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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은 예외인가?: 어떤 유혹의 해부
미국은 예외인가?: 어떤 유혹의 해부
  • 페터 슬로터다이크
  • 승인 2006.08.21 1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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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한승완 국제문제조사연구소

세계 자본주의가 -그것이 아무리 “유목적”, 탈민족적, 공간 중립적, 다중심적인 구조를 갖고 있다 하더라도- 특정한 장소, 국가와 민족을 선호한다는 것을 누구도 진정으로 부정하지는 않는다. 미합중국이 세계 자본주의의 주 거주지라고 말할 수는 없다 하여도 그것이 좋아하는 지역에 속한다는 사실을 누구도 부정하지 않을 것이다. 전통적으로 미국의 주민은 스스로를 경제개혁의 대행자로 보기보다는 어떤 유례가 없는 동기의 담당자로 보기를 선호한다. 이 동기에는 오래전부터 거역할 수 없는 이름이 있는바, 그것이 바로 아메리칸 드림(The American Dream)이다. 이 말에 대한 정의의 수는 잠재적으로 이 나라 주민의 수와 정확히 같다는 사실이 이 말의 정의에 속한다. 그러나 미합중국의 대지 위에서 이 나라에서 사는 것의 의미에 대해 꾼 모든 꿈을 그 기(基)가 남을 때까지 환원해보면, 아마도 더 이상 응축되지 않는 세 가지 동기를 얻게 될 것이다.

첫째 동기는, 여타의 세계에서 만연한 수많은 무기력주의(Lethargokratie)와 달리 무엇인가 하고자 하는 누구나 무엇을 할 수 있는 나라가 미합중국이라는 요청에 있다. 미국 시민의 합헌적 권리 중에 눈에 띄는 것은 언제나 전진할 공간을 발견할 수 있다는 기대이다. 이것은 단순히 지리적 의미 이상에서 서부에 대한 권리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서부”는 -우리는 이를 위에서 상론한 의미로 본다- 미개척지로 일방적으로 나아갈 때 형(刑) 면제의 상징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전에 와이오밍과 캘리포니아로 불렸었다면 오늘날 유전자연구, 사이버네틱, 초정밀기술, 화성이주 혹은 인공생명으로 불린다.

두 번째 특징은 선택이라는 용어와 결부되어 있다. 이 말은 다채로운 의미스펙트럼 위를 유동하고 있는 표현이다. 그것은 어떤 임의의 관점에서든 정상에 있는 것이 미국인에게는 세계에서 가장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생각에서 시작하여, 이 나라의 깊은 의미는 유대적 예외를 신교도적으로 능가할 수 있는 곳이라는, 공개적으로 표명되는 경우가 거의 없지만 여러 곳에서 느낄 수 있는 생각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선택은 유럽 대륙에서 발명된 근대적 주체의 -이에 따르면 이 특수한 양태에서 주체라는 존재는 정상적으로는 감동이 없는 삶이 은밀하게 느껴지는 사명의 요원이 될 가능성을 표시한다- 앵글로아메리칸 변형이다. 따라서 사명서(mission statement), 즉 프로젝트 신앙고백은 발화행위 리스트에 대한 미국의 기여이다. ‘정상에 서다’의 언어적 측면은 이 나라 어린이들이 그렇게 많이 사용하는, 종종 웃음거리가 되는 최상법에서만 표현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미국인들이 그들의 책임(commitment)을 맹세하는 구두의 제스처에서 가장 구속력 있는 형태로 나타난다. 자주 논평의 대상이 되고 유럽인에게는 수수께끼로 보이는, 미합중국 주민의 종교성은 예수 이전에는 대중적이었고 캘빈에 의해 높은 신범죄적(神犯罪的) 에너지를 가지고 동화된 생각을 매우 자주 함축하고 있다. 그것은 신약의 리코더가 아무리 약자에 대한 신의 애정을 노래하고 말한다 하여도 신은 승리자 편이라는 생각이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특징은 울증(鬱症)에 대한 조증(躁症)의 영속적 우위를 확정하고 있는 미합중국의 심리동학적 사회계약과 관련된다. 이러한 사태는 특히 유럽에서 온 방문자에게 매우 유쾌하지만 동시에 당혹스럽게도 만드는, 이 나라 본래의 국어인 낙관주의의 코드에서 드러난다. 이 코드로부터 문제를 도전으로 정식화하고 장애에 대해 그것의 제거를 위한 프로그램으로 답하는 미국인의 아름답고 정열적인 습관이 생겨난다. 1998년 5월 3일자 뉴욕 타임스에서와 같이 암연구와 다른 의학적 시도에 대한 강화 이니셔티브가 국방예산의 증대를 위한 호소의 형태로 치장되는 것은 세계의 다른 어느 곳에서도 생각할 수 없다. 이제까지 격파되지 않은 질병과의 싸움에서 패배한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비미국적인 것이기 때문에, 악성 사인(死因)에 대한 전쟁은 “우리 국민의 전체 의지”를 투입하여 수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2001년 9월 이후 매우 불명확하지만 강한 주목을 받는 두 번째 전선이 개시되었다. 알아채지 못한 테러리스트들에 의해 공격당할 수 있다는 것 역시 비미국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질병과 테러에 대한 국민적 동원은, 울증을 위한 내적이거나 외적인 이유를 존속시키라는 요구를 미합중국의 어떤 시민에게도 할 수 없다는, 함축된 조증적 헌법부칙의 직접적 발로이다. 미국시민은 짓누르는 감정을 고조된 감정에 종속시키길 요구하고 끌어내리는 사실적 이유를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제거하는 것을 허용하는 특별인권(Extramenschenrecht)으로 이득을 보고 있다. 미국에 사는 사람은 고조된 감정에 장애가 되는 것을 일관되게 생각하지 않고 제거할 권리를 항시 문화적 환경의 동의하에 이용할 수 있다. 이는 집단적으로 강요된 감정의 결산위조라는 태도를 가져온다. 누구도 고조된 감정과 울증의 결산에서 마이너스에 빠지려 하지 않고 그럴 수도 없기 때문이다. 엔론 스캔들 이후에 정통한 사람이 그것이 거대한 빙산의 일각일 뿐이라고 주장했다면, 그것은 달러로 이루어지는 거래영역에 대해서는 타당할 것이다.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얼마나 달러가 감정의 경제위에 앉아 있는가라는 점인데, 이 감정의 경제에서는 울증의 이유에 대한 은닉과 자산의 변조가 동기체제 전체를 관통하고 있다.

