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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외 '과학 전쟁'(Science Wars)에 대한 해부
국내외 '과학 전쟁'(Science Wars)에 대한 해부
  • 교수신문
  • 승인 2006.08.10 2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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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의 권위와 그 비판자들

2001년 09월 19일 | 글 | 홍성욱/캐나다 토론토대학 과학기술사 교수ㆍsungook@chass.utoronto.ca |

이 글은, 결론 만 제외하곤, 『한국과학사학회지』1997년 12월호에 실린 같은 "'누가 과학을 두려워하는가': 최근 '과학 전쟁'(Science Wars)의 배경과 그 논쟁점에 대한 비판적 고찰"이란 제목의 필자의 긴 논문을 1/3로 축약한 것이다. 이 글에서 각주는 모두 생략했다. 보다 자세한 논의와 참고문헌은 『한국과학사학회지』에 실린 논문을 참조하기 바란다.

"과학전쟁"(Science War)은 최근 몇 년간 북미와 유럽의 과학자와 인문학자 사이에서 화제와 논쟁의 대상이었다. "소칼의 날조"(Sokal's Hoax)와 과학전쟁에 대한 기사가 뉴욕타임스, 디 차이트, 르 몽드지와 같은 영향력 있는 신문은 물론, 사이언스(Science)와 네이쳐(Nature)같은 전문 과학학술지에 게재되었고, 1996년 가을 독일 빌레펠트에서 열린 유럽과학기술사회학회에선 과학전쟁이 학자들 사이의 규범을 어기고 서로를 헐뜯는 식으로 진행되고 있음을 개탄한 성명서가 채택되기도 했다. 과학전쟁이 주로 과학자와 인문학자들 사이에 진행되고 있기에, 많은 지식인들은 이것이 스노우(C.P. Snow)가 30년 전에 지적한 과학과 인문학의 "두 문화"(Two Cultures) 사이의 간극을 넓힐 뿐만 아니라, 이 관계를 적대적인 것으로 만들 수 있다고 우려하고 있다. 올해 국내에서도 과학사회학자와 물리학자 사이에 과학의 사회성과 객관성을 두고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 글은 "과학전쟁"에서 나타난 중요한 논쟁점들을 분석적, 비판적으로 고찰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있다. 필자는 먼저 사회구성주의 과학사회학의 기본 주장을 간단히 살펴보고, 과학전쟁의 주요한 사건과 이슈들을 정리한 뒤에, 과학전쟁의 주요 논쟁점들을 세 가지로 분류한 후 각각에 대한 비판적이고 분석적인 평가를 시도할 것이다. 결론에선 국내에서 벌어진 논쟁에 대해 간단히 언급하겠다.

과학전쟁의 전사(前史): 사회구성주의와 그 비판자들
"자연과학은 얼마나 확실하고, 객관적이고, 보편적인가?" 이 질문에 대한 한가지 답은 과학이 확실하고, 객관적이며, 보편적인 진리라는 것이다. 뉴튼의 만유인력 법칙은 지구에서도, 달에서도, 화성에서도 참이고 300년 전의 영국에서 참이듯 1997년의 한국에서도 참이다. 이러한 예에서 과학은 과학자라는 인간이 만든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만들어진 사회적て국소적 맥락(social and local context)은 물론, 그것을 만든 과학자를 초월해서 순수하게 자연적이고,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것으로 부각된다.

그렇지만 과학이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진리라는 주장에 동의하는 사람도 "역사적으로" "모든" 과학이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진리라는 주장에는 선뜻 고개를 끄덕이기 힘들다. 무엇보다 한 시기의 과학 지식이 자연에 대한 객관적, 보편적 진리라면 과학의 진보를 설명하기가 쉽지 않다. 19세기 말-20세기 초엽의 많은 물리학자들은 뉴튼물리학이 절대적인 진리이고 이에 근거한 물리학의 체계가 거의 완성되었다고 믿었지만 이후 상대론과 양자물리학의 발전은 이러한 생각이 전혀 근거 없는 것임을 보였다. 다시 말해서 과거의 과학이 진보했고 또 지금도 계속 진보하고 있다는 사실은 거꾸로 과거와 현재의 과학이 불완전한 것임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두 번째로, 과학이 보편적 객관적 진리라면 명백하게 잘못된 과학이 오랫동안 널리 받아들여졌음을 설명하기 어렵다. 예를 들어 19세기 물리학자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우주를 꽉 메우고 있는 "에테르"(ether)의 존재를 믿었지만, 20세기 물리학자중 이를 믿는 사람은 극소수이다. 세 번째로, 과학이 사회와 문화를 초월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과학에도 명백한 사회성과 문화성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18세기 영국의 물리학과 프랑스의 물리학은 뉴튼의 힘(force)을 어떻게 해석하는 가를 놓고 대립했으며, 19세기 후반의 영국과 독일의 전자기학도 그 기본 개념과 테크닉에 있어서 상당히 달랐다.

