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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소평, 모택동사상 신화화를 비판하다
등소평, 모택동사상 신화화를 비판하다
  • 이중 전 숭실대
  • 승인 2006.09.09 23:47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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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의 중국산책 (14)

출처: 동아일보
절대 권력에 가까웠던 모택동의 권세도 하루 아침, 하늘에서 떨어진 것은 아니었다. 누가 주워서 준 것도 아니고, 오로지 스스로 일구고 달구어서 만들어낸 작품이었다. 모택동을 호되게 비판한 책들을 보면, 그의 비정함과 이중성, 때로는 비열하고 비겁하기까지 한 면모를 적나라하게 들춰내고 있다. 頂上의 권력에도 높고 낮음이 있을 것이다. 모택동 권력의 꼭대기는 아주 높은 것이었다. 그만큼 다가가기 힘든 것이었고, 한번 올라가면 내려오기가 쉽지 않은 자리였다. 권력자의 영광과 비극은 바로 이 오르내림에 있다. 모택동 리더십의 정립과정을 3단계로 보는 시각이 있다. 등소평의 이야기로부터 실타래를 풀어가 보자.

“장정이 끝날 때까지도 모택동 동지는 당의 총서기가 아니었지만 遵義회의 이후엔 우리 당의 핵심 영도로 자리 잡았다. 1945년 우리 당의 제7차 전국대표대회를 소집해서야 최후의 결론을 내렸고 또 조직상 모택동 동지를 중앙위원회 주석으로 선출하였다”

여기서 주목할 대목은 ‘준의회의’라는 사건과 ‘핵심 영도’라는 표현이다. 핵심 영도란, 공산당의 영도 그룹, 즉 최고위 영도집단체제의 핵심적 존재를 의미한다. 이것은 등소평 특유의 표현이자, 중국의 지도체제를 논할 때 반드시 거론되는, 하나의 정설이다. 등소평의 논리에 따른다면, 제1대 영도체제의 핵심은 모택동, 제2대 핵심은 등소평, 제3대 핵심은 강택민, 제4대가 오늘의 후진타오이다. 이런 논리는 언 듯 보아 모택동의 ‘절대권력’에는 적용할 수 없는 표현 같다. 그러나 등소평은 굳이 그런 표현을 통하여 모택동의 지도적 위치를 규정하려 했고, 향후의 중공당 지도체제에도 적용하려 했다. 자기 스스로가 실천을 통해 구현하려고 애썼다. 

대통령책임제를 선호해온 우리는 알게 모르게 제왕적 대통령에 익숙해 있다. All or Nothing 식 ‘大權’에 집착하는 대통령 후보군과 그 추종자를 양산하는 정치풍토를 아무런 성찰도 없이 수용하고 있는 현실이다. 이러한 한국적 시각으로 보면, 중공당의 수뇌는 한국 대통령보다 더 절대적인 권력자일 것이다. 야당도 없고 권력의 집중이 보장된 상황이다. 후진타오가 군사위원회 주석 자리까지 강택민으로부터 물려받았다는 기사가 나오자 한국 언론은 이제 후진타오 1인 권력시대가 열렸다는 식의 논평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연이어 후진타오와 전임자인 강택민과의 권력싸움으로 도배를 하기 시작했다. 그런 보도나 논평의 흐름은 오늘에도 이어지고 있으며, 날이 갈수록 더 심해지고 있다.

그렇다면 과연 중국의 최고지도자인 후진타오는 無所不爲의 권력을 누리고 있는 것일까. ‘영도집단’과 ‘핵심지도자’라는 개념은 등소평이 모진 고난과 풍파를 겪은 끝에 완성시킨 정치적 자산이다. 말 그대로 無所不爲나 다름없던 모택동의 권력마저도 등소평은 당시 제1대 ‘영도집단’의 ‘핵심’으로 자리매김했다. ‘모택동 사상’이란 것도 단초는 모택동으로부터 시작된 것이지만 기본은 당시 영도들, 공산혁명 지도자들이 함께 개발하고 공유한 사상이라는 것이다. 등소평의 말이다.

