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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라인드 채용 폐지 유감
블라인드 채용 폐지 유감
  • 손화철
  • 승인 2023.05.01 08:4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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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정론_ 손화철 논설위원 / 한동대 교양학부 교수·기술철학

 

손화철 논설위원

한 외국 기업이 제공하는 교육 프로그램에 참여하게 된 학생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치열한 경쟁률을 뚫고 들어가 여러 혜택과 특별한 경험을 누리는 중이었다. 배우는 내용도 내용이지만, 다양한 배경의 사람들과 함께 지내는 것이 새롭다고 했다.

“그런데 저는 학벌에 대해 사람들이 그렇게 신경을 쓴다는 것을 이제야 알았어요. 여기 오니까 묻지도 않았는데 은근히 자기가 어느 대학 출신인지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더라고요.” 그렇다. 세월이 이렇게 지나고 세상이 바뀌었는데도 인생의 특정 시기에 암기력이 좋았다는 사실이 아직도 그렇게나 중요한가 보다. 

윤석열 정부는 이전 정부에서 도입한 블라인드 채용 제도를 폐지하기로 가닥을 잡았다. 과학기술 관련 공공 연구기관에서 시작했지만, 곧 다른 기관이나 기업도 블라인드 채용을 폐지하게 될 공산이 크다. 폐지 이유는 간단하다. 지원자의 실력을 제대로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곧바로 각계의 찬성 칼럼이 쏟아졌다.

정보의 비대칭 때문에 인재를 뽑기 어렵다는 논리가 완전히 틀렸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런 극단적인 방법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던 왜곡된 사회 구조와 관행을 깔끔하게 무시하는 그 대범함이야말로 기득권자의 전유물이다.

그 대범함은 사실 아무리 실력을 열심히 쌓아도 대학 이름에 밀려 좌절하는 수많은 젊은이에게 “그러길래 고3 때 열심히 공부하지 그랬어?”라고 묻는 멍청함이다. 우리나라 입시 현실을 최소한이라도 파악했다면 그렇게 말할 수 없다. 

물론 분야와 직무에 따라 블라인드 채용이 부적절한 경우가 있을 것이다. 블라인드 채용에서 가려야 하는 내용에 대한 조정이 필요할 수도 있고, 실력을 가늠하는 다른 방법을 강구해야 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제도를 개선해 가면서 기존의 부조리와 병적인 대학 서열화 문제를 극복하려 노력하면 될 일이지, 시행 몇 년간의 부작용과 극단적 사례를 핑계로 제도를 폐기하는 것은 게으르다.

공공 연구기관과 정부는 머리가 나빠서 블라인드 채용 과정에서 지원자의 실력을 가늠할 개선책을 찾지 못한 것인가, 아니면 자신들을 그 자리에 넣어준 학벌 기득권을 영영 유지하고 싶은 것인가.

서울의 몇몇을 제외한 나머지 대학의 교수는 모두 정성껏 가르친 제자들이 부당하게 차별받는 현실을 직접 경험한다. 내가 가르친 모든 학생이 소위 명문대생보다 뛰어나지는 않을지 모르나, 그중 상당수는 그 명문대의 상당수보다 훌륭하다. 그런데도 졸업장에 적힌 학교 이름 때문에 평생 불이익을 받는 것이 과연 정당한가.

이렇게 말하고 보면 전국의 대학, 특히 지방 대학이 블라인드 채용 제도 폐지에 침묵하는 것이 오히려 당혹스럽다. 자기 학생이 차별을 받아도 정책이 워낙 합리적이라 입을 다문 것인가, 아니면 내심 자기 학생을 무시해서 그런 것인가. 정부에서 아무리 돈을 퍼부어도 학교 이름으로 자행되는 차별이 횡횡하는 한 지방대가 살아날 길은 없다.

똑같이 선발되어 같이 교육을 받으면서 굳이 출신학교를 밝히려는 친구가 한심하다는 내 학생은, 밖에 나가 보니 우리 학교에서 받은 교육이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고맙고 대견했으나 한편으론 마음이 쓰렸다. 앞으로 그런 모자란 인간을 얼마나 많이 만나고, 그런 인간은 보내지 않아도 될 노력과 인고의 시간을 얼마나 더 보내야 할 것인가. 블라인드 채용 제도 폐지로 그 시간이 더 길어질 것이다.

손화철 논설위원
한동대 교양학부 교수·기술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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