세 개의 일차 특징을 총괄하면 다음과 같은 전체판단이 성립한다: 미합중국은 그것의 심리정치적 디자인에 따르면 현존하는 현실도피주의 나라이다. 그것은 모든 종류의 탈주자의 정착지로서 무엇보다 이전 고향의 가망 없는 상황으로부터 두 번째 기회의 넓은 공간으로 도피한 사람들에게 장소를 제공한다. 그것은 수많은 절망한 사람과 뿌리 뽑힌 사람들의 망명처로서 세계사로부터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었던 난민을 받아들였다. 그것은 자유로운 과잉충동의 이민국가로서 심리적 자제에 대해 이니셔티브의 우위를 믿는 사람들에게 활동영역을 제공한다. 그것은 언덕 위의 빛나는 도시로서 여기저기서 보낸 끝없는 외교사절의 무리로 하여금 모든 열광에 대해 서로 안전한 거리를 두고 설교권과 주거권을 제공할 만큼 무한히 넓은 평지를 제공한다. 미국의 영광과 역설을 한 문장으로 표현해야 한다면, 그것은 다음과 같은 것이어야 할 것이다: 미국은 “역사”로부터 후퇴하는 “역사”의 힘을 허용하였다. 이어서 다른 문장은 현재의 유혹을 선언한다: “역사”로부터 탈주한 힘들이 이제 바로 스스로 “역사”를 새로이 발견하려 하고 있다.

따라서 세계로 발산하는 미국의 매력은 이 “사회”의 심리정치적 구조로부터 온다. “합중국”의 주민들은 18세기 이후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언제나 새로이 현실화되는 비(非)라이프니쯔적 버전의 낙관주의를 만들어내는 데 성공하였다. 이 모델에 따르면 주어진 세계는, 엘리스 섬(이민국이 있었던 뉴욕항의 작은 섬-역자)에서 봐서 무제한의 부가적 완성을 수용할 수 있을 정도로 이미 현재 완전한 한에서, 최상의 세계로 여겨질 수 있다. 사람들은 이러한 입장을 철저히 실증적인 이유에서 소박한 것으로 여겨왔다. 즉 그것의 진실은 존재의 개선에 참여하는 관점에서 존재의 의미를 재정식화한 것이라는 것이다. 이는 많은 친미적 유럽인들이 생각하듯이 낙관주의의 사회개량주의로의 단축이 아니라 낙관주의의 초낙관주의로의 증축을 함축한다. 이러한 증축을 통해 종교적 현실주의와 현실에 대한 무제한적 불경(不敬)의 역사상 유례가 없는 결합이 허용된다. 물론 이것은 멀리 보면 관례에 대한 우직한 경건함을 현실에 있어서 메마른 잔혹함과 결합시킬 수 있었던 로마인들의 기이한 종교성에서 앞서 형상화되기는 했었다. 로마인들도 마찬가지로 보다 고귀한 것에 대해 머리를 숙이고 나서 즉각 억압의 일상사로 넘어가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따라서 누르시아의 베네딕트(Benedict von Nursia)가 로마 가톨릭교의 충성 맹세와 죽임을 기독교적 승려시민의 기도와 노동으로 대체했을 때, 그는 로마 이후 유럽의 새로운 인간을 위한 가장 효과적인 규정을 발견했었다.

이러한 철학적, 심리정치적 규정이 왜 역사이후 시대의 현존양식의 가장 완전한 형식을 구현하고 있는가가 즉각 이해된다. 제2차 전후시기의 유럽인들은 (그들 이외에 일본인, 중국인, 인도인, 러시아인 및 다른 많은 사람들과 같이) 역사이후 시대적 조건의 세계에 신참내기로 도착하는 반면, 미국인들은 역사이후 시기의 베테랑으로 여겨질 수 있다. 이들에게 역사의 종말이라는 뉴스는 더 이상 뉴스가 아니다. 그들에게 있어 낡은 시나리오로부터의 탈출은 이미 그들 국가의 건립 자체로 완수되었다. 그 결과 이들 손노동하는 사람들의 활력은 오늘날까지 다만 주어진 최적의 것을 초최적의 것으로 증축하는 데로 향해 있다. 미국 “혁명”은 영국의 조국이라기보다는 낡은 유럽적 척도, 비중 및 계산방식의 전체제를 추월했던 독립선언으로 완수되었다. 따라서 혁명이라는 개념이 정치적이고 미래형적인 의미로 사용된다면, 그것은 미국에서 태어난 미국인들에게는 무의미한 흥분처럼 들릴 것이다. 이는 그들에게 마치 2백년 전에 영국왕과 싸워 이긴 전쟁을 다시 한 번 하라는 요구와 같은 것이다. 마찬가지로 낡은 세계의 소피스트의 선동적 횡설수설이 그들에게 어떤 의미도 주지 않는데도 마르크스를 읽으라고 요구할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반해 그들은 무엇이 최후의 삼푸인지 혹은 무엇이 혁명적인 우천타이어인지 즉각 이해한다.

