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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은 역사이해의 바로미터이다"
"숲은 역사이해의 바로미터이다"
  • 강판권 계명대
  • 승인 2006.08.18 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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淸代 安徽省 徽州府의 숲과 생태환경 변화: 黃山을 중심으로

숲은 인류 역사의 출발이자 인류 미래의 희망이다. 인간보다 먼저 지구상에 존재한 나무는 인간을 존재케 한 주요 에너지였다. 따라서 인간의 숲에 대한 인식은 곧 인류의 역사관이기도 했다. 중국인들도 고대사회에서 흔히 나타나듯 고대부터 숲을 숭배의 대상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나 고대사회에서 숭배한 숲은 숲 전체라기보다는 대부분 특정 나무였다. 따라서 석기시대부터 중국인들은 대부분 나무를 소비의 대상으로 바라보았다. 특히 전쟁이 일상일 만큼 빈번했던 춘추전국시대는 청동과 철기로 수많은 나무를 제거했다. 다만 중국인들은 󰡔맹자󰡕에서 보듯 고대부터 숲을 다루는 방식을 알고 있었다. 전쟁과 더불어 인구증가도 숲에 큰 영향을 주었다. 중국의 인구 증가는 농지의 부족으로 산악지대의 개발을 크게 자극했다. 특히 청대의 급격한 인구 증가와 농지 부족은 산악지대에 큰 영향을 주었다.

청대 산악지대에 대한 관심은 인구증가에 따른 중국인의 삶을 도시중심에서 다른 지역으로 옮겼다는 것을 의미한다. 더욱이 연구자들의 산악지대에 대한 관심은 그 동안 청대사 연구에서 관심 밖이었던 환경에 대한 본격적인 관심이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특히 청대 사 연구자들의 환경에 대한 관심은 몇 가지 점에서 관심을 끈다. 우선 청대의 환경 문제에 대한 관심이 현재 중국사회의 주요 문제 중 하나인 환경문제에 대한 역사적인 고찰이기 때문이다. 이는 현실문제에 대한 관심이 역사학의 주요 임무임을 감안하면 지극히 당연하지만, 그간 역사학은 현실문제에 적극적이지 못했다. 또 하나는 중국 환경에 대한 관심이 곧 한국을 비롯한 세계 인류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 동안 청대 연구자들이 관심을 가진 산악지대는 삼성교계 지역이었다. 연구자들이 이 지역에 관심을 가진 것은 무엇보다도 청대에 이 지역으로 많은 인구가 이주했기 때문이었다. 이 지역에 대한 연구는 다른 지역의 산악지대를 연구하는 데 좋은 사례이다. 앞으로 다른 지역에 대한 연구도 절실하다. 본고에서 안휘성 휘주부를 선택한 것도 바로 그간의 연구에 영향을 받았다.

본고에서 관심을 가질 지역은 안휘성 휘주부이지만 그 중에서도 황산을 중심으로 검토할 것이다. 왜 하필 나는 안휘성 휘주부 중에서도 황산을 선택했는가? 내가 황산을 택한 것은 무엇보다도 이 산이 중국을 대표하는 산이자 세계문화유산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현재 황산은 중국은 물론 외국 여행자들이 아주 즐겨 찾는 곳이다. 최근 중국 정부는 材線蟲을 막기 위해 황산의 입구부터 사방 4킬로미터를 무송(無松)지대로 만든 것은 황산의 중요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처럼 황산은 중국 국가차원에서 막대한 예산을 들여 보존하고 있을 만큼 중요한 자산이다. 그러면 고대부터 지금까지 황산의 모습은 어떠했으며, 중국인들은 황산을 어떻게 바라보았을까? 특히 내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부분은 청대의 황산 모습과 이 지역 사회와의 관계이다. 더욱이 그 중에서도 청대 황산의 나무가 중국사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를 살필 것이다. 아직 역사학에서 황산의 나무와 그 의미에 관심을 가진 적은 없었다.

내가 황산과 황산의 나무에 관심을 갖는 것은 山이 ‘産’이기 때문이다. 산은 만물을 낳는 어머니와 같은 존재이다. 이처럼 산에 관심을 갖는 것은 역사학에서 아주 낯설지만 산이 곧 인간 삶에 필요한 수많은 것들을 낳는 ‘産’임을 감안하면 결코 낯설지 않다. 산악지대의 주민들은 대부분 산에서 삶의 방법을 찾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역사학에서 산에 관심을 갖는 것은 그 지역민들의 삶을 이해하는 중요한 방법 중 하나일 수 있다. 특히 황산처럼 중국인에게 중요한 의미를 갖는 산일 경우 인간 삶의 다양한 모습을 드러낼 수 있는 대상일 수 있다. 더욱이 황산이 갖는 세계적인 위치를 생각하면 이 산에 대한 역사적인 고찰은 문화유산에 대한 새로운 접근일 수 있다. 

휘주부의 지리와 수목

안휘성은 화중지역의 북쪽에 위치하고 있다. 자연구분상 화중지역은 중국 아열대의 동부에 위치한다. 이 지역은 대체로 가장 추운 달 평균 기온이 10도이고, 가장 낮은 기온은 영하 4도 등온선과 일치하며, 중아열대와 중아열대의 경계선이다. 온습한 아열대 기후조건을 가진 화중지역은 주로 참나무과, 녹나무과, 차나무과, 감탕나무과 등 상록활엽수 수종이 산다. 그러나 남방의 열대성 식물과 북방의 온대식물도 섞여 있기 때문에 식생의 종류가 다양하다.

양자강 북쪽의 안경부와 남쪽의 휘주부의 머리글자를 빌린 안휘성은 양자강과 淮河, 錢塘江 상류인 新安江 등 삼대 수계를 아우르고 있는 지역이다. 선진시대에 이 지역이 皖國에 속했기 때문에 안휘를 ‘환’이라 부른다. 자연지리상 안휘는 淮北평원, 江淮低山구릉, 장강연안평원과 皖南低山구릉 등 네 개 지형으로 나눌 수 있다. 회북평원은 회화이북의 회화유역 충적평원이다. 이곳은 일찍부터 농업개발 지구였다. 강회저산구릉은 장강, 회하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은 서에서 동으로 해발 1000미터에서 2000미터높이의 좌우에 구릉지이며 기복은 크지 않다. 장강연안평원은 장강 및 그 지류에 해당한다. 皖南低山구릉은 장강이남에 위치한다. 이곳이 본고에서 다룰 지구이다. 이곳은 화산폭발로 화강암으로 형성된 황산, 구화산 등이 자리 잡고 있다. 이곳은 습윤한 기후와 더불어 운해, 온천, 奇松, 괴석 등 유명한 명승지이기도 하다. 더욱이 이곳은 구릉지가 좁아 곡물을 재배해서 많은 인구를 먹여 살리기가 어려운 지역이다. 이런 지형으로 이곳에서는 차를 비롯한 경제작물이 발달했으며, 원거리 상업에 종하는 사람이 많았다.

수목은 자연환경에 절대적인 영향을 받기 때문에 안휘성의 지형과 기후에 따라 종류가 다르다. 안휘의 수목을 확인하는 방법은 다양하겠지만 지방지 자료를 통해서 확인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물론 청대 안휘성의 지방지를 통해서 이 지역의 모든 나무를 확인할 수는 없다. 더욱이 안휘성 전체의 나무를 확인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그래서 본고에서는 안휘성 중에서도 황산이 속한 휘주부의 나무만 지방지를 통해 살펴보고자 한다. 휘주부의 수목을 살피려는 것은 수목의 종류가 곧 이 지역의 숲을 이해하는 관건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나무의 종류를 알면 나무의 가치와 쓰임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안휘성에서도 장강 이남에 위치한 휘주부는 休寧縣, 績溪縣, 祁門縣, 婺源縣, 歙縣, 黟縣 등 6현으로 구성되어 있다.

