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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논평] 개강 첫 주
[교수논평] 개강 첫 주
  • 김성룡 호서대
  • 승인 2006.09.09 22:2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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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룡 / 호서대·고전비평

거의 대부분의 대학이 9월 1일을 포함한 주에 개강을 한다. 16주 수업을 하는 것이 대세더니 15주 수업을 하는 대학도 크게 늘었다. 아주 드물게는 17주 수업을 하는 대학도 있다. 17주 수업을 하는 대학은 노염(老炎)이 성성한 8월의 이른 하순에 강의를 시작했다.

사람의 심리가 항상성을 유지하려는 것인지, 아니면 관성인지, 그것도 아니면 워낙 인간이란 추방당하기 직전의 파라다이스에서처럼 안식하는 것을 더 좋아하는 것인지, 방학 후의 강의는 유난히 힘들게만 느껴진다. 특히 2학기는 더 그렇다. 그래서 그럴까? 첫 주의 수업은 하는 둥 마는 둥 형식적으로 이뤄지는 경우가 많다. 이렇게 첫 주의 수업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던 일이 아주 오래된 탓으로 반성의 겨를도 없이 이젠 으레 그러려니 한다.

첫 주의 수업이 부실한 데에는 학사 일정 상 어쩔 수 없는 면도 있다. 대부분의 대학이 수강 정정 기간을 개강 첫 주로 정하고 있다. 만약 수강을 정정해서 교과목을 신청한 학생이라면 어쩔 수 없이 첫 주의 수업에 불참하게 된다. 담당 과목 교수도 첫 주 수업의 출결 결과를 학점에 반영하지 않도록 배려하기도 한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첫 주의 수업이 어수선할 수밖에 없다. 그런 때문에 학생들은 첫 주의 수업을 중시하지 않게 되고 심지어는 불참하기도 한다.

고금을 막론하고 공부하기 좋아하는 학생이 얼마나 되는가 싶어 학생들의 첫 주 불참은 애교로 봐줄 수도 있다. 하지만 교수가 첫 주의 수업을 오리엔테이션이라는 명목으로 엉성하게 준비하거나 심지어 불참한다면 이것은 관행이라고 보아 넘길 수 없는 크게 잘못된 일이다. 교육이 신성한 육영의 장이라고 하든, 교육이 쌍무적 협약에 의한 교육 서비스 제공의 장이라고 하든, 그 어떤 경우든 교육자의 불성실함은 의무에 위배되기 때문이다.

1975년에서 2000년 사이에 OECD국가에서 대학 교육을 받은 사람의 비율은 22%에서 41%로 거의 두 배 가까이 늘었다. 우리나라의 고등 교육 취학률도 1980년에 11.4%였으나 2004년에는 62%에 육박했다. 지금은 이른바 대학 교육에의 ‘보편적 접근’(universal access)이 실현된 단계에 있는 것이다. 이는 우리 대학 교육의 가치와 목적이 전면 바뀌어야 함을 말해주고 있다. 즉, 1980년대는 대학 교육이 엘리트 중심 교육을 지향했지만 이제는 대학 교육이 다양한 수준의 다양한 인력을 양성하는 시스템으로 전환해야 하는 것이다.

상징적이긴 하지만 1960년대까지는 시위대를 좇아 대학 구내로 경찰이 침범하기 어려웠다. 1980년대까지는 대학에 자본주의적 경쟁 논리가 침범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지금의 대학은 관념적으로든 실제로든 사회적 분업을 담당하는 공공 기관의 하나일 뿐이다. 당연히 사회의 다른 공공 기관과 마찬가지로 효율성으로 그 가치를 평가 받아야 한다. 그렇다면 대학을 평가하는 그 효율성의 기준은 과연 무엇일까?

대학은 연구소가 아니라 고등 교육 기관이다. 여기에 교육의 수준은 교육자의 수준이라는 말도 덧붙여서 생각해보자. 그 말이 정녕 사실이라면, 또는 최소한 우리 모두가 받아들일 만한 격률(格率)이라고 한다면, 우리 대학의 교육 수준은 입학하는 학생의 수능 성적으로가 아니라 그 대학에 있는 교육자의 교육 수준으로 재어야 한다. 그런데 말은 이렇게 하면서도 실제의 교육의 장에서는 교육자가 그의 성실의무(誠實義務)를 다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이유를 학생이나 학교의 탓으로 돌리려는 사람이 꽤 된다. 게다가 교수 업적 평가가 정량적 평가가 가능한 연구 업적 위주로 이뤄지고 교육 영역은 어지간하면 도달할 수 있는 최소한의 지표로 구성되니 교육 효율성을 측정할 길은 더욱 멀다.

사정은 그럴지 모르지만 교육자의 본분이 교육에 있다는 것은 변함이 없다. 자기가 잘 하는 일과, 자기가 좋아하는 일과, 자기를 먹여 살리는 일이 모두 같은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다. 그런데 자기를 먹여 살리는 일은 교수직인데 자기가 좋아하는 일은 교육이 아닌 사람이 있다. 그런 사람은 다른 이의 존경을 받고 안정된 생활을 할 수는 있어도 행복을 찾지는 못할 것이다. 하지만 17주 수업을 하면서도 첫 주 수업이나 마지막 수업이나 꽉 채운 수업을 하면서 그것을 행복감으로 느끼는 교수가 실제로는 더 많다. 그 점이 우리를 안도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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