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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홍규의 아나키스트 열전 135] 130년 전 8시간 노동제를 주창한 앨버트 파슨스
[박홍규의 아나키스트 열전 135] 130년 전 8시간 노동제를 주창한 앨버트 파슨스
  • 박홍규
  • 승인 2023.04.17 09:1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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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버트 파슨스
앨버트 파슨스(Albert Richard Parsons, 1848~1887). 출처=위키피디아

정권이 바뀌자마자 주 120시간이니 69시간이니 60시간이니 하는 노동시간 논쟁이 어지럽다. 대통령의 말 몇 마디에 국가정책이 하루아침에 뒤바뀌는 희한한 세상이다. 현행 노동법에서 주노동시간은 40시간이고, 그 예외인 연장은 12시간까지 가능해 주52시간이 최대치이다. 그 예외조차 문제라면 문제인데 왜 그것을 늘인다고 야단법석인가? 2004년부터 단계적으로 실시된 주 노동시간 40시간제는 1일 8시간제와 주휴 2일제를 뜻한다. 2004년 노무현 정권에서 시작된 것이어서 무조건 없애려고 하는 것인지는 몰라도 2004년 당시에도 그것은 세계기준보다 낮은 것이었고, 하물며 지금은 세계적으로 주35시간제가 대세인데 그런 퇴행을 주장한다니 도대체 나라가 어떻게 돼 가는 것인지 알 수 없다.

노동시간 단축은 노동운동의 가장 중요한 숙원이었다. 전 세계에서 노동절로 기념하는 5월 1일은 1886년 5월 1일, 시카고 헤이마켓 광장에서 약 8만 노동자와 가족들이 ‘8시간 노동, 8시간 학습, 8시간 휴식’을 외친 것에서 비롯되었다. 헤이마켓 사건은 5월1일부터 시작되었으나, 4일에 절정에 이르렀다. 전날 경찰에게 살해당한 노동자들을 추모하고, 8시간 노동제를 요구하는 파업 노동자들의 평화 행진이 이날 열렸다. 경찰이 그들을 해산시키려 하자, 폭탄 폭발과 뒤이은 발포로 인하여 경찰 일곱 명과 민간인 네 명 이상이 죽었고, 많은 사람이 다쳤다. 혐의자로 체포된 아나키스트 여덟 명은 폭탄을 던지지 않았음에도 일곱 명에게는 사형이, 나머지 한명에게는 징역 15년이 선고되었다. 그 재판은 미국의 양심적인 사람들만 아니라 영국의 오스카 와일드, 조지 버나드 쇼, 윌리엄 모리스와 같은 사람들에 의해서도 비판을 받았지만, 사형수 중 두 명은 종신형으로 감형되고, 한 명은 교수대로 끌려가기 전에 자살했다. 나머지 네 명은 처형되었는데 그중 한 명이 앨버트 파슨스(1848~1887)였다.

 

기자, 노동운동가, 연설가… 불꽃 같은 삶을 산 앨버트 파슨스

앨버트 파슨스는 이처럼 거짓 혐의로 39세에 사형당한 아나키스트 노동자다. 아나키스트이기에 무고하게 죽은 네 명의 노동자 중 한 사람이다. 짧은 생애에 그는 선구적인 사회주의자이자 아나키스트로 신문 편집인, 연설가, 노동 운동가로 불꽃같이 살았다. 파슨스는 20세기에 흑인인권운동의 성지가 되는 앨라배마 주 몽고메리에서 1848년에 태어났다. 아버지는 가죽공장 주인이었으나 일찍 세상을 떠나 가난한 맏형 밑에서 자랐다. 학교를 1년 다닌 뒤 11세부터 노동자로 살았고 15세부터 남부측 비정규군에 자원해 남북전쟁에서 싸웠다. 그러나 전쟁 후에는 전쟁 동료들과 달리 링컨의 공화당을 지지하면서 흑인의 참정권을 비롯한 인권운동에 종사했다. 텍사스에서 흑인 노예의 권리를 수호하는 신문의 편집에 가담하였으나 신문사가 도산되자 1869년부터 르포 기사를 쓰기 위해 텍사스를 여행하다가 우연히 만난 흑인 노예 혈통의 재봉노동자 루시 파슨스와 1872년에 결혼했다. 그래서 KKK단을 비롯하여 동료들에게 배신자로 간주되어 백인들에게 폭행 협박을 당하던 파슨스 부부는 1873년 시카고로 이주하여 언론인으로 일했다.

앨버트 파슨스의 부인이었던 루시 파슨스(Lucy Parsons, 1851~1942). 출처=위키피디아

그곳에서 그는 노동자의 권리에 관심을 갖게 되고 1874년 파슨스는 노동 정치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1871년 10월 시카고 대화재의 희생자들을 위한 수백만 달러의 구호 원조금을 모은 ‘시카고 구호 및 원조 협회’를 둘러싼 스캔들을 조사했다. 노동자들이 협회의 부패를 비난하고 피해자들은 원조를 받지 못했다고 항의하자 신문들은 그들을 ‘공산주의자’로 비난하면서 협회를 지원했다. 그러나 파슨스는 협회에 대한 노동자들의 불만이 정당하다는 것을 확신하고, 1873년부터 시작되어 4년간 지속된 디프레션으로 어려워진 노동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실업 상태였고 홈리스로 살았다. 1875년 파슨스는 공화당을 떠나 ​​사회민주당(SDP)에 가입했고, 1876년에는 피츠버그에서 열린 전국노동조합(NLU)에 참석했고, 노동기사단에도 참여했으며, 노동자당에 의해 시카고 시의원으로 지명되었다. 1877년 사회주의노동당으로 바뀌자 파슨스는 시카고 대표 두 명 중 한 명으로 선출되었다.