鄣山 남쪽 산록에 자리 잡은 休寧縣은 땅은 좁고 사람은 많았으며, 산이 많고 田이 적은 곳이었다. 이곳 사람들은 손님이 와도 기장을 내놓을 수조차 없었다. 이곳의 생활수준은 吳越의 여러 郡邑에 미치지 못했다. 휴령현은 자체적으로 곡물을 자급자족할 수 없었다. 이곳은 풍년일 경우라도 반년을 버틸 수 없었다. 따라서 부득이 이곳에서는 쌀이 부족해서 외지에서 수입할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날로 인구는 증가하였으나 생계를 꾸릴 특별한 방법은 없었다. 단지 맡은 일에 부지런할 뿐이었다. 휴령현 중에서도 以西 지역의 쌀 부족은 더욱 심했다. 이서 지역 주민들은 산에서 칡 같은 것을 캐서 생계를 꾸려야만 했다. 혹 여가 있으면 산에 불을 질러 곡식을 일찍 심어 먹는 문제를 해결하기도 했다. 따라서 이곳 사람들은 근검절약하면서 耕商에 힘썼다. 휴령현에서 생산한 나무는 五穀樹,松, 衫, 柏, 檜, 梧, 桐, 楡, 桂, 槐, 檀, 櫧, 柳, 楊, 白楊, 椿, 棟, 桑, 柘, 楓, 櫟, 山桂, 冬靑, 烏柏, 棕櫚, 阜莢, 毛竹, 金竹, 苦竹, 水竹, 拜竹, 紫竹, 斑竹, 慈竹 등이 있었다. 특히 휴령현 관련 자료에는 나무 중 대나무를 가장 많이 기록하고 있다.

휘주부에서 가장 북쪽에 위치한 績溪縣은 산이 많고 지대가 높아 기온이 낮았다. 특히 적계는 宣歙의 경계 지역이어서 더욱 험한 지역이었다. 따라서 이 지역은 땅이 척박하여 농사에 종사하는 사람이 적었으며, 산에 나무를 베어 토지를 개간하는 자가 많았다. 적계현은 다른 지역과 비교할 경우 田疇는 婺源에 미치지 못하고, 貿遷은 歙寧에 미치지 못했다. 적계현에서 생산한 나무는 梓, 椑柿(감나무), 松, 柏(측백나무), 衫(삼나무), 梧桐(오동나무), 岡桐(오동나무), 阜角, 石膚, 羅漢松, 樺(자작나무), 西河柳(觀音柳), 五穀樹, 楡, 槐, 檀, 櫧(종가시나무), 柳, 楊, 黃楊, 烏血, 檿, 桑, 柘, 楓, 櫟, 冬靑, 椿, 椒, 棇(두릅나무), 慈孝竹, 金竹, 苦竹, 水竹, 鳳尾竹, 方竹, 羅漢竹, 苗竹, 斑竹, 江南竹 등이 있었다.

大共水를 끼고 있는 祁門縣은 동쪽에 榔木嶺, 서쪽에 歷山, 남쪽에 梅南山, 북쪽에 大共山으로 둘러싸인 곳이다. 이처럼 기문현은 산이 전체 면적의 80%를 차지했다. 그래서 넓은 들판이 없었기 때문에 이곳 농민 중 3/10이 산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산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墾田을 해도 1무를 채울 수 없었다. 이에 그들은 칡 같은 것으로 배를 채워야만 했다. 혹 풍년일지라도 식량은 1/3정도만 확보할 수 있었다. 기문현 동쪽 사람들이 행상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도 바로 이 지역의 열악한 자연환경 때문이었다. 행상에 나선 사람들은 사방으로 나가 돈을 마련하여 恒産으로 삼았다. 혹 봄에 나가서 겨울에 돌아오기도 하고, 어떤 경우에는 수 년 만에 돌아오기도 했다. 한편 남쪽 사람들은 뱃사공, 서쪽 사람들은 땔감, 북쪽 사람들은 산에 다른 것을 심어 생계를 유지했다.

기문현 사람들은 양식이 부족했기 때문에 茗․漆․紙․木같은 것을 팔아 이웃의 江西에서 쌀을 사왔다. 기문현에 생산한 나무는 梓, 柿, 松, 柏(측백나무), 衫(삼나무), 梧, 桐, 桐子, 烏柜, 楡(느릅나무), 槐(회화나무), 檀(박달나무), 櫧(종가시나무), 黃楊, 桑, 柘, 楓, 櫟, 冬靑, 椿(참죽나무), 椒(산초나무), 椑(감나무), 檫, 棠(팥배나무 혹은 산앵두나무), 苦棟, 棕櫚(종려나무), 樗(가죽나무), 樟(녹나무), 慈孝竹, 金竹, 苦竹, 水竹, 鳳尾竹, 方竹, 羅漢竹, 苗竹, 斑竹, 箬竹 등이 있었다. 요컨대 기문현도 산이 많고 전이 적은 곳이어서 이곳 사람들은 대부분 나무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휘주부 북쪽에 위치한 이현도 땅이 좁고 척박했다. 이곳은 士조차도 대부분 가난해서 먼 곳까지 노동하러 갈 정도였다. 농민들은 1년 내 부지런하게 농사지어도 식량을 자급할 수 없었다. 이현에서 생산한 나무는 梅, 桃, 李, 杏, 梨, 棗, 榧, 銀杏, 香록(귤 종류), 橘, 柚, 橙, 枇杷, 포도, 모과, 탱자, 석류, 梓, 柿, 松, 柏, 衫, 梧, 桐, 楡, 桂, 槐, 檀, 櫧, 柳, 楊, 白楊, 漆, 棟, 桑, 柘, 楓, 櫟, 山桂, 冬靑, 烏柏, 石楠, 椿, 椒, 茱萸, 紫荊, 阜莢, 竹 등이 있었다.

휘주부의 삼림 훼손과 목재 판매

휘주부의 삼림 상황은 이 지역의 자연지리 조건과 함께 인구와 경작지가 주요한 변수였다. 따라서 이 지역의 삼림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이 지역의 인구와 경작지를 살펴야 한다. 휘주부 각 현의 인구와 田土는 아래 표와 같다.

<표1> 휘주부 각 현의 인구와 전토 

縣名

    인구(丁)

  전토(頃)

歙  縣

休寧縣

婺源縣

祁門縣

黟  縣

績溪縣 

74,379 

65,238 

32,238 

19198 

12,386 

10,676

 4,906

 4,802

 5,030

 2,146

 1,640

 2,038

출처: 道光 󰡔徽州府志(1)󰡕권5-1, 「食貨志․賦役․戶口․田土」, pp.1-14.