이런 역사적 예들은 과거의 과학이 불완전했듯이 현재 우리가 참이라고 믿는 과학도 절대적 진리가 아니라 자연의 실재를 한 측면에서 이해한, 실재의 한 모퉁이만을 이해한 불완전한 지식임을 시사한다고 해석될 수 있다. 이렇게 과학을 역사 속에 위치시켰을 때 과학은 과학 교과서에 나오는 객관적, 보편적 이미지와는 상당히 다른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이다. 과학 철학자들은 이러한 이미지를 철학적인 명제로 정교화시켰다. 콰인(Williard V.O. Quine)은 과학의 이론이 실험데이터에 의해 충분히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단지 불충분하게 결정된다는 "불충분결정론"(underdetermination theory)을 설득력 있게 제창했고, 핸슨(R.N. Hanson)은 과학자의 관찰이 객관적인 것이 아니라 그의 이론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는 관찰의 "이론의존성"(theory-ladenness)을 제시했다. 한편, 1962년 토마스 쿤(Thomas Kuhn)의 과학혁명의 구조(The Structure of Scientific Revolutions)는 과학사의 수많은 사례를 통해 과학 지식이 누적적으로 진보한다는 믿음을 더 이상 지탱할 수 없는 것으로 만들었다. 쿤은 한 시대의 과학적 가설, 법칙, 이론, 믿음, 실험의 총체를 패러다임(paradigm)이라고 명명했는데, 그에 의하면 한 패러다임에서 다른 패러다임의 전이는 논리적인 것이 아니라 마치 종교적 개종과 흡사한, 비합리적인 과정이었다. 또 쿤은 이 패러다임의 변환을 통해 새롭게 얻는 것도 있지만 잃어버리는 과학도 많음을 보였으며, 오래된 패러다임과 새 패러다임의 관계를 하나의 잣대로 잴 수 없는 "공약불가능성"(incommensurability)으로 특징 지우면서 패러다임의 전이가 단선적인 "진보"로만 이해될 수 없는 것임을 주장했다.

쿤, 콰인, 핸슨 등의 철학적, 역사적 주장은 1970년대와 80년대에 들어 데이빗 블루어(David Bloor), 배리 반스(Barry Barnes), 데이빗 에지(David Edge), 도날드 맥캔지(Donald McKenzie), 스티븐 쉐이핀(Steven Shapin)등 에딘버러 대학의 과학학 프로그램 멤버와 해리 콜린스(Harry Collins), 트레버 핀치(Trevor Pinch) 등에 의해 사회과학적인 명제로 정리되었다. 실험 데이터가 과학 이론을 충분히 결정하지 못한다는 불충분결정이론은 사회적 이해관계(social interest)가 실험 데이터와 결합해서 이론을 결정한다는 "사회적 결정론"으로 변형되었다. 이에 덧붙여 관찰의 이론의존성은 과학이 객관적, 보편적이 아니라 주관적, 사회적임을 보이는 증거로 원용되고 쿤의 불가공약성은 과학에서의 서로 다른 주장들의 진위가 단지 상대적(relativistic)일 뿐이라는 상대주의의 기초가 되었다. 데이빗 블루어는 과학이론의 발달이 사회적 요소에 의해 인과적으로 설명되어져야 하고, 이 사회적 요소가 성공한 과학과 실패한 과학, 합리적인 과학과 비합리적인 과학을 모두 같은 방식으로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는 급진적인 주장을 폈다. 이렇게 과학의 내용이 사회적 요인에 의해 구성된다는 과학사회학의 주장은 이후 블루어가 명명한 대로 "스트롱프로그램"(Strong Program), 또는 SSK (sociology of scientific knowledge, 과학지식의 사회학), "과학의 사회적 구성론"(social construction of science), "사회구성주의"(social constructionism, social constructivism), "에딘버러 학파"라고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어 지기 시작했고, 이는 유럽과 미국에서 기존의 과학사회학을 빠르게 대체해 나갔다.