미국인들에게 계속 유의미한 것처럼 보이는 유일한 해방운동은 역사적 삶의 내적 유물, 즉 자기 가족의 관례로부터 벗어나려는 해방운동이다. 각자는 부모세계의 지배로부터 내부의 어린이를 해방시킴으로써 역사로부터의 탈퇴를 사생활에서 반복할 수 있다. 엄청나게 광대한 미국 심리치료 풍경은 그곳 주민들의 무조건적 전향에 대해 무엇보다 과거에 부담스럽게 압박하는 외부 현실이었던 것을 만들어 주고 있다. 우리는 해방된 내부의 미국 어린이가 모든 시기 이전에 창조된 승리자를 함축하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물론 이 승리자는 오늘날 희생자의 용모로 무대에 등장한다는 것을 주의해야 하지만 말이다. 미국 심리치료 군도(群島)의 무수한 어린이-자아가 여전히 역사이후 시대의 가장 강력한 보루를 체현하고 있다는 것은 말할 필요가 없다. 수많은 이주자들이 고향에서 가져온 정체성과 결별하는 희생을 치르고서 진정한 미국인이 될 수 있었던 것처럼, 그들 자식들은 이제 어제의 내부세계로부터 신세계로 함께 가져왔던 심리적 쓰레기를 청산하고 있다. 미국 심리치료는 역사적 울증을 역사이후 시대의 자기 신뢰로 전환시키는 데 그 본질이 있다.

미국에서 노동개념도 자연히 그것의 낡은 유럽적 의미를 상실한다. 그것은 가치창출의 소실점에서 노동자가 노동으로부터 스스로 해방되기까지 에너지의 투여를 통해 원료를 높은 가치의 생산물로 전환하는 데 참여하는 것을 가리키지 않는다. 미국적 노동은 일종의 퍼포먼스다. 그것의 의미는 주체가 어떻게 충만한 기회로부터 보다 더 충만한 성공으로 전진해 가는가를 보여주는 데 있다. 사람들이 단지 이전 거주지보다 더 힘든 일을 하기 위해 남부로 이사한다는 것을 다른 어느 곳에서 상상할 수 있는가? 공식적으로 평등주의적 문화 속에 사는 사람이 빈부의 심연이 계속 벌어져 가는 것을 그렇게 태연하게 바라볼 수 있는 곳이 어디에 있겠는가? 미국 과두체제의 느긋한 몰염치가 증명하고 있는 바는, 계속 더 많은 수의 미국인들이 모든 성공을 둘러싸고 있는 후광을 얼마나 자신들의 믿음의 발산으로 여기고 있는가라는 점이다. 능력주의의 환경에서는 다른 이의 성공도 공동의 꿈을 증명하는 것처럼 보인다. 따라서 성취한 사람들에 대한 반감이 없다는 유럽인들이 그렇게 부러워하는 사정도 이런 연관 속에 있다.

이런 배경에서 미합중국이 문제가 될 때마다 언제나 왜 수치가 기만적인가가 이해된다. 이 나라는 그 심층경제학에 따라 어떤 결산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 나라는 결산이 면제된 세계에서 살고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단지 사소한 성장에서와 같이 주어진 세계로부터 보다 높은 세계로 이행하는 것이 아니라 완벽으로부터 초완벽으로 나아가는 운동 속에 있기 때문이다. 피상적으로 볼 경우에만 합중국은 지속 성장할 수밖에 없는 것으로 보인다. 경제적 수치가 그것의 규모를 입증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규모가 수치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지구에서 가장 철저하게 역사이후 시대의 체제를 갖춘 나라가 그 세력발산의 정점에서 다시 “역사”에 개입하려는 유혹에 빠진다는 사실이 이제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이번에는 더 이상 그의 역사이후 시대의 예비상태로부터 잠시 동안 나와서 역사적 세력의 싸움을 종결짓는 심판관의 역할로 그런 유혹에 빠지는 것이 아니다. 세계적 사건에 대한 미국의 현실적 개입은 오히려 통합적 복고의 모양새를 보인다. 그것은 미국의 역사강국으로의 재전환을 함축한다. 이는 그곳에서 아직도 여전히 역사적으로 일이 진행되는 무대로 세계를 재정의하지 않고는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역사”는 -우리가 위에서 논했듯이- 일방적 행위유형의 성공국면이다.