휘주부의 인구는 흡현-휴령현-무원현-기문현-이현-적계현 순으로 많고, 토지는 무원현-흡현-이현-휴령현-기문현-적계현-이현 순으로 많다. 인구대 전토의 비율은 적계현-무원현-이현-기문현-휴령현-흡현 순이다. 이는 역으로 이현이 인구 압력을 가장 많이 받고 있었던 지역이고, 적계현이 인구 압력을 가장 적게 받고 있었던 곳임을 의미한다. 그런데 기본적으로 휘주부는 萬山의 가운데 끼어 있기 때문에 땅이 좁고 사람이 많은 곳이었다. 특히 휘주부는 조혼 풍속으로 당송이후부터 인구가 증가했으며, 상대적으로 자연재해가 적어 다른 지역에 비해 인구가 급격하게 감소한 경우도 적었다. 이에 명청시대 휘주부의 인구는 이전시대보다 인구 증가가 두드러졌다. 명 홍무 26년(1393) 휘주부의 경지면적은 3,534,977무, 인구는 592,364명으로 1인당 평균 경지 면적이 5.97무였다. 그러나 청대 가경 25년(1820) 휘주부의 경지면적은 2,055,973무, 인구는 2,474,839명으로 1인당 평균 경지 면적이 0.83무였다.

이처럼 명대에서 청대까지 휘주부의 인구는 4.2배 증가했으나 경지면적은 오히려 7.2배나 줄었다. 이에 청대의 휘주부는 인구압을 강하게 받고 있었다. 이 지역에서 이러한 인구압을 해결하는 방법은 곡물 외에 蕃薯같은 품종을 재배해서 생계를 꾸리는 것도 외에 산지가 많은 이 지역의 특성상 풍부한 임업자원을 활용하는 것이었다.

휘주부의 경우 지방지에서 과일나무로 분류한 것을 제외한 나무는 대략 25종정도이다. 그러나 지방지에 기록되어 있는 모든 나무가 이 지역의 생활에 도움을 줄 수는 없다. 나무일지라도 경제적 가치를 갖추어야하기 때문이다. 물론 키 큰 나무라고 해서 반드시 경제적 가치를 지닌 것도 아니며, 키 작은 나무라고 해서 반드시 경제적 가치가 없다고 할 수도 없다. 그러나 나무는 사용자의 필요에 따라 그 가치가 다를지라도 나무 자체가 가지고 있는 특성 때문에 경제적 가치는 처음부터 어느 정도 결정된다고 볼 수 있다. 예컨대 산초나무는 목재가치보다는 약재가치를 훨씬 많이 가지고 있지만, 상수리나무와 버드나무는 약재 가치보다는 목재 가치를 지니고 있다. 또한 한나라에서 수나라 이전까지 수도의 가로수였던 회화나무는 목재로서의 가치도 적지 않지만 열매를 식용 혹은 염료로 사용했다. 느릅나무도 약재가치 외에 목재가치가 아주 높았다. 특히 대나무 같은 경우는 죽순을 식용으로 이용했겠지만, 생활 용품과 농기구 등 다양한 용도로 사용했다. 낙우송과의 삼나무는 배와 棺을 만드는 데 사용했다. 또한 삼나무는 일본의 고건축에서 볼 수 있듯이 기둥과 바닥재에 긴요한 나무였다. 아울러 각 가정에서는 삼나무로 물통이나 각 종 곡식 그릇인 되를 만들기도 했다. 삼나무가 다양하게 사용된 것은 이 나무가 물에도 잘 견디고 쉽게 썩지 않았기 때문이다.

산이 절대면적을 차지했던 기문현 사람들은 때론 먹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산을 개간했으나 모래가 골짜기를 이루는 터에 경작조차 할 없었다. 따라서 기문현 사람들은 산의 나무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小民과 佃戶들은 산에 불을 질러 경제림을 심어 이익을 얻기도 했다. 그러나 이는 산림을 훼손하는 일이기에 관에서 단속했다. 아울러 이들이 나무를 베어 숨겨놓기도 하지만 혹 다른 사람들이 가져가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따라서 관에서는 나무를 훔치는 문제까지 해결해야만 했다. 아울러 산에 나무가 없어진 곳에는 묘목을 심어 입산 금지시켰다.

적계현에서도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나무를 베어 개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적계현 사람들이 처음부터 산을 개간하여 생계를 유지해 갔던 것은 아니다. 이러한 현상은 안휘성 安慶府 사람들이 건륭 시대 적계현에 들어와 산을 임대․개간하면서부터 토착민들도 본격적으로 가담했다. 이곳도 기문현처럼 산에 불을 질러 풀 한포기 남기지 않고 지력을 다 사용했다. 그래서 산은 童田, 즉 민둥 밭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비가 오면 모래돌이 굴러 떨어졌다. 더욱이 비가 그치면 水源이 말라 산지는 물론 산 아래 경작지조차 물을 낼 수조차 없었다. 이 문제가 적계현의 가장 큰 근심이었다. 아울러 계수나무와 같은 땔감을 판매하는 것은 또 다른 근심이었다. 따라서 적계현의 근심은 산으로 빚어졌으며, 산림 훼손으로 빚어진 문제점은 아주 커서 홍수 피해보다 심했다.

사방 산으로 둘러싸인 이현에서는 산의 농지 개간은 물론 탄광개발로 산림 훼손이 적지 않았다. 더욱이 탄광개발로 분묘 훼손도 문제였다. 가경연간에는 산지에 사는 棚民들이 산을 임대해서 탄광 개발로 이익을 얻었다.

목재가 휘주부에서 차지하고 있는 높은 비중은 이 지역의 낮은 농업 생산과 무관하지 않다. 따라서 이 지역에서 목재 생산 여부는 생계 여부를 결정할 만큼 중요했다. 그런데 나무가 재산 가치를 지니기 위해서는 절대 시간이 필요하다. 특히 소나무과와 참나무과에 속하는 나무처럼 ‘고정 생장’ 나무일수록 절대 시간이 많이 필요하다. 반면 버드나무처럼 ‘자유 생장’ 나무는 상대적으로 짧은 기간에 수익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나무는 어떤 경우든 일정한 기간 동안 보호하지 않으면 상품성 있는 목재를 생산할 수 없다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휘주부 관아에서 그 어떤 지역보다 삼림 보호에 심혈을 기울인 것도 바로 목재가 이 지역의 경제에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나무가 지니고 있는 특성과 무관하지 않다.

송대이래 임업 경제가 전체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높았던 휘주부는 삼림 보호 정책도 일찍부터 발달했다. 그래서 삼림 보호는 이 지역의 官府는 물론 촌장 종족, 會社, 향약 등 향촌의 기층 조직의 주요한 임무 중 하나였다. 이 지역에서 발견된 300여 개의 삼림 보호 관련 비각 자료는 이 지역이 어느 정도 삼림 보호에 노력했는지를 구체적으로 알려주는 흔적이다. 비각 자료 중 명대는 1개, 청대는 26개 남아 있다. 그 중 흡현 3개, 휴령 4개, 무원 4개, 기문 10개, 이현 3개, 적계 2개이다. 청대 휘주부의 삼림 보호 비각 자료 중 가장 많이 남아 있는 기문현은 앞에서 본 것처럼 삼림 훼손 사례의 대표 지역이다.

농지보다 산지가 많은 휘주부 사람들은 부득이 농사보다 장사에 종사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그래서 휘주부는 명청 시대 강남을 대표한 휘주상인을 낳은 곳이었다. 휘주상인은 鹽商, 糧商, 布商, 茶商, 典當業 등 다양한 업종에 종사했지만, 이 지역의 특성상 木商에도 종사했다. 휘상의 활동영역은 전국 방방 곳곳이었다. 그러나 휘상은 명대이전에는 크게 발달하지 못했다. 휘상이 크게 발달할 수 있었던 것은 명 成化, 弘治부터 동남 城鎭의 상품 경제가 발달했기 때문이었다. 동남 성진 지역의 상풍 경제의 발달로 휘주 지역도 상업 활동이 하나의 풍조로 바뀌기 시작했다. 아울러 다음에서 보는 것처럼 휘주지역에서도 시장이 발달했다.