과학이 객관적, 보편적인 진리라면 이데올로기, 철학, 종교, 정치て경제て군사적 이해와 같은 사회적 요인이 어떻게 진리의 형성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일까? SSK 과학사회학은 이에 대한 대답을 두 가지 다른 방향에서 찾았다. 하나는 과학의 법칙, 이론이 실험 데이터만으로는 충분히 결정되지 못한다는 "불충분결정론"의 철학적 기반 위에서, 다른 사회적て문화적 요소들이 과학자의 실천, 판단에 개입하면서 과학 연구의 결과가 "안정적인 것으로 됨"(stabilize)을 보이는 것이었다. 과학적 요소와 사회て문화적 요소는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과학자의 일상적인 실천 속에서 비슷비슷한 요소로 과학적 사실을 만들어 내는데 기여하게 된다는 것이다. 두 번째 방향은 진리와 이데올로기, 참된 과학과 오류에 근본적인 차이가 없다고 함으로써 사회て문화와 과학 사이의 경계를 모호하고 불투명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넓은 의미로 과학이 문화의 일부임에 동의해도, 실재론자(realist)들은 과학을 패션과 같은 유행으로만 볼 수 없는 한가지 중요한 이유가 있음을 강조하는데, 그것은 과학이 자연의 "실재"(reality)를 포착하고 기술하고 있다는 것이다. 뉴튼의 물리학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운동이론은 단순히 다른 자연관이 아니라 전자가 후자보다 보다 더 진리에 가까운 것인데, 그 이유는 뉴튼의 물리학이 자연에 존재하지만 보이지 않는 "만유인력"을 정확하게 포착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사회나 문화가 과학의 인식론이나 진리의 발견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회구성주의의 근본 명제는 결국 과학은 자연의 실재를 포착하는 것이라는 실재론의 전제와 매끄럽지 않은 관계에 놓이게 되는데, 몇몇 사회구성주의자들은 이를 해결하기 위해 "반실재론"(anti-realism) 또는 "비실재론"(irrealism)의 입장을 취하게 되었다. 이들은 실재에 대한 과학지식이 자연에 존재하는 무엇을 마치 동전을 줍듯이 발견한 것이 아니라, 그것이 존재한다는 과학자들 사이의 "합의"를 통해 "구성된 것"(constructed)이라고 주장했던 것이다.

1980년대를 통해 브루노 라투어(Bruno Latour)와 앤드류 피커링(Andrew Pickering)이 대표적인 반 실재론자의 진영을 형성했다. 라투어는 스티브 울거(Steve Woolgar)와 함께 저술한 실험실 생활(Laboratory Life, 1979)에서 인류학의 방법론을 원용, 미국의 사크 연구소(Salk Institute)라는 유명한 생물학 연구소에서 일하는 과학자들의 실천을 분석했다. 이 책에서 라투어는 사크 연구소 연구원들이 노벨상을 수상한 TRF라는 호르몬의 발견이 서로 다른 두 연구 팀 사이의 절충(negotiation)과 합의(consensus)에 의해 "구성된 것"이지 콜럼부스가 미국 대륙을 발견하듯 발견한 것이 아님을 주장했다. 피커링은 쿼크의 구성(Constructing Quarks, 1985)에서 물리학자들이 20세기 입자물리학의 최고 개가라고 간주하는 기본 소립자 쿼크(quark)의 발견이 '이것이 있다면 입자물리 이론과 실험에 더할 나위 없이 좋겠다' 라는 입자물리학자들의 기대와 합의가 만들어낸 구성된 "결말"(upshot)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반실재론의 경향은 "과학적 진리는 과학자들이 참이라고 공유한 믿음"이외엔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극단적인 구성주의의 명제의 기초가 되었다.