부시 행정부가 강력히 원했고, 주도면밀하게 준비되고 전형적으로 일방적으로 수행된 이라크 전쟁을 둘러싼 소동은 싸움의 직접적 결과를 훨씬 압도하는 심리적 부수효과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미국이 역사이후 시대 세계공동체의 도덕적 생태계에서 단번에 이물질로 지각되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미국 정부는 전보다 더 명확히 유일하게 남아있는 역사강국의 역할을 그것도 이번만이 아니라 미래에도 계속 수행하겠다는 의지를 주지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인들이 이라크에서 어떤 일을 완수했던가를 설명하기 위해 조지 W. 부시는 물론 통상적으로 그렇듯이 구약을 가지고 애를 써야만 했다. 이사야 61장: “주께서 나를 보내셔서 ... 포로에게 자유를 선포하고, 갇힌 사람에게 석방을 선언하게 하셨다.” 그러나 그는 현실의 드라마가 유일하게 의미를 발생시키는 역사에 더 명확히 호소하였다.

“역사의 소명은 적절한 민족에게 주어집니다.”
“우리는 우리나라와 문명세계의 역사에서 결정적인 순간에 여기에서 만났습니다. 이 역사의 일부는 다른 사람들이 썼습니다. 나머지는 우리가 쓰게 될 것입니다.”

이 경우 상투어에 분석적 특질을 인정해야만 할 것이다. 부시의 미국은 세계의 공론장 앞에서 만들어야 할 역사의 표장(表章)의 권리를 자신의 것이라 주장함으로써, 가장 명시적인 방식으로 역사이후 시대의 충만함으로부터 벗어나와 실제로 재역사화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역사의 표장은 다섯 개다. 힘의 우위, 동기의 고귀함, 일방성의 특권, 저질러진 폭력과 저질러질 폭력에 대한 자기 사면(赦免), 행위가 뒤따르는 말에 대한 통제. 미국은 깊이 숙고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선언한 재역사화로 유럽과 여타 세계의 동맹국들과 단절할 위험을 감수하고 있다. 미국은 자신의 단순한 지위로 인해 탈근대의 도덕적 장(場)에서 용서할 수 없는 죄, 즉 주권을 갖느냐 아니면 주권을 갖는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죄를 범하는 것만이 아니다. 나아가 미국은 이성적 방해자의 합창을 무시하는 선동을 할 수 있다. 미국의 과민한 이데올르그들은 이들 방해자 집단을 겁쟁이와 미성년의 유럽 패거리, 부드러운 치즈와 의심스러운 내장을 먹는 유럽 패거리로 헐뜯기까지 한다. 몇몇 미국인들은 애국적인 격정에서 프랑스인들이 미성숙한 여자나 염탐하는 타락한 무리 외에 다름 아니라고 비난한다. 말 하나로 전쟁을 뜻한다면, 미국의 수많은 호전가들이 여타 세계의 회의주의자들에게 선전포고를 한 것이 될 것이다. 전염성이 가장 강했던 역사시기의 유럽에서 기꺼이 궐기하려는 행위자문화에서처럼 미합중국의 정치는 고조된 기분으로 연단에 오른다. 미국은 자신의 동기를 칭송하고 자신의 부담을 확언하면서, 도취경에 빠져 승리를 확신하고 저지른 행위에 대해 개전의 정이 없이 스스로 성공의 결산을 기록하면서, 단조롭게 이미 가한 공격의 옳음을 맹세하며, 그 수가 작은 불가피한 자국의 희생자를 통상의 비용을 들인 의식으로 기꺼이 장례를 치르려 하지만 다른 측의 매우 많은 수의 희생자를 하급 수준의 형식적인 유감표명으로 방치하고 있다. 초기 근대의 무대에서처럼 미국은 해양권력으로서 세계탈취를 전진시키기 위해 자기 함대를 투입한다. 근대의 식민지 강국처럼 미국은 가망 없이 약한 상대와의 비대칭적 전쟁에서 확고한 입지를 차지하기 위해 공군력과 우주무기를 사용한다. 신사도적(neu-apostolisch) 전달 강국처럼 미국은 인류에 대한 신의 선물, 즉 민주주의를 이에 저항하는 수신자에게 필요한 경우 폭력을 통해 손에 쥐어주겠다는 의식으로부터 나오는 침공권을 사용한다.

그러나 이라크전쟁의 역사철학적 관점에서 결정적인 동기는 군사적 기초 위에 세워진 일방주의의 명백한 부활에 그 본질이 있었다. 그것이 아무리 이제까지 모든 세계사적 행위의 인상적 특징이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이제야 비로소 이론의 빛으로도 인식되게 되었다. 스피노자주의적 관점에서 유럽의 세계탈취가 본래 그리고 유일하게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은 그를 위한 힘이 존재했었다는 사실에서였다. 모든 능력에는 고유한 당위가 내재하므로, 제국적 유럽은 그 능력에서 이미 형성되어 있는 힘의 궤도를 걸어가는 것일 뿐이었을 것이다. 미국과 영국의 이라크 개입이 유사한 방식으로 해석될 수 있다. 이 개입은 지정학적 무대에서 단순한 제국적 경찰대(posse)로 전개됨으로써 정신과 힘의 증명을 제공했다. 토니 블레어에게 발언권을 준다면 “우리가 할 수 있었기 때문에” 할 일을 했던 것이다. 물론 모든 관찰자, 우호적인 생각의 관찰자에게도 분명한 사실은, 미국의 군사주의가 오래전부터 역사이후 시대 세계에서 낡은 기생물로 눈에 띌 수밖에 없었다는 점이다. 미국 군대는 그 본성과 태생으로 보아 “역사”의 개량된 유물이다. 미국은 1916년 이래 마치 무장한 사회자처럼 어느 정도 이러한 “역사”에 휩쓸리게 되었지만, 물론 자신의 쾌활한 고립을 의문시했던 것은 아니다. 미국인들은 자신의 별에서부터 부자유한 영혼들이 전쟁의 먼지 속에서 뒹구는 역사세계에 이르는 힘찬 외곽도로를 놓았다. 그 결과 미국 군대는 유럽과 태평양에 투입되는 동안 길들여진 괴물로 성장하였다. 그것은 소련과 오랜 군비경쟁 동안 거의 통제 불가능하게 팽창하였다. 결국 그것은 “역사”가 핵 균형상태에서 조종을 울릴 채비를 취할 때, 매우 높은 수준에서 정체되었다.

