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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세 철학, 근대를 다시 묻는다
인류세 철학, 근대를 다시 묻는다
  • 조성환
  • 승인 2023.04.04 08:3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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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자가 본 인류세_ 조성환 원광대 교수

교수신문이 마련한 ‘과학자·인문학자가 본 인류세’ 시리즈로 조성환 원광대 동북아시아인문사회연구소 교수의 글을 싣는다. 조 교수는 산업혁명 이전과 이후의 인간관이 질적으로 달라졌다고 주장했다. 인간이 자연의 질서를 바꾸는 ‘지질학적 존재’가 됐다는 것이다. 그 원인은 자연, 즉 하늘에 대한 외경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조 교수는 수운 최제우, 해월 최시형, 혜강 최한기의 사람·자연물·하늘에 대한 공경의 철학을 강조했다.

‘지질학적 행위자’ 인간, 자연의 질서를 바꾸다

산업혁명 이래의 인류 역사는 ‘근대’라는 미명 하에 인간 이성의 승리의 역사로 찬양돼 왔다. 그런데 ‘기후변화’라는 지구적 위기가 이러한 자화자찬에 제동을 걸고 있다. 기후위기의 원인이 산업혁명으로 지목되고 있기 때문이다. 과학자들에 의하면, 산업혁명에 의한 기술과 도구의 발달이 역설적으로 지구시스템을 변화시켜 이상기후를 일으키게 됐다고 한다. 폴 크루첸(1933~2021)과 같은 대기화학자는 이러한 시대를 ‘인류세(anthropocene)’라고 명명했다.

 

왼쪽부터 과학사가인 나오미 오레스키스 미국 하버드대 겸임교수, 디페시 차크라바르티 시카고대 석좌교수이다. 이들은 인류가 화석 연료 사용함으로써 자연으로부터 자유로워지며 지질학적 행위자가 됐다고 주장했다. 사진=위키피디아

간단히 말해서 인류세(人類世)는 인간의 산업 활동이 기후변화를 일으킨 시대를 의미한다. 그래서 산업혁명 이후의 인간관은 그 이전의 인간관과 질적으로 달라졌다.인간이 지구의 질서를 바꾸는 존재가 되었기 때문이다.

과학사가인 나오미 오레스키스 미국 하버드대 겸임교수는 이렇게 달라진 인간의 위상을 ‘지질학적 행위자’라고 명명하였다.

그토록 많은 나무를 자르고 그토록 많은 화석연료를 태우는 사람이 엄청나게 늘어나면서 이제 우리는 지질학적 행위자(geological agents)가 되었다. (나오미 오레스키스, 「The Scientific Consensus on Climate Change」, 2007)

지질학적 행위자로서의 인간은 인간과 자연을 구분해서 보았던 종래의 서구 근대적 인간관을 거부한다. 인간이 자연의 영역에 침투해서 자연의 질서를 교란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인간은 자연의 일부이고, 따라서 자연의 질서에 순응해서 살아야 한다는 동아시아의 전통적 인간관을 구가할 수도 없다. 인간이 자연의 질서 자체를 바꾸는 존재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류세는 동아시아적 개념으로 말하면, 천인분리도 아니고 천인합일도 아닌 천인융합·천인착종의 시대이다. 이러한 천인관의 변화를 인류세 철학의 선구자인 미국의 디페시 차크라바르티 시카고대 석좌교수는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인간이 기후변화를 유발했다는 설명은 자연의 역사와 인류의 역사를 구분하는 오랜 인문학의 근거를 무너뜨린다. (『역사의 기후: 네 가지 테제』, 『지구사의 도전』, 조지형 외 10인 지음, 355쪽)

나아가서 차크라바르티는 산업혁명 이래로 인류가 누려왔던 자유는 화석연료에 의존한 ‘의존적 자유’였다고 지적했다.