<표2> 청대 휘주부의 市鎭

시진명(위치)

 내용

街口鎭(흡현)

新館鎭(흡현)

巖砂鎭(흡현)

屯溪鎭(휴령)

萬安鎭(휴령)

五城鎭(휴령)

三吳鎭(무원)

高砂鎭(무원)

閃上鎭(기문)

柏溪鎭(기문)

到湖鎭(기문)

廟口鎭(이현)

魚亭鎭(이현)

河東市(적계)

華陰鎭(적계)

龍塘鎭(적계)

臨溪市(적계)

鎭  頭(적계)

縣東南 100리

縣東 30리

縣西 25리

縣東南 30리

縣東 10리

縣西南

縣東 75리

縣西南 30리

縣南 90리

縣北 30리

縣南 100리

縣西 20리

縣東南 35리

縣東 1리

縣南 3리

縣南 15리

縣西 20리

縣西北 30리

출처:道光 '徽州府志(1)' 권4-3, 「營建志․關市」, p.46.

청대 휘주부의 시진은 적계현이 5곳으로 가장 많고, 흡현, 휴령, 기문이 각각 3곳, 무원과 이현이 각각 2곳이다. 휘주부의 수목도 바로 이러한 시진을 통해 다른 곳으로 판매되었다. 휘주부에서 가장 많이 생산한 나무는 낙우송과의 삼나무였다. 휘주부 중에서도 삼나무는 무원에서 가장 많이 생산되었다. 휘주부를 대표하는 삼나무는 메타세쿼이아처럼 온난다습한 곳에서 잘 자라는 나무이자 속성수이다. 따라서 삼나무는 휘주부에 적합한 나무이다. 휘주부에서 삼나무를 본격 심은 시기는 남송대이다. 그들은 겨울철에 산에 들어가 나무를 베어 장마철을 기다려 수력으로 나무를 운반했다. 이렇게 산에서 운반한 나무들은 안휘성 寧國府 南陵과 宣城 중간에 위치한 靑弋江에서 안휘성 太平府 蕪湖로 옮겼다. 무호는 바로 양자강과 만나는 지점이다. 이곳에 모인 나무들은 각각 필요에 따라 다른 곳으로 운반되었다. 이러한 경영 방식은 명청대에도 이어졌다.

휘주의 목상들은 장강을 중심으로 활동했을 뿐 아니라 북경을 잇는 양주에서는 절대다수의 상인이 휘상이었다. 남경에서도 휘주의 목상이 활발하게 활동했다. 아울러 휘상들은 북방 각지에서도 적극 활동했다. 明 萬曆 시기 휘주 출신 王天俊 등이 북경 乾淸․坤寧 二宮을 보수한다는 소식을 듣고 관리에게 뇌물을 주어 삼나무 16만 주를 제공하기로 한 바 있었다. 물론 이 계획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일찍부터 이곳의 삼나무가 농가 경제에 주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이곳 사람들은 대부분 삼나무를 심어 생계를 유지했다. 삼나무 주 생산지인 무원에서도 주로 목재상에 종사하면서 생계를 도모했다.

황산의 역사적 위치

황산은 중국의 五嶽(山東 東嶽의 泰山, 陝西 西嶽의 華山, 河南 中嶽의 崇山, 湖南 南嶽의 衡山, 山西 北嶽의 恒山)외에 중국 명산 중 으뜸으로 꼽힌다. 황산의 처음 이름은 黟山이었다. 이산은 곧 황산에 인접한 휘주부 黟縣에서 빌린 이름이다. 이산이 황산으로 바뀐 것은 당 天寶 6년(747)이었다. 황산은 黃帝가 이곳에서 단약을 만들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현재 황산은 황산시와 흡현, 휴령, 이현 등을 포함하고 있다. 이 산의 최고봉인 蓮花峰의 높이는 해발 1873미터이다. 황산은 최고봉 연화봉을 비롯해서 36봉, 水源 36곳, 溪 24곳, 洞 12곳이 있다.

현재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 있는 황산은 빼어난 풍광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찾았으며, 적지 않은 사람이 유람기를 남겼다. 청대 閔麟嗣가 편찬한 󰡔黃山志定本󰡕에는 30편의 황산유람기가 수록되어 있다. 󰡔황산지정본󰡕에는 황산에 관한 시도 많이 실려 있다. 산수에 대한 유람기나 시가 대부분 아름다움을 칭송하듯이 황산에 대한 유람기와 시도 대부분 황산의 아름다움을 칭송하는 내용이다. 황산에 대한 유람기는 많지만 그 중 일반인들에게 낯익은 인물은 아마 청초의 화가 석도(石濤, 1642-1707)일 것이다. 그는 강희 6년(1667) 황산에 다녀온 후 <黃山圖>를 그렸다. 석도가 친구와 함께 황산에 다녀온 과정은 아주 흥미롭다. 아래 시는 석도와 함께 황산에 오른 매청이 석도의 황산 그림을 보고 즉흥적으로 지은 시이다.

표연히 나타난 석 공
소매 가득 안개가 자욱하구나.
손에 쥔 두루마리
황산의 운해라 하네.
구름 낀 봉우리 서른여섯 개
봉우리마다 자수정이 맺혔네.
아득히 넓어 다 볼 수 없어
한손에 움켜쥐고 돌아왔네.
비로소 천지의 기이함을 믿으니
천 년 동안 나의 스승을 기다렸네.
붓이 닿자 새롭게 열리는 경지
그 힘은 역사(力士)와 같구나.
맞은편의 부구산을 불러
험난한 길을 가려 하는구나.
절정에 오를 수 없다며,
주저하며 이 그림을 펼치네.

많은 황산 유람기에서도 자주 등장하듯이 황산은 불교 성지이기도 했다. 그래서 사찰에 대한 관찰도 적지 않다. 그런데 유람기나 시를 비롯해서 많은 사람들이 황산과 관련해서 갖는 관심은 단연 소나무이다. 황산 쌍탑사에는 소나무가 유명했다. 석도도 쌍탑사에 들러 이곳의 소나무를 보았다. 그러나 1667년 석도가 찾았던 쌍탑사 주위에는 소나무가 많지 않았다. 그래서 석도 일행은 쌍탑사의 스님과 함께 쾌 많은 소나무를 심었으며, 석도와 매청은 각각 <種松圖>를 그렸다. 석도의 일행이었던 우산은 다음과 같이 「석공의 종송도를 노래하다」를 읊었다.

매 옹과 석 공이 그린 소나무
완강함은 여느 사람들과 다르네.
석 공은 황산으로 행각하더니
기이한 소나무 만 그루가 가슴속에 포진했네.
곧 손으로 쌍탑사를 들어 올리려 하거늘
황얼 도사는 어찌 오지 않는가?
풀이 육척 장신 자란 곳은
예전에 구름과 새가 사람을 따랐지
금계의 춤이 끝나 호랑이와 코끼리 포효하자
소나무 심어 황무지를 없애려 하네.
승려의 한가로운 흥취 이처럼 많아
황산의 무수한 봉우리 눈 안에 들어오네.
소나무 그늘에 높이 않아 읊조리며
신원(神猿)과 동자를 부르네.
객이 오니 웃으며 <종송도>를 건네는데
소나무를 새로 몇 그루 심었는지 알겠네.
잠시 공중에 소리 지르며
푸른 하늘에 만 그루 소나무 나란히 떠 있는데
묻노니, 서쪽으로 날아간 황얼은 돌아왔는가?

