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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가꾼 사람들] 조선중기 개혁사상가 정여립(?∼1589)
[역사를 가꾼 사람들] 조선중기 개혁사상가 정여립(?∼1589)
  • 교수신문
  • 승인 2001.08.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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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습왕조 비판한 선비, 혹은 역모를 꿈꾼 정치꾼
김재영 / 전북대·정치외교학

역사란 “잃어버린 부분이 허다히 많은 그림맞추기에 불과하다”고 한다. 우리들이 책에서 읽은 역사는 물론 사실을 토대로 한 것이지만 엄밀히 말하면 그것은 결코 사실이 아니며 단지 역사가가 그려낸 판단의 체계에 불과하다는 뜻이다. 사실 과거의 역사 뿐 아니라 현재 우리의 눈앞에서 전개되고 있는 일련의 사건만 보아도 그것이 그럴싸한 그림맞추기 같다는 인상을 주는 경우가 흔히 있다.

정여립에 관련된 己丑獄死는 지금부터 정확하게 4백11년 전의 일이고 그에 관련된 자료는 거의 모두가 왕조실록을 준거로 작성된 것들이다. 기축옥사는 서인 집권 후 수정실록에 기록된 것이기 때문에 그 내용을 모두 사실로 받아들이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최근 정여립의 생애나 사상 등에 관한 몇 가지 쟁점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무엇보다 정여립은 이미 출생부터 반역의 인물로 예정되어 있었다고 한다. 선조 수정실록에 의하면 정여립은 정중부가 꿈에 나타나 수태되었으며 그가 세상에 태어난 날에도 정중부가 나타나는 이변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그는 7,8세 때는 까치새끼를 토막내 죽인 사실을 일러바친 여종의 배를 칼로 찔러 죽였으며, 15,6세 때는 부친(당시 익산군수)의 政事에 관여하여 관의 일을 專斷했고 士族의 청상과부를 범하여 첩으로 삼는 등 패륜 행위를 일삼았다 한다.
한편 그는 진사(1567년, 당시 22세로 추정)에 이어 문과에 2등 합격하여 성균관 學諭, 정언 예조좌랑 홍문관 修撰직을 역임했다. 그는 문과에 합격한 11년만에 서인측의 도움으로 정언좌랑이 되었고 율곡 사후 두 번에 걸쳐 수찬이 되었으나 그때마다 한 두 달도 못되어 그만두고 향촌활동에 전념했다.

그가 중앙무대에 진출한 17년간의 행적에 관하여 선조실록에서는 ‘총명하고 논변이 뛰어난 사람’, ‘기질이 강하고 성질이 거친 사람’, ‘많이 배우고 재주가 있으나 남을 업신여기는 병통이 있는 사람(율곡의 말)’, ‘칭찬하는 자도 헐뜯는 자도 없는 사람(선조의 말)’, 등 그다지 비범한 내용은 없어 그의 성장과정과는 대조적이다.

정여립에 대한 두 번째 주장은, 스승을 배신한 刑恕(송나라 정이의 제자)와 같은 사람이요, 세상이 바뀌자 서인당에서 동인당으로 변신한 우리나라 최초의 철새정치인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정여립이 율곡의 제자라는 주장은 근거가 없다. 그가 율곡과 가까이 지내면서 서로 의기가 상통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의 도움을 그다지 크게 받았다고 볼 수도 없다. 정여립은 홍문관 수찬이란 요직에 있으면서도 윗사람의 비위를 맞추거나 출세와 영달을 위해 能屈能伸하지 못하여 두 번씩이나 그 직을 팽개치고 나왔다. 또한 당색을 초월하여 서인당의 전주부윤 남언경에 협력, 왜적을 물리쳤다. 아마 그때 그는 대동계를 더욱 활성화하여 미구에 닥칠 왜구침략에 대비했을지도 모른다. 그는 너무 즉흥적, 직선적이어서 상호융화하지 못한 것이 흠이었을 뿐, 철새정치인은 아니었다. 오히려 현재 성현으로 존경받고 있는 율곡에게 ‘경솔하고 편견과 아집이 많은 사람, 매국의 奸物’이란 비난이 있고 그를 극구 칭찬하던 선조 자신도 ‘간사한 사람’이라고 말한 일이 있을 만큼 현재의 평가는 당대의 그것과는 다르다.

무엇보다 정여립의 역모와 反忠君思想에 관해서는 異論이 분분하다. 역모를 긍정하는 자나 부정하는 자들이 모두 그럴듯한 근거를 가지고 있음은 사실이지만 당시의 불분명한 자료를 가지고 4백여년 전의 일을 추측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예나 지금이나 권력자들이 조작한 역모의 시나리오는 일방적인 것이 많다. 특히 기축옥사는 잔혹하고 억울한 희생자를 많이 낸 사건이었기 때문에 왕조체제가 존속하는 한 재론하기 어려울 정도였다고 판단된다.

단재 신채호가 높이 평가했던 정여립의 혁명사상, 즉 天下爲公이나 반충군사상도 보다 신중히 접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정여립이 제자들에게 가르쳤다는 내용을 인용하면 “사마온공의 통감은 魏로 紀年을 삼았으니 이것이 直筆인데 주자가 그것을 그르게 여겼다. 대현의 조건이 각기 이렇게 다르니 나는 이해할 수가 없다. 천하는 公物인데 어찌 정해진 임금이 있겠는가. 요임금, 순임금, 우임금은 서로 자손이 아닌 자에게 왕위를 전했지만, 이들은 모두 성인이 아니었던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는 것은 왕족이 한때 죽음에 임하여 한 말이지 성현의 동론은 아니다. 유자혜는 누구를 섬긴들 임금이 아니겠는가 했고 맹자는 제선왕과 양혜왕에게 왕도를 행하도록 권했는데 유자혜와 맹자는 성현이 아닌가”, “남자는 양이므로 여자와는 다르니 누구를 섬긴들 임금이 아니겠는가”, “고금을 통하여 오직 伊尹이 성은으로 임한 자이니 어떤 일을 섬기면 임금이 아니며 어떤 일을 부리면 백성이 아니냐” 등이다.

이에 대하여 문도들은 “前聖이 발명하지 못한 뜻을 확장한 것이다”고 칭찬하면서 이를 어기거나 뜻을 달리하는 자를 내쳐 욕을 보였다. 하지만 이들 사상은 모두 ‘예기’나 ‘맹자’등 경전에 나온 말로 항상 경연의 강론에서 다루었던 내용이다. 다만 같은 내용을 가지고 해석상의 의미가 다를 뿐이다. 예를 들어 율곡은 경연에서 太甲(임금)을 물러나게 한 伊尹을 자주 거론하여 임금의 자세를 강조했는데 그 강도에 따라 충신도 역적이 될 수 있다. 또 요·순을 본받아야 한다는 내용도 그들의 선정이 아니라 왕위세습을 본받아야한다는 뜻으로 해석할 때 그것은 반충군사상일 수 있다.

서인들은 정여립의 역모를 완벽하게 합리화하기 위해 수정실록에 이 내용을 추가했던 것 같다. 이는 무능한 군주들의 잘못된 세습에 대한 모든 선비들의 희망사항을 상징해 준다고 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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