상대주의적 구성주의, 또는 SSK 과학사회학은 80년대와 90년대를 통해 과학사회학의 가장 영향력 있는 흐름으로 자리잡았다. 그들의 주장에 동의하건 그렇지 않건 간에 사회구성주의 과학사회학의 방법론이 과학과 사회의 상호작용을 새로운 각도에서 보는 참신한 시각을 제공했다는 데는 많은 사람이 동의했다. 무엇보다도 이들의 연구는 과학지식의 절대성의 신화를 깨버림으로써 왜 과학에서 논쟁이 많은가, 왜 과학자들간에도 중요한 이슈들 -- 예를 들어 이산화탄소가 지구 온난화의 주범이라는 -- 에 대해 합의가 어려운가라는 문제를 새롭게 이해하는 시각을 제공했다. 이들은 과학자들이 이러한 논쟁점을 놓고 합의를 만들어 가는 과정에 대한 자세한 분석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절대적으로 믿을 만 하다고 생각하는 과학의 명제, 주장이 사실 그렇게 튼튼하지만은 않은 기반 위에 서있음을 보였던 것이다.

과학전쟁은 1990년대 초엽 이들의 연구를 몇몇 과학자들이 비판하면서 불이 붙었고, 이제 그 본격적인 논쟁에 대해 살펴볼 차례이다.

"과학전쟁" 개괄, 1992-1998
1980년대를 통해 대부분의 과학자들은 사회구성주의 과학사회학, 과학문화학의 연구와 주장을 몰랐거나, 알아도 무관심했거나, 관심이 있어도 그저 침묵으로 일관했었다. 그러나 1990년대에 들어 이 침묵은 오래가지 못했다. 사회구성주의 과학사회학에 대한 과학자의 반론은 영국 런던대학의 생의학 교수인 루이스 월퍼트(Lewis Wolpert)가 저술한 과학의 비자연적 본질(The Unnatural Nature of Science)이라는 대중을 상대로 한 과학 개설서였다. 책의 첫머리부터 월퍼트는 과학이 특별한(special and privileged) 지식임을 강조했다. 그는 과학이 우리의 시각, 경험, 직관 등에 의존하는 상식과는 정반대의 "비자연적"(unnatural) 사고 -- 수학의 사용, 복잡한 실험 데이터의 해석, 추상적 개념의 사용 등을 요구하는 -- 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고 하면서 이렇게 상식에 반(反)하는 과학의 특성이 과학을 일반인에게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 만들었고, 이런 몰이해가 상대주의적 과학사회학의 기반이 되었다고 역설했다.

월퍼트가 과학이 비자연적인 특별한 지식이라고 주장함으로써 의도하는 바는, 과학과 다른 지식사이의 위계를 분명히 함으로써 과학이나 인간의 다른 지식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상대주의 과학사회학자들의 입장을 견제, 비판하는 데 있었다. 그는 이를 위해 SSK 과학사회학을 "반-과학"(anti-science), 이들을 "과학을 단지 수사학, 설득, 권력의 추구"라고 간주하는 사람들이라고 간단히 규정하고, 이들의 상대주의가 현대 과학과 원시 사회의 신화적 자연관의 차이를 구별하지 못하는 인류학의 (몰)이해에서 기원했다고 역설했다. 월퍼트는 신화적 자연관과 근대 과학의 차이를 길게 설명하면서 과학적 분석은 실재(reality)에 닻을 내리고 있고, 따라서 객관적이며, 결과적으로 가장 확실하고 믿을만한 지식이라고 단언했다. 과학의 진보는 사회て문화적 요인이나 배경과 무관하게 과학자의 노력과 사고에 근거한 내적 논리에 의해 이루어지며, 과학이 사회て문화적 요소의 영향을 받는다는 모든 주장을 상대주의, 회의론으로 돌리고 있다.

