육성하는 일을 정부가 맡아서 하겠다고 나서는 것은 말려야 한다. 무슨 거창한 기구를 설치해 인문학 육성을 담당하게 하면, 역효과를 낸다. 땅 사고 집 짓고 사무기구를 운영하는 데 들어가는 막대한 예산을 모두 학문에 투자했다고 하는 거짓 선전만 하고 만다. 하급공무원인 학예연구직을 채용해 연구를 시키고, 외부 학자들에게 연구비를 나누어주기도 하면서, 근무를 태만하게 하지 못하게, 연구비를 유용을 하지 못하게 감시하는 관료적인 통제를 강화하면 예산 낭비를 막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망상이다. 그것은 인문학을 죽이는 정책이다.

학문은 안정된 신분을 지속적으로 얻고 자유롭게 창의적으로 연구해야 한다. 인문학에서는 그것이 절대적인 조건이다. 조직의 위계질서, 관료적인 통제, 금전에 의한 유혹 같은 것들로 자유를 파괴하고 창의력을 죽이면서 인문학을 육성하겠다는 것은 망상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인문학을 살리는 방안이 무엇인가 이미 자세하게 밝혀 논했으나, 다시 간추리고 당장 실현할 수 있게 가다듬어 내놓기로 한다.

인문학의 위기는 세 가지 이유에서 나날이 가중되고 있다. 학문을 시장경쟁에 내맡긴 탓에, 인문학은 교수 자리가 줄어들고, 유능한 후속세대가 실업 사태에 있는 불행이 확대되고 있다. 인문학연구는 학문의 특성상 보조연구원에게 맡길 수 없고 연구자가 스스로 해야 하는데, 교수는 과도한 강의와 잡무에 시달리고 있어 그럴 시간이 없다. 학과 및 전공의 폐쇄적이고 배타적인 구분 때문에 소속을 넘어서서 자기 연구를 확대하기 어렵고, 학제간의 협동연구를 발전시킬 수 없으며, 세부적인 사실의 천착에 몰두해 총체적인 연구를 창조적으로 해야 하는 사명을 망각하고 있다.

인력 부족을 해결하려면, 정부가 인건비를 부담해 인문학 교수의 자리를 확보해야 한다. 시간 부족은 장기간에 걸쳐 많은 노력이 필요한 획기적인 연구를 감당하는 연구교수가 다수 있어야 해결된다.

영역 폐쇄를 철폐하기 위해서는 여러 학문 분야들 사이의 다각적인 협동연구를 자유롭게 하는 대학연구소를 적극 육성해야 한다. 셋을 모두 해결하는 방안이 정부가 인건비를 부담해 대학연구소에 소속된 연구교수들이 바람직한 연구를 마음껏 하도록 하는 것이다. 정부에서 추진하고 있는 당면한 시책을 넘어서서, 가치관의 근본을 반성하고 문화창조의 방향을 제시하는 인문학을 하는 길이 거기 있다.

지원 대상 선정에서 특혜나 불공정이 있다는 시비가 벌어지지 않게 하는 것도 깊이 유의해야 할 사항이다. 기존의 교수를 자체 부담으로 연구소교수로 배정해 연구소 육성의 의지를 보이는 대학을 신청에 의해 선정해, 그 인원수의 배수만큼 연구소교수를 신규로 채용하게 하고 인건비를 전액 국가에서 제공하는 것이 당장 실현할 수 있는 최상의 방안이다. 이룬 업적을 일정한 기간마다 총체적으로 평가해 지원의 존폐 또는 확대와 축소 여부를 결정하면 효율을 높이고 낭비를 막을 수 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재판은 법원에서 하듯이 학문연구에 대한 평가는 학술원에서 맡아 공개적으로 진행하도록 제도화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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