이 시대가 역사 이후 시대의 학습순환에 대해 갖는 의미는, 뒤돌아보건대 이 시대에서 최고위층 행위자들의 상호 자제가 세계정치의 일차적인 자명한 사실이 되었다는 점에서 나타난다. 공격이 무장한 폭력의 역사에서 아주 오래전의 우선권을 상실했다는 것을 장군들조차 통찰하게 된 이후, 역사적 제도로서의 전쟁 자체가 역사 이후가 될(Posthistorisierung) 만큼 성숙하였다. 그러나 이제 인식하게 되듯이, 균형상태의 시대는 모호한 유산을 남겼다. 그것의 어두운 측면은, 상호 자제의 경험이 오직 군사적 차원에만 관계되었으며 동서대결의 붕괴 이후 무시될 수 있다는 오늘날 미국 총사령부의 통찰에서 드러나고 있다. 미국의 전략가들과 고문들은 기본적 사실을 인식하는 획득된 무능력으로 인해 상호 자제가 탈근대적 세계연관 자체의 행동양식이라는 것을 고대의 영웅을 생각나게 하는 맹목성을 가지고 간과하고 있다. 왜냐하면 탈근대적 세계연관은 불가피하게 밀착, 재접속, 그리고 -지친 말을 다시 한 번 사용한다면- 네트워크화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후 통일되지 않은 서구에서 어떤 유혹이 유포되고 있는데, 그것은 “유일한 세계강국”에게 그것의 탈자제(Enthemmung)를 위한 시나리오를 써주려는 유혹이다. 이것은 곧 지식인의 시간이 다시 한 번 왔다는 것을 말하는가? 의욕적인 사람들이 환상에서 실천으로 이행하는 데 사유하는 사람들이 서둘러 도와주는 것을 다시 한 번 체험하게 될 것인가? 브레진스키(Brezinski), 카간(Kagan), 카플란(Kaplan), 러트왝(Luttwak), 월포비츠(Wolfowitz), 후쿠야마(Fukuyama), 라이스(Rice)와 같은 유형의 고문 분석가와 언론인들이 이제까지보다 더 성공적으로 권력의 회랑에 쇄도하는 것을 각오해야 하는가? 제국주의의 연설문 작성자가 새로운 의미론적 시장에서 입장들을 점령하기 위해 돌진하고 있는 것을 실제로 목도하고 있지 않은가? 실제로 공공 공간의 재이데올로기화는 한참 작동중이며, 자칭 폭력전문가들에게는 황금시대가 드러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처음보기에는 이들 조언자들보다는 이슬람주의적 활동가들과 폭력의 꿈해몽가로서 스스로를 유용하게 만들려는 서구의 해석가들이 더 활동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미국의 재역사화에 대해 이슬람주의자들이 갖는 의미는 아무리 높게 평가해도 지나치지 않다. 이슬람주의자들은 귀 밝은 대통령의 귀, 적의 조언에 활짝 열려있는 귀에 “역사의 소명”을 보내주는 화제의 인물인 것처럼 보인다. 근동의 범죄적 신일방주의자들이야말로 다른 국내의 모든 조언가들보다 더 뚜렷하게 서구의 권력중심에 있는 행위자들에게 일방적 타격의 탈자제를 위한 표제어를 불러줬던 사람들이다.

이제 우리는 미국의 현재 대외정책이 미국적 예외의 역설을 어떻게 차근차근 전개시켜가고 있는가를 보고 있다. 그것은 여러 의미친화적인 어법으로 표현되고 있다. 미국적 꿈을 구원하기 위해 지도적인 행위자들은 그 꿈에서 깨기에 여념이 없다. 역사로부터 벗어나 있다는 특권을 보존하기 위해 정치적 극작가들은 그들 나라를 확고한 걸음으로 역사로 되돌리고 있다. 이 나라의 존재의 장려한 가벼움을 보장하기 위해 지도자 팀들은 미국을 헤아릴 수 없는 과중 부담으로 조종해가고 있다. 이 나라에 낙관주의의 원천을 보장하기 위해 지적 분위기 조성자들은 미국을 가장 어두운 현실주의로 추락시키고 있다. 마지막 역설은 전쟁전문 기자이자 전쟁학자인 로버트 D. 커플란의 사려 깊은 폭력조언서에서 가장 분명하게 읽을 수 있다. 『상무 정치』Politics. Why Leadership Demands a Pagan Ethos, 2002)와 『다가오는 무정부주의』(The Coming Anarchy. Shattering the Dreams of the Post Cold War, 1997/2001)는 성조기 아래의 나라를 홉스적 세계에 적응시키려는 것 이외에 다른 어떤 목적을 추구하지 않는 두 책이다. 이 홉스적 세계는 이른바 문명화하는 밀착의 법칙 하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거의 국가가 없는 공간에서 일반화된 때리고 찌르기에 따르는 세계이다. 카플란은 누가 이 시나리오에서 유일하게 지구적 리바이어던의 역할을 할 수 있는가에 대해 어떤 의심도 하지 않는다.