월퍼트의 책이 나온 다음 해 과학자사회에서 스타급이라 할 수 있는 스티븐 와인버그(Steven Weinberg; 전자기력과 약력의 통일로 1979년 노벨 물리학상 수상, 태초의 삼분간의 저자)가 최종이론의 꿈(Dreams of a Final Theory, 재판, 1993)이라는 저서에서 과학에 대한 제반 철학적 입장과 사회구성주의를 다시 비판했다. 먼저 그는 근대 철학이, 특히 20세기 과학철학이 과학자에게 미친 영향이 거의 전무하다고 하면서 과학에서 철학 무용론을 강조했다. 철학이 과학에 미친 영향의 과소평가는 곧바로 철학이외의 다른 사회て문화적 요소가 과학에 영향을 미칠 수 없다는 주장으로 이어졌다. "과학의 진리는 실재에 대한 과학적 '타협'의 과정을 통해 얻어진 합의"라고 주장하는 상대주의 과학사회학이 그의 표적이었다. 와이버그는 20세기 후반의 입자물리학의 발전을 사회구성주의의 방법론으로 기술한 앤드류 피커링(Andrew Pickering)의 쿼크의 구성(Constructing Quarks)을 주 비판 대상으로 선택한 뒤, 입자물리학의 이론, 법칙, 심지어는 몇몇 "실재"(entity)가 이론물리학자와 실험물리학자 사이의 상호작용에 의해 "구성"되었다는 피커링의 주장을 강하게 비판했다.

1994년은 본격적으로 과학전쟁이 불붙기 시작한 해였다. 이 해에 세계적으로 권위 있는 생물학 연구소인 우즈홀 (Woods Hole) 해양생물학 연구소의 소장을 지낸 폴 그로스(Paul Gross)와 럿거스 대학의 수학자인 노만 레빗(Normal Levitt)이 SSK 과학사회학을 정면으로 공격하는 고등미신(Higher Superstition)이란 책을 펴냈기 때문이다. 이들은 여기서 사회구성주의자, 포스트모더니즘 과학론자, 페미니스트 과학론자, 극단적인 환경론자, AIDS 활동가, 다문화주의자(multiculturalist)들을 싸잡아서 신좌익의 뒤를 잇는 "강단좌익"(academic left)으로 규정, 이들의 과학에 대한 무지를 비난했다. 강단좌익에 대한 이들의 비판의 골자는 1) 강단좌익 대부분이 과학에 대해 무지하며, 2) 과학에 대해 조금 아는 경우도 과학을 (의도적으로) 오해한 경우가 태반이며, 3) 이런 무지와 오해는 과학을 왜곡된 모습으로 그리는 상대주의 과학사회학, 과학사를 낳았다는 것이었다.

그로스와 레빗은 고등미신의 출판의 여세를 몰아 1995년 여름 뉴욕 과학아카데미의 후원 하에 초대형 학회를 개최했고, 주로 과학자들로 구성된 발표자들은 사회구성주의 과학사회학을 UFO 광신론자, 창조론자, 민간의료와 같은 대체의료(alternative medicine) 신봉자와 함께 싸잡아서 "반과학"(anti-science)으로 몰아붙였다. 이에 대항해서 그로스와 레빗의 고등미신의 대표적인 표적이었던 "소샬텍스트"(Social Text)의 편집인 앤드류 로스(Andrew Ross)는 자신의 소샬텍스트의 한 호를 "과학전쟁"이라는 제목하에 출판하는 계획을 세웠고 샌드라 하딩, 스탠리 아로노위츠같이 역시 고등미신의 비판의 대상이었던 저자들의 반론을 모은 뒤 1996년 봄에 이를 출판했다. 그렇지만 이 책이 출판되고 2주가 채 지나지 않아 아무도 생각지 못했던 초대형 사건이 터졌다. 소샬텍스트의 "과학전쟁" 호에 논문을 기고했던 기고자 중 한 명인 앨런 소칼(Alan Sokal)이 자신의 논문이 엉터리 날조에 불과한 것이라고 한 잡지와의 인터뷰를 통해 밝힌 것이다. 소칼의 인터뷰는 과학사회학 진영에 터진 "폭탄," 소칼의 "화염병"등으로 묘사되며 유력 일간지의 문화면과 사회면을 장식했고 과학전쟁의 불길은 걷잡을 수 없이 번져나갔다.

소칼은 스스로가 전통적인 마르크스주의 좌익지식인, 국제주의자임을 자청하고 있는 뉴욕대학의 수리물리 교수였다. 그는 사회구성주의 과학이론이 과학을 상대적, 주관적으로 만들고 이것이 "진리란 사람들이 진리라고 믿고 합의하는 것이다"라는 잘못된 사회이론의 기반이 되는 것을 참기 힘들었음이 자신이 "날조"를 택한 동기라고 밝혔다. 사회구성주의자, 포스트모더니스트의 과학에 대한 주장의 허구를 밝히기 위해 엉터리 논문을 써서 이들의 학술지에 출판하는 방법을 택한 소칼은 "경계선을 넘나들기: 양자 중력의 변형적인 해석학을 위해서"(Transgressing the Boundaries: Towards a Transformative Hermeneutics of Quantum Gravity)라는 이해하기 힘든 제목에 각주가 100개가 넘고 참고문헌이 200개가 넘게 달려있으며 다른 논문이나 책에서의 인용으로 가득한 긴 논문을 써서 소샬텍스트에 기고했다.

