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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속의 한국지성<25> 김재권 / 브라운대·철학
세계 속의 한국지성<25> 김재권 / 브라운대·철학
  • 교수신문
  • 승인 2001.08.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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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08-13 15:35:06
김재권 교수는 1934년 대구 출생으로 서울대 불문과 재학 중 도미, 1958년 다트머스 대학에서 철학석사학위를 취득하고 1962년 프린스턴대에서 과학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코넬대, 미시건대, 존스홉킨스대를 거쳐 브라운대학 철학과에서 석좌교수를 맡고 있다. 현재는 서울대 철학과 방문교수로 강의 중이다. 저서로는 국역본 ‘수반과 심리철학’(철학과현실사 刊, 1994), ‘심리철학’ (철학과현실사 刊, 1997), ‘물리계 안에서의 마음’(철학과현실사 刊, 1999)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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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5년 8월의 햇살 내리쬐던 어느 날, 나는 여의도 공항에서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당시만 해도 오랜 기간 고국땅을 밟지 못하게 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68년 부모님을 뵙기 위해 들렀던 것도 잠시, 84년 풀브라이트 교환교수 자격으로 서울대를 방문하게 되기까지 나는 16년의 세월을 기다려야만 했다.
나는 서울대 불문학과 2학년 겨울학기를 마치고 미국으로 건너갔다. 당시 미국이라는 나라는 내 계획에 포함돼 있지 않았다. 나는 프랑스로 건너가 작가로 데뷔하는 행운아가 되기를 꿈꾸고 있었는데, 우연히 서울대에서 선발한 장학생에 선정돼 미국에서 공부하게 되었을 뿐이었다. 나는 관광 삼아 미국에서 1년 정도 지내다 프랑스로 떠나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미국이라는 나라에서 시간을 보낸다는 것에 아무런 기대나 욕심도 없었을 뿐 아니라, 거기서 내 학문 인생의 전부를 보내리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것이다. 어쨌든 여러 우여곡절 끝에 나는 해외에서 학자로서의 오랜 삶을 살게 된 셈이며, 이 역시 내가 애초에 계획했던 것이 아니었다. 내 인생이 이렇게 엮인 부분적인 이유란, 뉴햄프셔 주에 있는 다트머스 대학에서 공부를 시작할 무렵 전공을 불문학에서 철학(철학, 수학, 불문학 합동과정)으로 바꾸었기 때문인 듯하다. 나는 58년 다트머스 대학을 졸업하고 62년에는 프린스턴 대학에서 철학박사학위를 받았다. 실상 학위과정은 61년에 끝났기 때문에 필라델피아 근교에 있는 소수정예 인문학 단과대인 스와트모어 대학에서 전임으로 철학을 가르치게 됐다. 미국에 오기 전 한국에서 철학을 공부하지 않았기 때문에 어떤 방식으로든 한국에 있는 철학자들과 만난 적이 없었다. 내가 그들을 몰랐을 뿐 아니라 그들도 나를 알지 못했다. 나의 학문적 ‘해외망명’은 이런 상황에서 피할 수 없는 결과였던 것이다. 한국철학자들과 교류가 시작된 것은 내 연구결과물이 출판되고 비교적 널리 알려지면서부터였다. 많은 이들이 유럽과 미국에서 내가 공부했던 철학을 연구해 박사학위를 받았다. 나로선 그들과 학술적인 관계 뿐 아니라 개인적으로도 친해질 수 있게 된 것이 기뻤다.

우연히 입문한 철학, 그리고 미국

스와트모어에서 2년을 보낸 후 나는 브라운 대학의 조교수직을 수락했는데 이 때가 70년이었다. 하지만 코넬대에서 세 학기만 보낸 후 71년 미시건대학에 정교수로 돌아왔다. 이후 나는 87년 브라운 대학 주임교수가 되기 전까지 존스홉킨스대에서 보냈던 1년을 제외하고는 줄곧 미시건에 있었다. 88년 나는 미국철학회 본부 회장직에 취임했고, 91년에는 미국학술원 회원으로 선출되는 영광도 누렸다.
처음 박사논문 주제는 과학철학이었는데 과학적 설명의 본성에 관한 내용이었다. 그런데 60년대 브라운 대학에서 4년을 보내면서 내 관심은 형이상학에서 심리철학으로 옮아가기 시작했다. 미시건대에는 과학철학 전공으로 임용되었지만 형이상학과 정신에 관한 철학강의를 개설했고 내 연구도 70년대 중반부터 이 두 분야에만 한정되기 시작했다.
철학에서 내가 독창적인 기여를 했다고 말할 수 있다면 ‘사건이론(the theory of events)’에 관해 연구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60년대부터 나는 존재론적인 범주로서 사건의 형이상학적 본성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당시 이 문제를 철학적으로 인식하지 않았으며, 연구하는 학자들도 없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나는 이 새로운 분야의 연구가 너무도 흥미로웠지만 그것이 철학적인 주제로 적합한지 확신할 수 없을 뿐더러 사실 회의적이기까지 했다. 그 때 나는 이제 대학원을 마친 겨우 서른살의 햇병아리 철학자였던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도 사건의 본성은 형이상학과 언어철학에서 중심 주제 중 하나로 곧이어 자리잡아 수많은 철학자들이 연구하기 시작했다. 나의 사건이론은 ‘속성예화이론’이라고 명명되었고 세계적 석학인 도날드 데이비슨의 이론과 함께 사건이론에서 두 가지 주요한 흐름으로 인정받기에 이르렀다. 사건이라는 주제는 인과성과 분리될 수 없기 때문에 나는 60년대와 70년대 초반 인과관계에 관해서도 연구했다.

