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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건너다
스스로 건너다
  • 최승우
  • 승인 2023.05.24 13:4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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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서용 지음 | 메타노이아 | 220쪽

『스스로 건너다-자기 구원을 위하여(1)』은 청년들에게 드리는 위로이다. 누군가 아픈 것이 청춘이라 했다지만, 그는 청춘들의 아픔을 전혀 모르는 사람일 게다. 어차피 청춘은 고통이기 때문에 참고 견디라는 한가한 하나마나한 소리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청춘이란 푸른 봄이다. 청년이란 푸른 봄을 향유하는 사람이다. 그는 아름다움을 꿈꾸며 아름다운 사람이 되기를 희망한다.

그러나 지금 한국 사회는 청년들을 미래의 희망이라고 진정으로 생각하고 그들을 배려하고 있는가? 이제 청년은 사회적 약자로 전락한 지 오래다. 그들은 생존하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하며 직장을 구하기 위해 삼각 김밥 먹으면서 공부하고 있다. 청춘의 낭만은 오래 전의 추억일 뿐이다. 많은 청년들이 죽임을 당하고 또는 스스로 죽기도 한다. 하도 많은 죽음이 일어나기에 이제는 무덤덤하다.

죽음이 일상화되어 버린 것이다. 죽음의 일상화와 그 죽음에 대한 정신의 마비는 삶을 무기력하게 만든다. 살기 위해 일하는데 그 결과가 죽음이라면 누가 애써 살고자 하겠는가? 

그럼에도 태어난 이상 살아가야 한다. 살아내야 한다. 어떤 작가의 말대로 존버 해야 한다. 존버 하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을 보지 않으면 안 된다. ‘인지도자인지기(因地倒者因地起)’라는 옛말이 있다. ‘땅에서 넘어진 자, 땅을 딛고 일어나야 한다.’는 뜻이다.

내가 살고 있는 대부분의 인간관계는 나로 하여금 넘어지게 하는 땅들이다. 하지만 그 땅들이 나를 넘어지게 한 직접적 원인은 아니다. 조건들일 뿐이며, 여건들일 뿐이며, 환경일 뿐이다.

궁극적으로 넘어진 것은 자신이다. 그렇다면 일어설 수 있는 것은 외적인 조건이나 여건 그리고 환경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자신일 수밖에 없다. 그 넘어진 자신을 일으켜 세우는 것도 바로 자기 자신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물을 수밖에 없다. 나 자신이 누구인가를. 이러한 물음은 한가한 질문이 아니다. 나 자신을 알지 않고서는 일어설 수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나는 누구인가 라는 질문을 통해 나 자신을 바로 알 때 우리는 비로소 일어설 수 있고, 일어설 때 건너는 것이다.

묻는 것이 건너는 것. 건너는 것은 하찮은 자기인 줄로만 알았는데, 나 자신 그렇게 남에게 하대를 받아야 하는 하찮은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며, 이렇게 깨달을 때 우리는 건너는 것이다. 건너는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을 구원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 글은 30개로 구성되어 있다. 모두 어떻게 하면 스스로 건널 수 있는가 하는 것을 주제로 하고 있다. 필자가 살아오면서 느꼈던 것을 그리고 글을 읽으면서 떠 오른 단상을 기술했다. 청년을 살아내고 그리고 장년을 지나 노년으로 가는 길목에서 한 번 되돌아 본 풍경들이다. 후회는 없으나 아쉬움은 있다. 그러나 지금도 길을 가고 있다.   

김재호 기자 kimyital@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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