이 논문에서 소칼은 포스트모더니즘, 사회구성주의 과학이론을 간단히 소개한 뒤에 아직도 과학자들 사이에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는 양자중력이 포스트모더니즘 과학을 지지하는 결정적인 증거가 되며 해방적인 포스트모더니즘 과학의 모델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결론에선 해방적인 포스트모던 과학의 특징으로 1) 비선형성(nonlinearity)과 비연속성의 강조, 2) 인간과 자연, 관찰자와 대상, 주체와 객체의 구분의 초월과 해체, 3) 근대과학의 특징인 정적인 근대과학의 특성과 위계의 해체, 4) 상징과 표현의 강조, 마지막으로 5) 전통과학의 엘리트주의와 권위주의를 부정해야 함을 지적하고 있다. 소칼은, 만일 포스트모던한 사회구성주의를 표방하는 집단이 학문이 엄격한 사고보다는 그럴듯한 입발림과 과학자를 자신들의 동지로 얻을 수 있다는 이점만을 선호한다면 이 엉터리 논문을 눈치채지 못하고 출판할 것이라고 기대했던 것이다. 소칼은 이러한 논리의 허구의 증명을 통해서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누구나 인정할 "세계는 존재하며, 이 세계의 특성은 단지 사회적으로 구성된 것이 아니고, 사실과 증거가 중요하다"는 것을 보이려 했다는 것이다. 전통적인 마르크스주의자로서 소칼은 합리적 사고와 자연, 사회에 존재하는 객관적 실재의 정확한 분석이 사회의 지배자에 의해 만들어지는 다양한 이데올로기와 싸울 수 있는 강력한 무기를 제공한다는 신념의 소유자였다.

소칼 사건은 "와이즈 사건"(Wise Affair)라고 불린 충격적인 사건의 전주곡이었다. 소칼의 날조가 밝혀진 후 스티븐 와인버그는 "뉴욕 서평지"(New York Review of Books)에 기고한 긴 글에서 소칼을 칭찬한 뒤에 소칼의 날조가 모든 상대주의자들의 주장이 허무맹랑했음을 백일하에 드러냈다고 주장했다. 와인버그에 대해 몇 사람이 같은 잡지에 반론을 게재했는데, 그 중 한 명이 프린스턴 대학의 과학사 교수 노턴 와이즈(Norton Wise)였다. 와이즈는 1997년 초에 프린스턴의 고등연구소 (아인슈타인이 재직했던 곳으로 유명한 세계적인 연구소)에 있는 사회과학스쿨의 과학학(Science Studies) 교수직에 추천되었다. 과학사학계에서 와이즈는 명성과 실력을 인정받는 학자였지만, 고등연구소의 과학자들과 이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한 와인버그의 반대로 임용이 무산되었다. 이 과학학교수직은 브루노 라투어도 추천되었다가 과학자들의 반대로 임용이 무산되었던 자리기도 했다.

과학전쟁의 세 가지 논쟁점에 대한 분석적, 비판적 평가
과학전쟁에서 논쟁자 사이의 의견의 차이를 극명하게 드러냈던 첫 번째 문제는 사회나 문화가 과학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라는 문제이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스트롱프로그램, SSK 과학사회학은 사회て문화가 과학의 내용에 긍정적인 방향으로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강조하면서 출범했다. 그렇지만 대부분 과학자들은 이에 대해 다른 입장을 취하고 있다. 물론 과학전쟁에서 SSK 과학사회학을 비판했던 과학자들도 과학자의 과학활동이 사회적 활동이고, 이는 제반 사회적 영향하에 있음을 인정한다. 그렇지만 이들은 "과학의 내용, 진리"가 사회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는 주장에 매우 비판적이다. 과학의 이론이나 법칙이 자연에 존재하는 것을 어렵게 "발견"하며, 과학의 방법이 세계에 대한 인식으로부터 과학자의 주관, 편견, 믿음을 하나씩 제거해서 순수하게 객관적인 진리에 도달하는 것이라고 믿고있는 이들에게 이런 과정에서 사회て문화적 요소가 중요한 변수로 개입할 수 있다는 생각이 설득력을 가지기는 힘들다.