‘사건이론’으로 얻은 세계적 명성

70년대에 나는 ‘수반(supervenience)’이라는 개념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특히 심리철학에서 그 개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리고 적용은 어떻게 가능한지가 중요했다. 당시만 해도 새로운 문제여서 70년대 후반과 80년대 초반에 출간된 내 책은 이 분야에 이후 활발하고 집중적으로 논의된 것의 기본근간이 됐다. 84년에 출간된 내 논문 ‘수반의 개념’은 약수반, 강수반, 총체수반의 개념들을 소개했고, 나는 이들의 관계에 대해 여러 논리적 결론을 증명해낼 수 있었다. 90년 나는 미국 정부연구국인 인문학정부기금에서 지원을 받아 수반이론으로 대학교수들을 위해 하계세미나를 개최했다.
심리철학에서 내 연구는 지난 20여년 동안 심신문제를 맴돌았다. 이는 우리의 정신적 속성이 물리적이고 생물학적인 본성과 어떻게 관련돼 있는지에 관한 문제였다. 나는 이 분야에서 심리철학을 연구하는 대부분의 철학자들이 인정하는 지배적인 정설, 즉 ‘비환원적 물리주의’라는 견해와 오랫동안 논쟁을 벌였다. 나는 진정한 물리주의자는 환원주의와 제거주의 두 가지 선택밖에 할 수 없을 것이며 반환원주의는 선택사항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해왔다. 이 분야에 관해 가장 잘 알려진 내 논문으로는 ‘비환원적인 유물론(materialism)의 신화’로 89년 미국철학회에서 기조발제한 글이 있다. 나는 내 연구가 현재 비환원적인 물리주의의 숲에서 발견되는 균열들과 연관된다고 생각한다. 영국의 주간지 ‘이코노미스트’가 “대세는 김교수에게 기울고 있다”고 언급한 나의 최근작 ‘물리적 세계에서의 정신’에서 나는 비환원적인 물리주의자가 최소한 수세적 입장을 취하게 하는데 성공했다고 생각한다.
심신 문제에 관한 내 연구의 중심적인 부분은 정신의 인과관계에 초점이 맞추어졌다. 어떻게 우리의 정신이 물리적 세계의 대상과 사건들에 영향을 줄 수 있는가를 설명하는 문제가 그것이다. 내가 제기해 지난 10년간 정신의 인과에 관한 논쟁에서 주요역할을 했던 중요한 생각은 ‘인과적/설명적 배제’이다. 간단히 말하면 이는 어떤 주어진 현상에 대한 어떠한 설명/인과관계도 그것에 대한 다른 가능한 설명/인과관계를 배제한다는 것이다. 이는 심신의 경우에 다음과 같이 적용된다. 널리 인정되듯이 모든 물리적인 사건은 물리적인 설명/인과관계를 가지고 있으며 물리적인 사건에 대한 어떤 심리적인 설명/인과관계도 가능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 명백한 사실을 다루는 방식이 심리철학에 있어 중심적인 문제들 중 하나다.
오는 10, 11월에 연속강연을 할 계획이다. 전체 제목은 ‘물리주의를 극한까지 끌고가면서’이다. 이 강의에서 나는 물리주의가 우리에게 얼마나 만족할만한 세계관을 제공하는지를 논의할 생각이다. 거칠게 말하면 내 결론은, 비록 물리주의가 엄밀히 말하면 잘못된 것이라 하더라도 세계에 대한 완벽한 설명이란 없으며 결국엔 물리주의적 관점을 지니는 것 이상의 대안은 없다는 것이 될 것이다.
나는 해외에서의 학문여정을 돌아볼 때마다 내가 몹시도 행운아였다는 사실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내가 말했듯이 비록 미국에서 공부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은 아니었고 대학 자체도 내 선택은 아니었지만, 미국의 상위권 대학인 다트머스에서 공부했다는 것은 행운이었다. 미국에서 첫해는 꽤나 열심히 공부해야 했다. 한 학기 동안 내 영어실력은 학교공부에 아무런 지장이 없을 만큼 향상되었고 언어에 아무런 불편을 느끼지 않게 됐다. 그 첫해 이후 내게 특별한 어려움은 없었던 것 같다. 내가 한국인이라는 사실이나 언어의 문제 모두에서 그랬다. 어려움이라 한다면 다른 모든 학생들이 겪는 그런 어려움이었으리라.