이러한 미국에로의 역사 이전(translatio historiae)은 현재 화려함과 격식에서 서임(敍任)에 속하는 모든 것으로 실행되고 있다. 의식은 장차 신역사의 행위에 대한 모든 대표자들이 거기서부터 빛을 발하는 영토적 영점의 이전에 의해 개시된다. 신성한 무덤, 재역사화하는 강국에 이슬람주의가 준 선물인 그라운드 제로(Ground Zero)는 스스로 외치는 이름을 현실에 각인하는 힘, 미국적인 것의 아담적 힘을 새로이 입증하고 있는 선물이다. 이 힘은 탈근대적, 피해자 연구학적 도덕의 중심인물인 순결의 이전으로 계속된다. 이 도덕이 없다면 신역사의 시나리오에서도 어떤 전투개시도 이루어질 수 없다. 공격은 장차 무방비의 희생자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고, 게다가 전략적으로 높은 효용이 있거나 그렇게 보여야 한다. 이 힘은 비상사태를 공표하는 전권의 이전으로 완성된다. 그리고 이는 적을 갈등의 지속을 위해 적이라 부르는 정치적 주권의 목소리뿐만 아니라 세계에 존재하는 적수의 사실을 확인하고 이에 대해 영구전쟁을 선언하는 존재론적 주권의 목소리로 이루어진다. 이로써 “역사”의 완전한 리메이크는 완수된다. 1945년 이후 완성된 사실에로 유럽의 사임(辭任)이라는 행위의 이전(translatio actionis)에는 9월 11일 이후 미국 국기에 새로운 색깔을 표현하는 감정의 이전(translatio passionis)이 더해진다. 잠재적 초행위자가 초희생자로 사칭한 이후, 이 나라의 탈자제에 거칠 것은 없다. 다만 예외는 그 자신의 민주적-도피주의적 전통이다.

이제까지 인식할 수 있었던 한에서 이제 결론내릴 수 있는 것은 “역사 이후의 복수”라는 제목으로 요약할 수 있다. 왜냐하면 여타의 세계는 스스로 선언한 역사강국의 감격에 전염되기는커녕, 지구상에 마지막으로 빛을 발하는 행위자에게 삶을 고달프게 만들겠다고 맹세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영국, 폴란드, 이탈리아 및 새로이 서비스되는 “역사”라는 메뉴판을 들고 있는 웨이터에게 손짓으로 신호하는 팁의 다른 후보자들이 부수적으로 지원하는 가운데 미국 군대가 이라크에서 수일 만에 굶주린 군대에 승리하는 동안, 전쟁행위의 비친구들인 거대한 나머지는 마치 강요된 연극을 통해 자신들의 가치가 무엇인지 이제 비로소 깨달은 것처럼 새로운 자의식으로 일어났다. 1945년 이후 전 세계에서 곧은 길과 굽은 길로 -각국의 고유한 전통필터로 여과하여- 접근해갔던 가치는 자연히 다름 아닌 어제의 역사이후 시대의 미국적 가치였다. 이라크전쟁의 이들 비판자들은 미국의 지도에 대해 “반미주의”의 목소리로 저항하지 않는다. 이 “반미주의”라는 표현은 많은 선동가들이 모순의 무례함을 공공연히 드러내 보이기 위해 “반유태주의”에 대한 2차 표시로 즐겨 파악하고자 하는 표현이다. 이들은 자신들에게 중요한 것을 말하는데, 그것은 차이에 대한 미성숙한 욕망으로부터 그런 것이 아니라, 일방적 거동에서 백색인종적 무자비함의 황금시대로부터 끌어온 인용을 인식하는 역사이후 시대의 논리에 맞추어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 전 세계에서 제시되는 미국 대외정책의 태도에 대한 유보들에서 뚜렷이 드러나는 것은 명철한 반일방주의이다. 고도로 재접속된 정치적 실천의 장에서 이는 오래전부터 협력문화의 당연한 양태를 나타내고 있다. 사람들이 이를 부끄럽게도 “친구들 사이의 비판”으로 제시한다는 점이 또한 여기에 속한다. 그밖에 미국의 공동-예외적 우방이자 국제여론의 공동 경멸자인 이스라엘이 왜 명료화된 반일방주의적 정신으로부터 일부 압력을 느끼게 되는가도 명백하다. 이것을 새로운 반유태주의로 오해하는 것은 관심 있는 사람들의 자유이다. 그밖에 역사적으로 극복된 유럽 내부의 일인 반유태주의라는 표현이 이스라엘과 아랍의 증오자들 사이의 새로운 긴장에는 오래전부터 더 이상 적절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사태를 복잡하게 하자면, 이러한 반유태주의가 존재하기도 한다.