그렇지만 과학을 "자연"에 대한 객관적 진리의 발견으로만 기술하기에는 문제가 있다. 맥스웰 전자기학을 예를 들어보자. 뉴튼 역학과 더불어 고전 물리학의 기본인 맥스웰의 방정식은 전류와 이 주변의 자기장의 관계를 그 일부로 다루고 있다. 그렇다면 전류는 언제부터 과학자들의 연구 대상이 되었는가? 전류는 19세기 초엽 볼타가 전지를 발명한 이후 과학자들의 도구(tool)이자 연구의 대상으로 등장했다. 그 이전까지 전기를 연구한 수많은 과학자에게 전류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19세기 전반부를 통해서 과학자들은 전류를 구성하는 실재의 존재를 규명하기 위해 많은 실험을 했지만 이것이 존재한다는 결정적인 증거를 밝혀내지 못했고 이런 상황에서 맥스웰은 전류라고 부르는 것은 에테르(공간을 메우고 있는 가상적인 실재)의 전자기 장(場)이 만들어낸 하나의 "효과"에 불과하다는 주장을 폈다. 맥스웰의 방정식은 이러한 가상적인 실재인 에테르의 특성을 묘사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졌고, 더 놀라운 것은 이 방정식의 조합으로부터 "전자기파"라는 새로운 종류의 파동이 존재한다는 결론이 유도되었다.

이렇게 인공과 자연이라는 것은 실험실이라는 공간을 통해 과학자들의 실천과 기구를 매개로 복잡하게 얽혀서 발전하는 형태를 보인다. 만일 과학자들의 실천이 자연에 존재하는 비밀을 한 꺼풀씩 벗겨내서 궁극적인 실재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한 시점에서 가능한 이론적, 실험적, 기술적인 제반 요소를 취사선택해서 그 시점에서 실험실에서 만들어진 인공적인 자연을 가장 잘 기술하는 이론, 법칙을 만들어 내는 것이라면 이 과정에 사회て문화적 요소가 개입할 여지가 존재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허셸이 1800년 적외선을 발견한 이후 독일의 물리학자 리터는 조금은 신비적인 독일 자연철학의 "극성"(polarity) 이론에 근거해서 붉은 색의 밖에 적외선이 있다면 보라색의 밖에는 자외선이 있다고 주장했으며 결국 눈에 안 보이는 자외선의 화학반응을 검출함으로써 이 존재를 확인했다. 리터는 허셸의 적외선, 자신이 알고 있던 빛의 다양한 화학반응, 독일의 독특한 자연철학을 결합시킴으로써 스펙트럼의 역사에 새로운 장을 여는 중요한 업적을 남긴 것이다. 과학자의 실천 속에서 과학적 요소와 사회て문화적 요소 사이의 간극은 상당히 좁아짐을 볼 수 있다.

과학전쟁에서 논란이 되었던 두 번째 문제는 "카오스 이론이 포스트모던주의를 지지하는가"라는 문제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자연과학의 사회て문화적 함의에 대한 것이었다. "버터플라이 효과"에서 볼 수 있는 카오스 이론의 상호연관성, 비선형성, 무질서 속의 질서의 추구와 같은 특성이 거대 담론을 해체하고, 분절된 개체간의 상호연관성을 강조하고, 복잡한 경험을 단순화시키는 것에 반대하는 포스트모더니즘 사회철학과 유사성이 있다는 것은 리오타드(Lyotard)와 같은 포스트모더니즘의 이론가에 의해 지적되었다. 이 문제에 대한 차이는 특히 소칼 사건에서 극명하게 드러났다. 소칼은 앤드류 로스와 같은 포스트모더니스트가 자신이 놓은 덫에 걸린 이유가 양자중력과 같은 첨단 과학이론이 해방적인 포스트모더니즘을 지지한다는 자신의 날조된 입발림에 넘어갔기 때문이라고 하면서, 자연 과학과 사회て문화이론 사이에는 아무런 연관이 없음을 강조했다. 그로스와 레빗 역시 자신들의 고등종교에서 과학에서 사회 문화적 함의를 찾으려고 하는 대부분의 시도를 과학에 대한 무지에서 기원한다고 결론지었다.

