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문 자기복제의 의미
논문 ‘자기표절’이 사회적 이슈가 되고 있다. 그런데 표절(剽竊)은 ‘시나 글, 노래 따위를 지을 때에 남의 작품의 일부를 (주인) 몰래 따다 쓴’다는 뜻이므로 자신의 글을 자신이 가져다 쓴 것을 자기표절이라고 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자기의 것을 가지고 다시 사용하는 것은 훔치는 것이 아니라 ‘원래의 저작물을 재생하여 표현하는 모든 행위’라는 뜻을 지닌 ‘복제(複製)’ 행위에 해당하므로 자기표절이라는 용어 대신 ‘자기복제’라는 용어가 더 타당하다.
자기표절 혹은 자기복제라는 말은 과거에 발표했던 논문이나 논문의 아이디어를 자신의 다른 논문에 활용하는 행위를 기술하는 용어가 아니라 그러한 행위 중에서 불법적인 행위 혹은 비윤리적인 행위를 기술할 목적으로 고안된 용어이므로 그러한 행위중 어떤 것이 자기복제에 해당하는지는 명확하게 규정할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자기의 연구 분야를 지속적으로 발전시켜가는 과정에서 당연하게 발생하는 자기 논문 활용 및 보완 행위 자체까지 문제시하게 될 것이다.
지금까지 자기복제가 발생했던 근본 원인은 정량적 평가가 가져온 논문 편수에 대한 부담, 자기복제에 대한 명확한 기준 부재 등의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하나의 논문을 몇 가지 방식으로 활용하고 이들 각각에 대해 논문 실적 점수를 인정받는 것은 명확하게 자기복제이다. 그러나 경계선상에 있는 경우가 훨씬 더 많았다. 그리고 각 대학에서도 연구업적평가를 할 때에도 중복 사용 혹은 과거 논문의 일부가 사용된 새로운 논문에 대한 논문 실적인정 기준이 별도로 존재하지 않았다. 향후 자기복제를 막고 교수의 연구활동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자기복제’에 해당하는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를 명확히 구분할 수 있는 기준을 마련하여 제시하고, 단순 ‘복제’에 해당할 경우 연구 실적물 인정률을 구체적으로 제시하여 복제의 실익이 줄어들도록 해야 할 것이다.
자기복제 유형과 완화책
학문 활동 과정에 자기 논문의 아이디어를 활용하여 이를 발전시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고 바람직한 현상이다. 따라서 자기 논문을 다시 활용하는 행위중에서 자기복제의 범위에 드는 행위와 그렇지 않은 바람직한 행위를 구분할 수 있는 기준을 지속적으로 발전시켜나갈 필요가 있다.
가장 명백한 자기복제는 논문 점수를 높이기 위해 과거 사용했던 논문을 거의 그대로 다른 학술지에 발표하는 행위이다. 만일 학회의 요청에 따라 독자가 다른 학회지에 다시 발표하기는 하지만 과거 다른 학술지에 발표한 논문이었음을 밝히고 이를 점수 계산에 포함시키지 않는다면 이는 자기복제에 포함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즉, 과거 논문을 활용하여 논문을 쓰는 경우에 자기복제가 되는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를 명확히 제시할 필요가 있다. 만일 그렇지 않으면 문제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새 논문을 만들었다가 자기복제로 평가받는 선의의 피해자가 생기게 될 것이다.