“우리 당은 연안 시기에 여러 면에서 그의 사상을 ‘모택동 사상’으로 개괄하여 우리 당의 지도사상으로 삼았다......물론 모택동 사상은 모택동 동지 개인의 창조물은 아니다. 1세대 노혁명가들 모두가 모택동 사상을 만들고 발전시키는 데에 참여했다”

등소평은 지도자의 神格化를 용납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정치적 명줄을 쥐고 있는 모택동으로부터 두 번이나 내침을 당해야 했다. 일종의 집단지도체제 같은 것을 그는 추구했던 같다. 그러면서도 그러한 집단적 성격의 정치체제에는 핵심 지도자가 있어서 책임지고 컨트롤도 하고 지도력을 발휘해야 한다고 그는 믿었다. 제2대 영도 핵심으로서의 그는 자기 위치를 굳게 지켰고, 성공한 리더십을 보여주었다.

강택민, 후진타오 시대를 관통하여 중국의 권력정치를 제대로 읽으려면 한국적 大權 중심 시각에서 벗어나야만 할 것이다. 영도체제니 핵심이니 하는 개념은 우리에게 낯설기만 하다. 등소평이 모택동의 위치를 영도체제의 핵심으로 규정하는 말든 연안 시기 이후 모택동의 권력 집중은 가속화 되고 있었다. 1935년의 장정 도중의 준의회의 결과가 모택동 권력 장악의 첫 번째 전환점이었다면 그 두 번째 전환점은 1938년의 본격적인 抗日 민족통일전선의 형성이라 하겠다. 극도로 열세였던 중국 공산당이 장개석의 국민당 군과 손잡고 항일 연합전선을 펴며, 한편으로 노동자, 농민계급 뿐만 아니라 소자산 계급, 민족자산계급에게까지 손을 뻗혀서 통일전선을 형성하기에 이르자 모택동의 당내 위치는 확고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전당적 지지를 확보하면서 모택동은 소련으로부터도 중국공산당의 명실상부한 지도자로 인정받게 되었다. 

세 번째 전환점은 ‘모택동 사상’의 정립기에 해당된다. 등소평 말대로 ‘모택동 사상’은 당시 혁명 1세대들이 공유해야 할 공동자산이기는 하지만, 나라 안팎으로 모택동의 聲價를 한껏 올려준 것만은 틀림없다. 앞서 모택동이야말로 군주로서의 功業을 세우면서 한편으로 사상가로서의 자기 이념을 창출할 수 있는, 특유한 능력의 소유자로 평가되었던 것도 바로 이 ‘모택동 사상’에 근거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모택동 사상은 당시의 중공당을 단합시켰고 이념적으로 무장시키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1934년 서금에서 출발한 대장정에 모택동은 애초부터 소외되어 있었다. 명목상으론 당시 강서 소비에트 임시정부의 주석이었지만 소련을 업은 코민테른 지도부와의 알력 때문에 권력실세로부터 멀리 쫓겨나서 외롭고 병든 몸으로 있었다. 장정 참가도 가까스로 주은래의 알선에 의지해야만 했었다. 장정부대의 거듭된 패퇴와 進退維谷의 극점에서 이루어진 것이 준의회의였다. 모택동의 대반전이 여기서 시작되었고, 마침내 성공했다. 그는 1949년 10월의 건국선포이 주인공이 되었다. 1976년 9월 9일, 죽음의 순간가지 그는 권력의 정상에서 내려오지 않았다. 이러한 긴 과정을 거쳐서 확립된 모택동의 권력기반이었지만 그것을 무너뜨리는 것도 그 자신의 몫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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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신문 2006-09-11 21:56:44
지적 감사드립니다. 실수는 한번으로 족한데, 자꾸 이러니 면목이 없습니다.

고태우 2006-09-11 17:53:30
기사 말미 모택동의 죽음 날짜는 1996년 9월 9일이 아니고,1976년 9월 9일입니다.
정정이 필요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