그러나 왜 매우 많은 미국인들이, 그리고 부시주의(Bushismus)의 혐의가 없는 미국인들조차 세느강에서 갠지스강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전쟁회의적 타자들의 목소리에서 미국의 진정한 목소리를 다시 발견하려고 애쓰는 것일까? 역사이후 시대적 삶의 베테랑들은 다른 나라에서 온 신참들과 탁월하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야만 하지 않는가? 모든 낙오자들을 환대하는 가장 자연스러운 반응을 잘 이해하고 이제 역사만들기라는 낡은 유럽의 짐을 버릴 것을 맹세하는 사람들이 미국인들이 아니었던가? 역사이후 시대성의 가장 성숙한 문화가 정치적 차원에서 역사이후 시대 세계의 일차적 명증, 즉 상호작용의 사실, 행위의 행위자로의 귀환과 체계적인 재접속의 사실로부터 그렇게 많은 반감과 경멸을 보이며 벗어나는 일이 어떻게 일어나게 되었는가? 이 경멸은 미국이 유엔과 -미국의 눈에 유엔은 동시통역된 마비를 만들어내는 기계이상이 아니다- 관계하는 방식에서 가장 솔직하게 드러난다. 왜 정치적으로 당직근무 중인 미국인들은 그들과 같은 사람들을 당장 받아들이는 클럽의 회원이 되려는 의지가 현저히 없는 것일까?

이러한 물음들에 대한 도덕적 답은, 미국이 책임감에서 세계의 질서정치적인 핵심강국으로서의 역할과 자신을 동일시했다고 설명한다. 따라서 이 거대한 국가는 교육시킬 수 없는 나라들 중 (깡패라는 술어가 부과된) 악한 나라를 제거할 수 있기 위해 선의의 일방주의를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반해 현실정치적 답은, 미국이 중국과 유럽과 같은 새로운 지구적 행위자(global player)의 강화에 앞서 지정학적 장기판 위에서 가능한 한 많은 핵심위치를 점령하기 위해 공세적인 지정학적 이해계산을 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고수한다.

사이버전쟁 전문가인 아킬라(Arquilla)와 론펠트(Ronfeldt)가 제안하듯이 정신정치적(noopolitisch) 답은 다음과 같다. 미국은 정보혁명을 맞아 21세기의 정신영역(Noosphäre)에서 그 지도권을 가능한 철저히 행사하기 위해 그 이념적, 의사소통적 자원을 동원해야만 했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신화동학적 답은 미국적 꿈의 일반적 동기로부터 읽어볼 수 있다. 스스로를 이 꿈의 적극적 담지자로 정의하는 사람은 무엇인가 하고자 하는 모두가 눈앞에 떠오르는 것을 하기에 충분한 활동공간을 갖는 상황에 들어가려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수용자의 육체와 영혼에 지울 수 없도록 기입된 선택의 봉인을 포기하려 하지 않는다. 그는 고조된 감정에 대한 특권에 대해 우울하게 하는 사실적 이유들이 우선하게 하지 않으려 한다.

우리는 미국의 역사로부터의 탈퇴가 그 정도를 점차 추정할 수 있는 심리정치적 희생을 치렀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다. 2백년보다도 전에 역사이후 시대로 벗어나기 위해 탈퇴자들은 낡은 유럽적 주체구성체를 수출하고 유지해야만 했으며, 이제 그들은 이것을 일반화된 역사이후 시대성을 위한 학습에 대해 면역시키고 있다. 역사이후 시대의 예외적 상황과 강력한 행위자입장의 결합은 조만간, 그리고 늦어도 미국 잠재력의 과잉충동이 더 이상 국가프로젝트만으로는 (그리고 할리우드 시나리오의 영웅숭배로) 발산될 수 없는 시점에, 폭발적으로 해체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그때부터 행동할 준비가 된 행위자들에 의한 현실 “역사”의 재요구의 조짐이 나타난다. 이렇게 해서 수많은 미국시민들이 당분간 -정확하게는 베트남패배 이후- 그들의 꿈이 외적 세계정세만큼이나 미국적 실험의 내부 과정에 의해 위협을 받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기는 한다. 그러나 동아시아에서 패배한 부정의한 전쟁 이후 나라를 자기회의의 국면으로 이끄는 길을 계속가려는 사람은 오늘날 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1968년 이후 미국의 1차 재역사화가 울증과 자책의 영향 하에 있었던 반면 -이는 프랑스-독일산의 과도한 문화비판을 빌어 수행되었으며 “아래로부터의 역사”로 꾸며진 민속적, 희생주의적 특수성의 숭배로 끝나버렸다-, 2차 재역사화는 시니어 조지 부시의 시대부터 전적으로 조증적 복구의 형태로 진행되고 있다. 여기서 다시 위의, 정확하게는 아주 저 위에서 논한 “역사”가 문제라는 것을 말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역사”가 가장 고귀한 기원으로부터 흘러나올 때, 프로테스탄트 예수회원에 비교할 수 있는 지도자가 자기탈자제의 최선의 전략을 재발견한 선민에 의한 신의 행위로 “역사”는 일어난다.

1993년에 에드워드 N. 러트왝은 『위험에 빠진 아메리칸 드림. 미국이 제3세계국가로 전락하는 것을 어떻게 방지할 수 있으며 산업 우위권을 위한 지리-경제적 싸움에서 어떻게 이길 수 있는가』라는 강령적인 제목의 책을 출판하였다. 이 책은 완고한 애국적-자학증적 언론에 의해 침몰하는 국가에 대한 적절한 시점에 나온 충격요법으로 환영을 받았다. 러트왝은 그 당시 이미 동시대 전략학의 지도적 두뇌의 하나로 명성을 날렸다. 그는 세속적 경쟁사회학을 통해 미국 엘리트의 명령을 재정식화하는 한에서 이후 그의 조국의 잠재적 정치신학의 지적인 전문가로 여겨질 수 있었다. 그는 세계동향의 관찰자로서 미국의 예외적 상황이 유지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예외주의자임을 자인하는 그는 자국민 다수와 마찬가지로 그에게 있어 이러한 통찰을 수용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임을 분명히 한다. 그의 개입은 두 요소를 하나의 공통된 전망에로 결합시킨다. 첫 번째 단계에서 러트왝은 미국적 “쇠퇴”라는 기호를 꺼낸다. 일본인과 유럽인들의 경제수치는 전후 미국의 우위를 상당히 따라잡았다. 국가적 학교시스템은 전국적으로 부진하다. 중산층은 쇠약해져 가고 있다. 자본주의에 자본이 결여되어 있다. 워싱턴 행정가의 공공 거리에서 마약상들이 어슬렁거리고 있다. 그리고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일본에서 일하는 미국 창녀가 얼마 전부터 유에스-걸 가산금을 더 이상 요구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나라의 별이 지면, 국제 시장에서 그 국민의 살 값도 떨어진다는 것이다.