시의 내용을 전적으로 신뢰할 수 없더라도 석도 일행이 쌍탑사의 주변에서 소나무를 심었다는 사실은 이 당시 사람의 발길이 닿는 황산 주변의 소나무가 상당히 많이 사라졌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더욱이 한 때 울창한 숲이었던 황산을 상상하면서 소나무를 심어 황무지를 변화시키려는 구절은 시인의 과장된 표현을 감안하더라도 이 당시의 황산이 예전과 분명 달랐다는 점을 강하게 시사한다.

황산의 소나무는 千柯千態였다. 즉 황산의 소나무는 모습에 따라 다양하게 불렸다. 迎送松으로도 불리는 臥龍松은 기암괴석에 마치 누워있는 용 모습을 띠고 있어 붙인 이름이다. 破石松은 懸度嶺 계곡에 높이 2丈, 둘레 1丈 정도의 돌에 반송 같은 소나무를 일컫는다. 이 소나무는 규룡같은 가지가 사방으로 나와 數 畝의 땅에 그늘을 만들어 사람들이 정상을 볼 수 있으나 줄기는 볼 수 없었다. 接引松은 황산의 始信峰에 살고 있는 소나무이며, 아주 오래된 바둑처럼 평평한 棋平松은 높이와 둘레가 각각 2척이다. 혹 포단송과 같은 소나무로 보는 경우도 있지만 다른 나무이다. 蒲團松은 기평송과 비슷하지만 기평송보다 모양이 빽빽하다. 小心坡 절벽에 산다. 困龍松도 포단송처럼 소심파 언덕에 산다. 倒挂松은 황산의 정상인 연화봉 길에 거꾸로 매달려 있다.

황산을 상징하는 나무가 소나무이기에 많은 사람들이 황산과 함께 황산의 소나무, 즉 黃山松을 떠올린다. 과연 황산송은 어떤 소나무인가? 황산송은 한국의 토종 소나무, 즉 춘양목이나 울진의 金剛松과 약간 다르다. 소나무의 특징 중 하나는 잎이 2개라는 점이다. 황산송도 잎이 2개다. 그런데 황산송은 우리나라 소나무보다 침엽이 조밀하면서도 짧고, 줄기는 굽고 가지는 용 모습이다. 윗부분은 마치 깔로 깎은 듯이 평평하다.황산송에 대해서는 왕홍도의 󰡔黃山領要錄󰡕에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황산에 사는 나무는 기이하면서도 빼어나다. 사람들은 황산의 소나무를 만나면 행운이라 한다. 왜냐하면 황산은 돌이 많고 흙이 적어 대개 나무가 살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독 소나무만 산다. 황산의 소나무는 아마 돌에 살 것이다. 그래서 돌을 어머니로 삼고 있다. 황산의 돌은 그 바탕이 아주 빼어나며 성질은 가늘면서 강하고, 자질은 윤기 나며, 자태는 詭怪變幻하다. 소나무는 돌의 배에서 잉태한다. 마치 소나무는 신성한 사람처럼 태어나기도 전에 먼저 어머니의 태교를 들으며, 태어나서는 그 삶을 두텁게 한다. 혹 일월로 목욕하고, 혹 구름과 안개로 바람 센다.” 앞에서 언급한 와룡송을 비롯한 각 종 이름을 가진 소나무들이 황산을 대표하는 이른바 '황산송'이다.

황산에는 소나무만 있는 게 아니라 다른 종류의 나무도 살고 있다. 소나무외 황산의 나무 종류에는 僊橋柏, 遊龍柏, 桱類杉, 黃楊木, 紫檀, 雲霧茶 등이 있었다. 물론 모과나무를 비롯한 과수나무도 있었다. 그러나 과수 나무는 목재의 가치보다는 열매에 가치를 두고 있다. 따라서 청대 황산의 경우 목재가치를 지닌 나무는 소나무와 측백나무, 그리고 자단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황양목과 운무차는 목재 가치가 거의 없다. 다만 1947년 조사에 따르면 황산의 수종은 馬尾松, 黃山松, 金錢松, 小葉櫟, 檫, 甛櫧, 木荷, 紫楠, 毛竹 등이 있었다. 이 중 상수리나무(소엽역), 종가시나무(첨저), 녹나무(자남) 등은 청대 자료에 보이지 않는 종류이다.

황산의 숲과 생태환경 변화

휘주부에서는 소나무도 삼나무와 가래나무와 더불어 주요한 목재였다. 휘주부에서 소나무가 주요한 목재였다는 것은 상황에 따라 황산의 소나무조차도 훼손될 가능성이 아주 높다는 뜻이다. 1930년대에 조사된 자료에 따르면 안휘성 부근에는 삼림이 거의 없다. 그런데 석도일행이 남긴 시와 1700년에 편찬한 왕홍도의 <黃山領要錄>에서도 언급하고 있듯이 황산의 소나무는 일찍부터 훼손되었다. 황산의 숲이 제거된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 목재 수요의 급증을 들 수 있다. 안휘성 휘주부의 목상이 활발하게 활동할 수 있었던 이유도 명청대 강남의 상업발달로 목재 수요가 엄청났기 때문이었다. 특히 조선업의 발달로 강남의 산은 송대부터 벌거숭이였으며, 다른 지역의 나무가 절실히 필요했다. 안휘성도 그 중 한 곳이었다. 나무 수요의 급증에 따라 휘상들은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무분별하게 나무를 구입했다. 그들은 주민들이 베어 둔 나무를 구입하기도 했지만 산의 나무를 통째로 사서 벌목했다. 심지어 그들은 벌목이 금지된 국유림 구역도 각종 수단을 동원해서 벌목했다. 또 다른 이유는 황궁 건설에 楠木과 杉木을 비롯한 이른바 ‘皇木’의 고갈로 소나무를 대신 충당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청대는 소나무가 선박 건조 등 목재 수요의 급증과 황궁 건설로 온전할 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황산의 소나무인들 온전할 수 없었을 것이다. 더욱이 소나무로 유명한 황산의 소나무가 온전하다면 그것이 이상한 일이다. 황산 곳곳의 기이한 소나무마저 수난당한 점을 감안하면 황산 저지대의 소나무는 말할 필요조차 없다. 청대 황산의 소나무가 어떤 처지에 놓여 있었는지를 통계로 알려주는 자료는 없지만, 아래 시는 왕홍도의 󰡔黃山領要錄󰡕과 더불어 황산의 소나무 상황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준다.