돌아보면 순탄했던 삶과 학문여정

나는 내 직업에 있어서도 행운아였다고 생각한다. 처음부터 스와트모어 대학이라는 좋은 직장을 얻을 수 있었으며 그 뒤로도 계속해서 우수한 학교에서 연구하고 가르칠 수 있었다. 내 연구 또한 미국을 비롯한 다른 나라의 철학자들에게 잘 수용됐고 책과 논문은 한국어 뿐 아니라 독일어, 이태리어, 스페인어, 프랑스어로도 번역됐다. 내가 연구해온 주제의 선택에서도 행운이 작용한 것 같다. 나는 대부분의 아시아 출신 학생들이 겪어야했던 인종적 편견이나 부당한 대우를 받은 적이 없다. 이 만큼 나의 행운을 증명해주는 것이 또 있을까. 한국에서 강의할 수 있는 기회를 다시 한번 갖게 된 것도 행운이다. 내게 친절했던 많은 철학자들, 그들에게 깊이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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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본 김재권

유연함과 일관성 겸비한 석학

김재권 교수는 형이상학 분야에서 세계적인 철학자이다. 그가 지금까지 발표한 많은 논문들은 여러번 그 분야에 관한 철학계의 흐름을 바꾸어 놓을 만큼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심리철학에서 김재권 교수에 의해 최근에 뜨거운 쟁점으로 떠오른 정신 인과의 문제를 주제로 박사학위 논문을 쓰려는 나에게, 선생은 1992년부터 1994년까지 2년 간 브라운대학교 철학과에 방문학자로 체류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그 기간동안 그로부터 얻은 도움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 수업과 세미나에 참석할 수 있었던 것을 비롯해 브라운대학에서의 연구활동에 관한 모든 편의를 제공받을 수 있었고, 외국에서의 익숙하지 못한 생활에까지도 세심한 도움을 받았다.
그러나 역시 가장 큰 도움은 그 분야의 세계적인 대가인 그로부터 늘 든든한 가르침을 받을 수 있었다는 점이다. 그는 항상 분주함에도 불구하고 언제든지 방문하여 질문하고 대화할 수 있도록 배려했으며, 논문을 써서 보일 때마다 상세한 논평의 글로 답했다. 사실 선생과 나는 출발하는 전제가 조금 다르기 때문에 내 논문에서는 그의 입장과 조금 다른 결론이 도출될 수밖에 없었고, 어떤 부분에서는 그의 입장에 대해 비판적인 논의도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 선생은 그에 대해 당신의 입장을 바탕으로 한 비판적 논평과 함께, 나의 입장을 생산적으로 살릴 수 있는 여러 중요한 조언도 아끼지 않았다. 그런 조언과 함께 선생은 다른 철학자에 대한 정확한 해석보다 자신의 독창적인 입장을 발전시키는 데에 힘쓰라고 늘 권면했고, 그 가르침이 지금까지도 내가 공부하고 생각하는 데에 큰 방향이 되고 있다.
그의 학문적인 도움으로 미국에서의 2년 동안 나는 한 가지 철학 주제에 몰입하여 연구하고 자기 생각을 발전시켜 보는 것이 얼마나 즐거울 수 있는가를 경험하였으며, 철학 공부의 깊은 맛과 진한 재미를 느낄 수 있었다. 이러한 경험은 나의 삶에 좋은 의미의 큰 변화를 가져다주었으며, 앞으로도 늘 흥미를 가지고 기쁘게 나의 학업을 정진시킬 수 있는 바탕이 될 것이다.
심신 환원주의를 옹호하는 선생의 입장은 지나치게 강한 물리주의의 입장일 수 있다. 하지만 최근에 그는 여러 주목받는 논문들을 통해 지금까지 심리철학의 주류 입장을 이루어 왔다고 할 수 있는 약한 물리주의(비환원적 물리주의)가 갖고 있는 심각한 형이상학적인 문제점들을 설득력있게 제시했고, 그것은 많은 유력한 철학자들로 하여금 자신의 입장을 다시 생각해 보도록 하는 계기가 되었다. 선생의 강한 입장이 모든 상반되는 견해들을 전부 충족시킬 수는 없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여러 견해들을 최대한 고려하면서도 가장 포괄적으로 일관성을 유지할 수 있는 최선의 입장을 발전시키는 것을 추구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번 한 학기 동안 김재권 교수가 서울에 머무르면서 강의하게 된 것은 한국 철학계의 발전에 좋은 기회가 될 것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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