1877년에 이르러 노동자들은 사회주의와 아나키즘에 고무되어 급격하게 급진화했다. 그래서 미국 역사상 가장 대규모인 파업들이 일어났다. 방직공과 광부들의 파업에 이어 철도노동자들도 파업에 참여했다. 철도회사 소유주들은 저임금 장시간 노동을 강요하고 미국 전역에서 철도 노동자들은 실업을 당했다. 시카고에서 파업이 일어나자 노동자당의 지도자인 파슨스는 노동자들에게 노동자당에 가입하고 지배계급에 반대하여 투표하도록 권했다. 그 결과 파슨스 자신도 신문사에서 쫓겨나 아내인 루시가 양장점을 열어 두 명의 아이들과 남편을 부양해야 했다. 시카고 파업은 결국 경찰과 민병대의 행동에 의해 폭력적으로 진압되었고, 파슨스는 경찰로부터 시카고를 떠나라는 명령을 받았지만 그는 떠나지 않았다.

 

“법이라는 노예제를 폭로하라” 8시간 노동제 주창

파슨스는 사회주의노동자당을 중심으로 8시간 노동 운동에 전력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투표에 의해 정치시스템이 개혁될 수 있다는 생각에 실망하고 자본에 의해 통제되는 정부와 법에 회의하기 시작했다. 1880년 사회주의노동자당을 떠난 그는 8시간 노동제 확립에만 진력하고 정부를 공개적으로 비난하기 시작했다. 언론들은 그와 동료들을 아나키스트로 부르고 법과 질서의 적이라고 비난했다. 이에 대해 파슨스는 다음과 같이 반박했다.

아나키스트는 폭력의 사용을 변호하거나 권유하지 않는다. 아나키스트는 폭력의 사용을 선언하기는커녕 그것에 반대하고 폭력은 오로지 폭력을 물리치기 위해서만 정당화된다. 그렇다면 누가 폭력의 보조인이고 교사자이고 사용자인가? 동포에 대한 권력을 소유하고 행사하는 자들이 야말로 그들이 아닌가? 범세계적으로 행해지는 거대한 계급갈등은 산업노예제라는 우리의 산업시스템에 의해 만들어지고 있다. 자본가들은 그것을 바꿀 수 있지만 바꾸려고 하지 않고, 바꾸려고 해도 바꿀 수 없다. 이는 오로지 임금노예인 프롤레타리아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알버트 파슨스가 1884년부터 1886년까지 발행한 시카고 무정부주의 신문 알람. 출처=위키피디아. 

1881년에는 사회주의노동당의 당원 수가 급격히 감소하면서 ‘국제 혁명적 사회주의자’라는 새로운 조직이 설립되었다. 파슨스는 그 창립 대회의 대표였다. 1883년 피츠버그 에서 국제노동자협회(International Working People's Association)를 설립한 대회의 대의원이 되었다. 1884년 가을, 파슨스는 시카고에서 주간 아나키스트 신문인 <알람(The Alarm)>을 창간했다. 그 신문에서 파슨스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아나키스트는 평화를 믿지만 자유를 희생시키지는 않는다. 그는 모든 정치적 법이란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하지 않을 일이나 속박되지 않은 상태로 놔두었을 때 할 수 있는 일을 하도록 강제하기 위해서만 제정되었다고 믿는다. 그러므로 그는 모든 정치적 법을 자연법칙과 인간의 권리를 침해하는 것으로 간주한다....그는 모든 정부가 더 적은 법이 아니라 더 많은 법을 따르는 경향이 있으며, 따라서 모든 정부는 궁극적으로 독재가 된다고 믿는다.

1886년 초 시작된 대규모 파업에 대해 자본측이 양보하자 파슨스는 8시간제로 전환할 것을 촉구하고 5월 1일을 공식 파업일로 지정했다. 그리고 5월 1일, 파슨스는 아내 루시와 두 자녀와 함께 8만 명을 이끌고 8시간 근무 시위를 벌였다. 이어 며칠 동안 34만 명의 노동자들이 파업에 참여했다. 5월 4일 헤이마켓 광장에서 열린 집회는 밤 10시쯤 끝났는데, 그때 광장에 서 폭탄이 폭발하여 한 명의 경찰관이 사망하고 다른 사람들이 부상을 입었다. 그리고 경찰관의 총에 7명이 사망하고 많은 사람들이 부상을 당했다. 이후 며칠 동안 경찰은 8명의 아나키스트들을 체포했다. 파슨스는 사형이 아닌 종신형으로 감형될 수 있었지만, 이는 유죄를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주지사에게 요청하는 편지 쓰기를 거부했다. 대신 감옥에서 처음으로 쓴 편지에 그는 다음과 같이 썼다.

흔들리지 마라. 자본주의의 불평등을 폭로하라. 법이라는 노예제를 폭로하라. 정부의 폭정을 선포하라. 임금 노예의 노동에 대해 폭동을 일으키고 흥청망청하는 특권층의 탐욕, 잔인함, 가증함을 비난하라.

그리고 다음날 파슨스는 교수형에 처해졌다.

 

박홍규 영남대 명예교수∙저술가
일본 오사카시립대에서 법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미국 하버드대, 영국 노팅엄대, 독일 프랑크푸르트대에서 연구하고, 일본 오사카대, 고베대, 리쓰메이칸대에서 강의했다. 현재는 영남대 교양학부 명예교수로 있다. 전공인 노동법 외에 헌법과 사법 개혁에 관한 책을 썼고, 1997년 『법은 무죄인가』로 백상출판문화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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