근대적 자유라는 대저택은 화석연료의 지속적 이용이라는 기초 위에 서 있다. 이제까지 우리가 누리는 자유의 대부분은 에너지 집약적이다. 그런데 계몽주의 이래로 자유에 대한 어떠한 논의에서도, 인간이 자유를 획득하는 과정은 동시에 지질학적 행위자가 되는 과정이라는 자각이 들어서지 못했다.(위의 책, 365쪽)

계몽주의로 대표되는 서구 근대적 세계관은 인간과 자연을 서로 다른 법칙이 작동하는 두 세계로 간주했다. 인간은 자유의지가 있어서 도덕적 입법자가 될 수 있는 반면에, 자연은 자연법칙에 의해 결정돼 있다고 본 것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자유론에서는 인간의 자유가 자연에 의존해 있다는 발상이 나오기 어렵다.

가령 오늘날 우리가 비행기를 타고 공간을 이동하거나 에어컨을 켜서 온도를 바꾸는 행위는 모두 화석연료에 의존해 있다. 그런 점에서 근대인들이 누린 ‘기술적 자유’는 자연을 소비해서 얻은 ‘자연 의존적 자유’인 셈이다. 이것은 뒤집어 말하면 자연이 고갈되면 인간이 지금과 같은 자유를 누릴 수 없음을 의미한다. 결국 문제는 인간이 자연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로 귀결된다. 그래서 차크라바르티는 이에 대한 윤리적 처방으로 근대인들이 상실한 ‘자연에 대한 외경’의 감각을 회복할 것을 주장한다.

17세~18세기의 유럽사상가들은 인간의 지위를 지나치게 과신하였다. 19세기~20세기의 근대화의 물결에서, 전기와 기술의 결합으로 그리고 도시와 인구의 증가로, 인간들은 다른 생명체들과 자신들에게 주어진 것에 대한 두려움의 감각을, 그리고 외경의 감각을 극복하였다. 근대가 된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두려움을 극복하는 것이다. (…) 행성은 우리에게 두려움을 극복하려는 충동이 (…) 손실이었음을 상기시켜 준다. (…) 행성은 인간에게 경이로우면서도 두렵다. 사람들이 말하는 ‘지구윤리(Earth ethic)’를 발전시키려면, 놀람과 외경이 결합된 길을 찾을 필요가 있다. (디페시 차크라바르티, 「The Planet: An Emergent Matter of Spiritual Concern?」, 2019)

차크라바르티의 진단을 동아시아철학 개념으로 바꿔 말하면, 근대의 본질은 ‘경천의 상실’에 있다는 말에 다름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19세기에 동학을 창시한 수운 최제우(1824~1864)의 『동경대전』에 나오는 “요즘 사람들은 하늘님을 공경하지 않는다(不敬天主)”라는 문제 제기를 연상시킨다. 이에 대해 최제우의 뒤를 이은 해월 최시형(1827~1898)은 하늘과 사람과 사물에 대한 외경을 말하는 삼경(三敬) 사상을 설파했다. 사람은 물론이고 자연물까지도 공경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 더해서 동시대의 실학자 혜강 최한기(1803~1877)는 인간과 자연 그리고 도구를 모두 ‘활동하는 기화적 존재’로 규정했다. 기화란 기후변화와 같은 대기의 변화를 일으킨다는 뜻이고, ‘활동’이란 인간과 자연 그리고 도구가 모두 그와 같은 기후변화를 일으키는 지질학적 행위자라는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기학과 동학은 인류세 시대에 주목할 만한 한국철학의 존재론이자 윤리학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성환
원광대 동북아시아인문사회연구소 교수
서강대 수학과를 졸업하고 와세다대학에서 석사, 서강대에서 한국철학으로 박사를 했다. 주요 저서로 『한국 근대의 탄생: 개화에서 개벽으로』, 『하늘을 그리는 사람들: 퇴계・다산・동학의 하늘철학』, 『키워드로 읽는 한국철학』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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