러트왝은 이러한 정황증거로부터 미국이 무의미로 곧장 자유 낙하한다는 결론을 도출한다. 다른 해석가들이 미국이 문제로 고통을 받지만 여전히 엄청나게 풍부한 문명의 상대적인 정상성으로 귀환하는 것으로 보았던 것을 이 저자는 자기 조국이 거의 무로 전락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제3세계라는 표현은 독자의 귀에 미국이 결코 될 수 없는 것을 가리키기에 충분할 만큼 자살적으로 들린다. 선민들에게 평균적이라는 것은 엄격히 금지된다. 따라서 저자는 임박한 지리-경제적 세계대전을 위한 동원프로그램을 추천한다. 이 대전의 결과 미국은 다시 넘버원으로 등장하여 아마도 후에 성공의 정점에서 아래로 내려 보면서 승자의 조건에 따른 군비축소를 도입할 수 있다는 것이다.

러트왝의 매우 징후적인 책은 미국 이데올로그들이 그 나라의 꿈을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구제하려 한다는 것, 그 꿈을 반대로 전화시키지 않고는 구제할 수 없다는 것을 드러내 보여주고 있다. 문명화된 국가의 다수가 “역사”로부터 역사이후 시대로의 길을 걸어간 반면에, 미국은 마치 일방주의의 시대가 다시 한 번 온 것처럼 역사이후 시대로부터 “역사”에로의 회귀를 시작하고 있다. 미국은 마치 상호작용, 재접속, 상호 자제 그리고 복잡성을 통한 문명화에 관한 한 19세기와 20세기의 통찰이 단지 지역적 타당성만을 갖는 것처럼 -이런 통찰은 강자를 구속하지 않는 패배자의 진리라는 것이다- 백년간의 학습과정의 성과에 저항하고 있다. 미국의 사회적 분위기 조성자들은 심리적 결산을 반울증적 의미로 변조하는 그들의 특권을 여전히 사용하고 있다. 그들은 밀려온 실망 홍수의 수위가 올라가는 사이 오늘날 그 어느 때보다 더 뻔뻔하게 그렇게 하고 있다.

여기서 미국 프로젝트의 수행적 체제, 즉 이 나라의 영혼을 둘러싼 영속되는 싸움은 위험한 자기최면적 기획으로 전화되고 있다. 미국적 메두사의 뗏목위에서 울증집단의 존재는 부정된다. 청교도적 코드에 따라 이 나라에는 패자가 없다. 자기연민에서 침몰하는 사람들만이 있을 뿐이다. 여하튼 러트왝 자신은 위험에 빠진 아메리칸 드림의 재고조사에서 미국의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마약문제에 대한 몇 가지 뚜렷한 지적을 무심코 끌어오고 있다. 수도에서만 2만 5천명이 직업적이거나 아마추어적인 토대위에서 마약거래로 생계를 꾸려가고 있다는 것인데, 이들의 고객은 원형에로의 계몽적 소풍을 열망했던 우드스탁 세대의 후예들이 결코 아니다. 그들은 미국적 현실로부터 화학적 구원에 몰두하는 좌절한 자들의 거대한 군대이다.

체제 전체를 떠받치고 있는 심리정치적 결산사기는 무엇보다 행복추구의 오락장에서 나올 수밖에 없는 거대한 패자문제를 보이지 않게 하려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료는 공개적으로 드러난다. 미국에는 이라크 주민보다 더 많은 가망 없이 가난한 사람이 있다. 미국에는 지구상의 다른 어느 나라보다 더 많은 주기적인 향정신성 약 소비자가 있다. 세계 모든 나라를 합쳐도 더 많은 심각한 과체중문제를 가진 사람들이 있다. 다른 어떤 민주국가보다 더 많은 주기적 비투표자와 정치적 무대표 집단이 있다. 미국에는 유럽보다 10배, 다른 대부분의 나라들보다 6배에서 8배 더 많은 죄수들이 있다. 이 모든 문제군들은 울증은폐와 내부 결산변조의 정교한 시스템의 힘을 빌어 간신히 연명하고 있다. 이를 통해 이 나라의 행복하지 않은 행복추구자의 발 앞에서 벌어지는 심연이 보이지 않는다. 이 심연으로부터 잘 알려진 멜로디가 울려오는데, 귀 기울여 들어보면 그 텍스트가 이해된다. 한 번 이해하면 듣는 이는 공포에 몸을 떤다. 내가 거기서 하지 않으면, 어디서도 하지 않는다. (If I don't make it there, I make nowhere.)

출처: 한국철학회 홈페이지(http://www.hanchul.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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