「소나무를 애도함(悼松)」
세상에 황산의 소나무와 비길만한 게 적은 이유는(黃山之松世少伍)
높고 큰데 있는 게 아니라 기이하고 오래되었다는데 있다(不在高長在奇古).
뿌리가 채 땅에서 벗어나기도 전에 몸이 벌써 굽었으니(根未離地身已曲)
천성적으로 하늘이 두려워 일찍 머리를 숙인 듯하다(性似畏天頭早俯).
가지와 잎이 빽빽하여 어가(御駕)의 일산을 펼친 듯한데(森布儼同華蓋張)
돌 틈으로 굳센 모습을 익숙하게 드러낸다(堀强慣從石縫吐).
섬돌 앞 조그만 땅에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영웅 노릇하며(不階尺土身英雄)
유람객을 끌어 맞이하니 석가모니 부처와 비슷하다(接引遊人類佛祖).
길들인 용, 깨진 돌, 부들방석 등 갖가지 이름들로(擾龍破石菩團名)
시가에 노래하고 화보에 그려진다(載入詩歌畵入譜).
하루아침에 인력으로 두루 막기 부족하니(一朝人力少周防)
나무꾼의 자귀와 도끼를 맞는 수밖에 없다(甘受樵夫斤與斧).
베어 작게 다듬고 꺾어 불태우니 산 속은 점점 텅 비어(拉雜摧燒漸漸空)
원래 열 중 아홉이 사라지고 드문드문하다(八九依稀存二五).
기이한 산봉우리에 서려 있던 야윈 용도 보이지 않고(奇峰不見瘦蛟蟠)
높은 산꼭대기는 텅 비어 남은 곳은 역약한 풀들만 하늘거린다(絶巘空餘弱草舞).
노승이 무릎 꿇고 절하며 힘써보지만 막아내기 어려우니(老僧膜拜力難救)
청산은 말없이 의기소침한 기색이네(靑山無言色慘阻).
혹시 마룻대와 대들보로 쓰여 명당을 받친다면(果爲梁棟支明堂)
소나무를 설령 베어지더라도 마음으로 또한 허락하리라(松縱受戕心亦許).
그렇지만 장차 썩은 초목처럼 여겨져(其如當作腐草看)
태반이 땔감으로 충당되어 가마솥에 태워지리라(半入煤蓬炊瓦釜).
예부터 액운을 만남은 모두 늘 그런 식이었으니(古來劫數總皆然)
만사가 본래 하늘이 주관하는 것은 아님이로다(萬事原非天作主).
준마는 채찍을 맞으며 등에 소금 싣고 날랐고(車鞭俊馬背負鹽)
재덕이 뛰어난 사람은 큰 통에 쪄서 머리는 육포가 되었다(盤烝美人頭作脯).
왕세충(王世充)의 책은 모두 황하에 가라앉았고(世充書卷盡沈河)
아방궁(阿房宮)은 뜻밖에 항우(項羽)로 인해 횃불 하나로 재가 되었다(阿房一炬偏遭楚).
가련하구나, 황산의 소나무 역시 저들의 운명과 같아(可憐松亦與之同)
이슬 맞고 서리 머금다가 재와 흙으로 변할 터이니!(帶露含霜變灰土)
내가 하늘에 있는 통천대(通天臺)에 상소하겠노니(我欲上表通天臺).
옥황상제께서 각 하부 관서에 칙령을 내려시옵소서(玉皇勅下群官府).
오랜 세월 계속 심어 가꾸고 보호한다면(栽培保護三千年)
아마 기이한 소나무들을 다시 보충할 수 있으리라(或者奇松還再補).
황하가 맑길 기다릴 수는 있어도 사람이 장수하기는 어려운 법(河淸可俟人壽難)
혼자 황폐한 산을 마주하며 비 오듯 눈물 흘린다(獨對荒山淚如雨).

위 시의 저자는 원매(袁枚, 1716-1797)이다. 그는 건륭 48년(1783) 결코 젊지 않은 나이인 68세 때 황산을 유람했다. 그는 1783년 4월 6일 비를 무릅쓰고 황산 湯口에 도착한 후 연화봉 정상까지 올랐다. 그는 6월 5일에 산에서 내려왔다. 그가 황산을 유람한 기간은 2개월이었다. 원매가 남긴 시는 시인의 눈에 비친 황산의 모습이지만, 이미 황산에 소나무가 대부분 사라졌다는 현장을 전하고 있다. 과연 그렇게 많던 황산의 소나무는 어디로 갔을까.

황산을 포함한 휘주부의 소나무가 어디로 갔는지를 구체적으로 확인하기란 쉽지 않다. 다만 명대 황산에도 산장이 2,400무나 있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명대 혹은 그 이전부터 황산의 소나무가 벌목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원매의 시에서 보듯이 청대에도 여전히 황산의 소나무가 다른 곳으로 판매되었을 것이다. 명청시대의 휘주부 목재는 寧國府, 池州府, 太平府 등지와 함께 강남으로 수출되었다. 명대 전 중기부터 장강에서 蕪湖를 통해 강남으로 들어온 휘주부 등지의 목재를 ‘內河木’이라 불렀다. 이곳에서 강남으로 팔려간 목재는 虎尾木, 梨木, 橋木, 梁木, 楊木, 株木, 橛木, 松木 등이었다. 휘주부의 삼목은 가장 아름다운 목재였다. 휘주부 각 현의 목재 집산지는 屯溪鎭이었다. 휘주 목상들은 기문 등지에서 목재를 구입하여 둔계로 가져가 절강성의 항주, 가흥, 호주, 강소성의 소주 등지로 판매했다. 황산의 소나무도 이런 과정을 통해 판매되었을 것이다.

황산의 소나무가 대부분 훼손된 것은 원매도 지적하고 있듯이 인근 사람들이 땔감으로 사용하거나 목재용으로 팔려나갔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황산의 소나무가 모두 땔감 혹은 목재용으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은 높지 않다. 황산송의 또 다른 용도는 분재용이다. 황산과 절강성 天目山의 황산송은 명대부터 최고의 분재용 소나무로 꼽혔다. 청대에도 명대와 마찬가지로 많은 사람들이 분재를 즐겼으며, 소나무 분재의 절반은 황산송이었다.

황산의 소나무는 땔감, 목재와 분재용으로만 사용한 것은 아니었다. 원매가 대들보용으로 사용하길 바라는 구절에서도 알 수 있듯이 대들보용으로 사용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청 강희제 때부터 사천의 경우이긴 하지만 궁궐 건축에 소나무를 사용했다는 사실을 상기하면 황산송도 궁궐 건축용으로 사용했을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건륭 즉위 6년(1741)부터 40년(1775)까지 이루어진 원명원 보수에도 소나무가 사용되었다. 원명원 보수에 소나무를 사용한 근거는 󰡔圓明園內工則例󰡕이다. 원명원 보수에 사용한 나무는 黃松과 紅松 두 종류이다. 원명원 보수에 사용한 소나무가 황산송 혹은 휘주부에서 생산한 것이라는 증거는 없다. 다만 건륭시기에 황실 건축에 소나무를 사용했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데 머물 수밖에 없다.

황산의 소나무를 비롯한 각종 나무들을 사라지게 한 주범은 누구인가. 그들은 바로 붕민이다. 명대 중엽부터 출현한 붕민은 주로 강서, 절강, 복건 三省에서 등장한 경우를 일컫는다. 이들은 山區에 나무로 집을 지어 이곳의 토지, 광산, 목재 등의 자원을 이용해서 농업과 수공업에 종사했다. 이러한 붕민은 앞에서 살펴본 휘주부 이현의 예에서도 알 수 있듯이 청대 휘주부에서도 나타났다. 휘주부에서 붕민이 성행했던 것은 이 지역이 그 어떤 곳보다 경작지가 적고 산지가 많은 지리적인 특징 때문이었다. 흡현, 휴령, 이현 등 휘주부의 절반 행정 구역을 포함하고 있는 황산지역은 붕민들이 똬리를 틀기에 적합했다.