자기 논문을 다시 활용하는 경우 활용 정도와 관계없이 고의적으로 활용 여부를 밝히지 않으면 자기복제로 간주해야 할 것이다. 여기서 고의성이 없었음은 연구자가 입증 책임을 지도록 해야 할 것이다. 즉, 자기복제한 논문을 활용하여 업적평가 등에서 이득을 챙겼다면 고의성이 있는 것으로 간주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출처를 밝히고 자기 논문을 활용하여 새 논문을 쓰는 경우에는 과거 논문이 차지하는 비중에 따라 업적평가에서의 점수 인정률을 달리할 필요는 있다. 가령 과거 논문을 50% 정도 활용했다면 연구실적 인정시 실적물 점수의 50%만 인정하는 식으로 인정률을 달리하면 될 것이다. 자기 논문을 그대로 번역하여 다른 언어로 출판한 경우에는 다른 언어로 출판되었던 것을 번역한 것임을 밝히고 출판하도록 할 필요가 있다. 만일 다른 국가에서 그 논문 게재를 허용한다면 실적물 점수의 몇 %를 인정할 것인지에 대해 정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세계의 독자를 위하여 국내 학술지에 게재된 논문을 다른 나라 언어로 번역하여 다시 게재하는 경우에는 들어가는 노력 등을 감안하여 인정률을 높일 필요가 있다. 단, 외국 학술지에 게재된 논문을 국내 독자를 위하여 다시 우리말로 국내학술지에 게재하는 것은 특정한 목적을 가진 경우가 아니라면 국내 학회에서 권장하지 않아야 하고, 대학에서도 실적물 인정률을 아주 낮추어야 하리라 생각된다.
넓은 의미의 자기복제에는 하나의 연구를 수행한 후 일부분만 다른 여러 개의 논문으로 쪼갠 후 여러 학술지에 게재하는 논문쪼개기, 유사한 이론적 틀과 자료를 활용하여 유사한 주제의 논문을 여러 학술지에 게재하는 유사 주제 논문 양산하기, 동일한 연구 틀을 사용하면서 자료만 바꾸어 새로운 논문으로 게재하는 이란성 쌍생아 논문 생산하기 등이 여기에 포함된다. 이상의 경우에도 이러한 사실을 명기하지 않는 경우에만 자기복제로 간주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명기하여 게재신청을 했는데도 학회가 타당하다고 인정하여 논문이 게재된 경우에는 실적물 인정률을 차등적용할 필요가 있다. 가령 이란성 쌍생아 논문의 경우는 실적물 인정률을 70%로 하는 것이 그 방안이다. 물론 이 경우 이러한 인정률 적용 판단을 누가할 것인가의 문제가 제기되기는 하지만 일차적으로 본인이 하도록 하고, 본인이 한 판단에 의거하여 각 대학의 교수업적평가위원회에서 최종 결정하는 절차를 거치면 될 것이다.
유사한 수준의 학술지가 아니라 교내 학술지나 인정률이 낮은 학술지에 발표된 논문을 수정 보완하여 인정률이 높은 학술지에 게재할 경우에도 반드시 이 사실을 명기하도록 하고, 인정률이 높은 학술지에 게재된 경우에는 과거 인정 점수를 삭제하거나 아니면 인정률 자체를 달리하는 방안이 모색될 필요가 있다. 학진등재(후보)지의 자격 요건에 자기복제 범주를 명기하도록 하고, 스스로 밝히지 않았다가 추후에 발견된 경우에는 게재 취소를 포함한 제재 조치를 포함시키도록 하면 제반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될 것으로 보인다.
사회에서 자기표절이라고 말하고 있는 학술회의에서 발표한 논문을 수정 보완하여 학회지에 게재하는 것, 학회지에 발표한 논문을 일부 발췌․수정한 후 일반 잡지에 게재하는 것 등은 자기복제가 아닌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단, 이 경우에도 반드시 출처를 밝히도록 하고, 연구실적 평가시에 인정률을 달리할 필요가 있다. 자기 논문을 활용하여 책을 출판하는 경우에도 이를 자기복제로 몰아갈 것이 아니라 논문 출처를 밝히도록 하고, 논문 활용 정도에 따른 인정률을 구체적으로 제시함으로써 연구 결과를 정리 발전시켜갈 수 있도록 유도할 필요가 있다. 가령 동일한 논문을 그대로 어떤 편집된 책에 포함시켰다면 인정률을 0%로 하면 될 것이다.
각 대학은 발생한 문제를 해결하고, 나아가 문제를 예방하기 위하여 연구실적 평가 기준을 지속적으로 보완해 가야 할 것이다. 이러한 노력이 지속된다면 이번에 제기된 논문 자기복제의 문제는 우리 학계에 전화위복의 계기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