붕민들은 산지 개발을 통해 생계를 유지한다는 점에서 생태환경에 적지 않은 악영향을 주었다. 물론 이곳의 붕민들 중에는 산림경영을 위해 이주한 사람도 있겠지만 생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이주한 사람도 있을 것이다. 휘주부처럼 전형적인 山區에서는 부득이하게 이주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따라서 붕민들이 황산의 환경변화에 악영향을 준 주범일지라도, 먹는 문제에 급급할 수밖에 없었던 대부분의 붕민들에게 생태환경에 대한 높은 인식을 기대하기란 어려울 것이다. 더욱이 휘주의 붕민이 반드시 본고장 출신만이 아니라 절반은 沿海 사람들이었고, 적지 않은 사람이 안휘성 安慶府의 桐城, 潛山, 宿松, 太湖, 六安府의 舒城, 霍山 등지에서 왔다.

산지 개발로 생태환경이 악화된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것은 결코 어렵지 않다. 문제는 실상을 어떻게 드러내는가에 있다. 붕민이 생태환경에 큰 영향을 주었다면 휘주부의 붕민 수와 개발 규모를 확인하면 그 정도를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청대 전 시기 휘주부의 붕민과 붕수를 확인하는 것은 자료 부족으로 거의 불가능하다. 단지 본고에서는 자료를 확보할 수 있는 가경-도광연간의 경우를 검토하고자 한다. 가경연간 휘주부의 붕민과 붕수는 다음과 같다.

<표3> 가경12년(1807) 휘주부의 棚民과 棚數

縣名

棚民(丁口)

棚數(座)

祁門

休寧

歙縣

績溪

婺源

黟縣

2,365

2,522

1,415

 915

 295

  69

579

395

334

172

 74

  9

합계

8,681

1,563

출처: 道光󰡔徽州府志(1)󰡕권4-2, 「營建志․水利」, 「道憲楊懋恬査禁棚民案稿」, p.42.

표에서 보듯 기문, 휴령, 흡현 등 3현의 붕민이 절대다수를 차지한다. 위의 표에서 보면 기문현의 경우 1붕에 붕민 4, 휴령현은 1붕에 붕민이 6, 이현의 경우 1붕에 붕민이 7이다. 따라서 휘주부의 경우 1붕에 붕민은 4-7정도임을 알 수 있다. 붕옥은 대부분 山野의 후미진 공터에 자리 잡았다. 이러한 붕민은 가경연간뿐만 아니라 도광시기에도 절강, 강소와 마찬가지로 만연했다. 도광시기 棚民과 棚頭는 다음과 같다.

<표4> 도광 5년(1825) 휘주부의 棚民과 棚頭 

縣名

棚民(戶)

棚두(名)

祁門

休寧

歙縣

績溪

黟縣

432

231

156

 12

 10

24

13

17

 0

 1

합계

841

55

출처: 陶澍, 󰡔陶文毅公全集󰡕권26, 「奏疏」, 「査辦皖省棚民編設保甲附片」, p.5.

도광시기의 붕민 수도 가경시기와 큰 차이가 없다. 단지 도광시기에는 붕민의 우두머리를 의미하는 붕두가 눈에 띈다.


휴령과 흡현은 모두 황산 지역이다. 이처럼 휘주부의 붕민은 대부분 황산을 중심으로 거주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붕민의 수가 많은 지역은 棚民과 지역민간의 갈등도 많았다. 붕민이 적은 이현과 무원은 지역민간의 갈등이 거의 없었다. 양가간의 갈등은 붕민들이 산을 개간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여러 가지 문제 때문이었다. 예컨대 붕민들의 무분별한 산지 개발은 돌이 떨어져 수로를 막거나 분묘를 훼손하는 등 지역민들에게 적지 않은 피해를 주었다. 붕민들이 일으킨 이러한 문제는 각 지역사회의 농민은 물론 신사들의 불만을 불러일으켰고, 때론 이 문제가 지역의 주요 문제로 등장했다. 청 중기 이 지역의 붕민 추방운동은 붕민들이 일으킨 피해가 지역민들의 인내가 극에 달했음을 증명한다. 특히 명청시대에 중국에서도 종족조직이 아주 발달했던 휘주부의 종족은 물론 鄕族, 신사, 관청 등이 조직적으로 붕민들의 축출에 힘썼다.


붕민에 대한 저지 운동은 역으로 붕민이 이 지역의 생태환경에 미친 악영향을 시사한다. 휘주부 붕민들이 생태환경에 미친 악영향은 그들의 경제활동 내용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입장에 따라 피해의식도 다르겠지만 휘주부의 종족들은 붕민의 피해를 전쟁보다 심한 것으로 인식했다. 붕민들은 山主와 함께 山林을 경영하고, 혹 산을 빌려 숯을 만들고, 혹 옥수수를 비롯한 잡곡을 심고, 혹 靑靛과 생강 등 경제 작물을 심었다. 특히 외래 붕민들은 유목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오로지 원시적인 방법으로 벌목한 후 눈앞의 이익만 생각할 뿐, 자신들의 행위로 발행한 문제에 대해서는 염두에 두지 않았다.


붕민들의 무분별한 산지 개발은 곧 산사태와 홍수로 이어졌다. 건륭 54년(1789) 휘주부의 홍수와 경작지 피해는 대부분 붕민의 산지 개발 때문이었다. 적계현에서는 건륭연간에 안휘성 安慶府 사람들이 苞蘆를 가져와 많은 이익을 얻었다. 이에 토착인도 포로를 심기 위해 반드시 산에 불을 질러 땅을 파고 지력을 다 사용하기 위해 풀 한포기 남기지 않았다. 이 때문에 산은 민둥산으로 변했으며. 경작지도 피해를 입었다. 이런 상황에서 비가 오면 모래와 돌이 굴러내려 비가 그치면 水源이 고갈되어 경작할 수 없는 곳이 생겼다. 이런 과정이 계속되면 계곡은 모래와 돌려 막혀 농사에 막대한 지장을 주었다. 특히 적계현처럼 산이 많고 전이 적은 곳에서는 이러한 피해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이러한 현상은 기문현에서도 발생했다. 기문현에서는 붕민들이 개간한 후 沙土가 흘러내려 河道가 날로 높아져 배가 다닐 수 없었다. 따라서 당시 기문현의 근심은 물방아에 있었던 게 아니라 산의 개간에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당시 휘주부의 신사 중 한 사람인 왕매정이 붕민의 존재 자체를 강하게 성토하고 있는 모습은 결코 이상할 게 없다.


휘주부 붕민들의 생태 환경에 대한 도전이 설령 생계를 위한 것이었더라도 다른 사람들의 생계에까지 피해를 주었다면, 그러한 도전은 피해민들의 또 다른 도전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붕민들 만큼이나 당시 그들도 붕민들의 경제활동으로 생계의 위협을 받기 때문이다. 나아가 지역의 안정과 국가의 안위를 책임지고 있는 지방정부에서도 적절한 대책을 강구하지 않으면 자신의 지위조차 유지할 수 없었다. 지방정부에서 붕민의 산림훼손을 심각하게 받아들인 것은 휘주부 붕민들의 활동이 단순히 지역문제를 넘어 국가의 문제로 여길 만큼 중대한 문제였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이 문제가 지방관의 주요한 임무였기 때문이었다. 청조는 인구의 증가로 주요 삼림지구가 동북과 서남에 집중되자 여러 가지 임업정책을 실시하지 않을 수 없었다. 휘주부 지방관의 붕민에 대한 조치도 청조의 이러한 임업 정책의 일환이었다. 지방정부와 지역 유지들은 붕민들이 생태환경에 심각한 악영향을 초래하자, 붕민들을 축출한 후 생태환경을 유지하는 방법을 찾았다. 그들은 지역민들에게 붕민들이 심었던 포로 대신 과수 혹은 차나무 등을 심도록 권했다. 아울러 그들은 대나무를 심어 수익을 올릴 것을 권하기도 했다. 이러한 시도는 최소한 약탈적인 산지 개발을 포기하고, 조림을 통해 홍수를 방지하려는 것이다. 이는 약탈적인 산지 개발이 지역민의 삶에 결코 유리하지 않다는 사실을 확인한 후 얻는 생태환경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기도 했다.

맺음말

최근 세계 각국의 생태환경에 대한 지대한 관심은 인류 역사의 반성이자 삶의 질에 대한 강한 욕구이다. 그 어느 때보다 인류는 생태 환경의 보존과 개발을 둘러싼 갈등으로 고민하고 있다. 때론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근현대사회의 생태환경의 악화를 근대 과학의 발달 혹은 서구 문명의 폐해로 해석한다. 그러나 생태환경의 보존의 개발 문제는 결코 근현대사회에 갑자기 등장한 문제도 아니고, 과학의 발달과 서구 문명의 폐해도 아니다. 생태환경의 보존과 갈등은 인류 역사의 시작과 함께 등장한 문제였다. 다만 현재 인류가 생태환경을 한층 중시하는 것은 과거보다 생태환경이 심각하게 악화되어서가 아니라 삶의 질에 대한 욕구가 과거보다 훨씬 강하기 때문이다. 물론 생명체의 종은 현재가 과거보다 많이 줄었지만, 전체적인 생태환경이 반드시 현재가 과거보다 악화되었을지는 의문이다. 특히 근대과학의 발달은 과거보다 생태환경 보존에 크게 기여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그럴 가능성은 훨씬 높다.


생태환경을 둘러싼 갈등은 세계 어느 곳에서든 발생했겠지만, 중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생태환경에 대한 갈등의 정도는 결국 이 부분에 대한 각국민의 인식에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아울러 생태환경에 대한 각국민의 인식은 생존 조건의 차이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근대이전시기 중국민의 주요한 생존 조건은 평야의 곡물 경작지였다. 평야의 곡물 경작지가 인간의 생존을 충분히 보장할 경우 생태환경은 크게 악화할 가능성이 높지 않다. 생태환경이 크게 위협받는 경우는 평야의 곡물 경작지가 지역민의 생존을 보장하지 못할 때 발생한다. 중국의 경우 그 어느 때보다 청대에 생태환경이 크게 위협받았던 것도 평야의 곡물경작의 부족 때문이었다. 물론 생태환경의 상황은 광활한 영토를 중국에서는 지역에 따라 큰 차이가 있다. 예컨대 강남지역은 송대부터 생태환경이 크게 위협받고 있었다.


청대 생태환경이 크게 위협받았던 이유는 무엇보다도 급격한 인구증가와 곡물 경작지의 부족 때문이었다. 본고에서 살펴본 청대 안휘성 휘주부도 중국 대부분 지역과 마찬가지로 인구가 급증했다. 특히 곡물 경작지가 부족했던 휘주부의 경우 급격한 인구 증가는 이 지역민들의 생존을 크게 위협했다. 그러나 평야의 곡물 경작지는 더 이상 늘어날 수 없었다. 따라서 이곳 사람들이 생존할 수 있는 방법은 평야외의 지역을 찾거나 장사하는 것이었다. 휘주부 사람들은 산지가 많은 탓에 인구가 급격하게 증가하기 전부터 산에 적지 않게 의지했지만, 인구의 급격한 증가로 한층 산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였다. 따라서 청대 휘주부의 산지는 이전보다 빠른 속도로 개발되기 시작했다. 휘주부 사람들이 명청대에 이른바 휘주상인으로 크게 이름을 떨친 것도 바로 인구 증가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었다.


휘주부의 산지 개발은 휘주부 토착민들만이 아니라 휘주부 밖에서 이주한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휘주부 산지 개발에는 멀리 동남 연안지역 사람들, 가깝게는 휘주부 인근 지역 사람들이 참여했다. 다른 지역 사람들이 휘주부로 이주한 이유도 대부분 그 지역의 인구 증가 때문이었고, 산구지역이었던 휘주부가 생존하기에 적합했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각자의 입장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산지를 개발했다. 어떤 사람은 탄광을, 어떤 사람은 火田을, 어떤 사람은 목재를 얻기 위해 산지를 개발했다. 그러나 개발형태는 달랐지만, 그 결과는 대부분 생태환경의 파괴로 나타났다. 더욱이 흡현, 휴령, 이현 등 휘주부의 산지의 절반이 황산을 둘러싼 곳이었다. 이런 이유로 황산은 일찍부터 생태환경을 위협받고 있었다. 명청시대 휘주부의 나무들은 강남으로 수출되었다. 청초 석도와 원매 등은 황산의 생태환경이 적잖이 위협받았다는 사실을 고발하고 있다. 특히 황산을 직접 올랐던 석도와 원매 일행은 황산을 상징하는 소나무가 청초에 상당 부분 훼손되었다는 사실을 증언하고 있다. 물룬 화가와 시인의 눈으로 본 황산의 모습이지만, 황산은 청대의 급격한 인구 증가로 크게 위협받고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청대 강남의 경제 성장과 도시 발달, 나아가 상품 경제의 발달과 문화생활의 변화는 다양한 취미 생활을 낳았다. 소나무 분재도 다양한 취미 생활 중 하나였으며, 황산의 소나무, 이른바 황산송은 분재 취미 생활자들이 가장 선호한 나무였다. 이런 상황에서 황산송의 수난은 피할 수 없었다.


청정부나 휘주부 관리들이 산지 개발을 결코 묵과하지 않았다. 전쟁이나 특정 시대에 생태환경을 앞장서 위협한 경우를 제외하면, 어느 시대 정권이든 생태환경을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다. 청조와 각 지방 정부도 나름대로 생태환경의 위협에 대응했다. 청조는 인구의 증가로 각 지역의 생태환경이 심각하게 위협받자 지방 정부에게 생태환경 보호를 적극 독려하는 법을 제정했다. 지방정부는 비석을 통해 무분별한 산지개발의 위험성을 홍보함과 동시에 불법 산지개발자를 처벌하기도 했다. 산지개발로 피해를 입고 있었던 휘주부의 종족집단이나 신사, 그리고 지역민들도 산지개발자인 붕민들의 ‘도발’에 집단적으로 대처했다. 지방정부와 지역민들의 이러한 적극적인 공동 대처는 한편으로 붕민들의 산지개발이 아주 위험한 수준이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고, 다른 한편 청대 휘주부 사람들의 생존경쟁이 그만큼 치열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아울러 휘주부의 지방정부는 그 결과는 가늠할 수 없지만 산지 개발의 폐해를 조림으로 극복하려는 노력도 기울이기도 했다.


황산의 생태환경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이후에도 결코 안전하지 않았다. 황산은 최근에서야 정부차원의 적극적인 보호를 받고 있다. 황산의 생태환경이 위협받은 지 거의 300여년만의 일이다. 이처럼 황산이 최근에서야 중국 정부차원의 보호를 받고 있는 것은 대한민국이 산업사회로 바뀐 뒤에야 민둥산을 푸른 산으로 변한 것처럼, 중국의 경제성장과 과학기술의 발달 덕분이다. 이런 점에서 황산에 대한 관심은 단순히 유명한 산에 대한 관심을 넘어 중국사의 흐름을 읽을 수 있는 하나의 기준일 수도 있다. 숲은 역사 이해의 바로미터이다.

<논문제공: 강판권 계명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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