"자연"에 대한 추상적인 과학이 "사회"의 규범이나 윤리, 사람이 사는 방식에 대해 직접적인 함의를 가지는 경우는 많지 않다. 약 100여년 전에 우리는 시간과 공간이 물리적으로 연관되어 있고 이것이 4차원의 연속체를 이루고 있음을 알았지만, 우리가 경험하고 사는 세계는 3차원의 공간과 이것과 무관한 시간의 흐름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과 유사하다. 그렇지만 어떤 사람이 그의 철학, 사회이론에서 자연과학의 해석에 대해 잘못이나 실수를 범했다고 해서, 그 철학, 사회이론이 전부 틀렸다고 비난하는 태도에는 문제가 있다. 데리다의 아인슈타인에 대한 해석이 과학에 대한 무지를 드러낸다고 그의 모든 철학체계가 전부 엉터리인 양 몰아붙이는 것은 올바르지 못하다는 것이다. 볼테르가 뉴튼 과학에 무지했다고 사상가로서의 그를 경멸할 이유는 없다. 이는 역으로 상보성이론에 입각한 닐스 보어의 원자탄에 대한 나름대로의 해석이 너무 단순했다는 사실에서 그의 상보성 이론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하는 것이나 비슷하다. 과학으로부터 얻어진 철학적, 종교적, 사회 문화적 함의는 제한적인 함의로서 받아들여야지 그것이 과학에서 얻어졌다고 무조건 진리라고 생각하는 것도, 과학은 과학이고 사회는 사회이기 때문에 무조건 잘못되었다 하는 것 모두 바람직하지 못하다.

이와 관련해서 지적할 것은 소칼이나 그로스와 레빗은 주로 인문학자, 특히 포스트모던 인문학자들이 과학의 의미를 자신들의 철학, 사회이론을 뒷받침하기 위해 왜곡했다고 강력히 비판하고 있음에 반해 불확정성 원리의 철학적 의미를 설파한 하이젠버그나, 상보성이론의 사회적, 역사적 중요성을 주장했던 닐스 보어, 비평형 상태의 화학의 철학적, 인식론적, 사회적 의미를 대중을 상대로 홍보한 프리고진에 대해서는 비교적 관대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대한 태도는 "과학에 대해선 과학자들이 가장 많이, 잘 알고 있다"는 생각을 암암리에 전제로 하고 있다. 이러한 생각을 조금 확장하면 "과학의 사회적 이용, 그 결과, 책임에 대해서도 과학자가 가장 잘 알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이는 과학지상주의의 시작이 될 수 있으며, 우리가 경계해야 할 생각이다.

과학전쟁을 통해서 논란이 되었던 마지막 이슈는 상대주의와 반실재론에 대한 것이다. 소칼은 SSK 과학사회학자들이 자연에 실재가 존재하지 않고 따라서 자연에 대한 어떤 설명도 다 참이라고 간주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주장은 SSK과학사회학의 몇몇 극단적인 주장을 SSK 과학사회학의 전부, 또는 대표적인 주장이라고 간주한 결과였다. SSK 과학사회학자 가운데 객관적인 세계가 존재하지 않는다거나 자연과학의 진리가 단순히 과학자들 사이의 합의에 불과하며 따라서 현대 과학이나 고대의 신화 사이에 아무런 차이가 없다라고 주장한 사람은, 필자가 아는 바로는, 아무도 없다. 많은 경우 이들은 말하고자 했던 것은 과학자들이 발견한 진리, 법칙, 새로운 실재(entity)들이 많은 경우 매우 복잡한 과정을 거쳐서 만들어지며 이 과정에서 어떤 종류의 "합의"가 개입될 수도 있다는 (또 종종 개입되었다는) 것이다.

TRF(thyrotropin releasing factor)라는 호르몬의 발견에 대한 라투어의 반실재론은 비판의 표적이었고, 이를 근거로 많은 사람들이 SSK 사회학자들은 과학자들의 연구 대상인 외부 세계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다는 잘못된 인식이 유래했다. 그렇지만 라투어가 던진 문제는, 사크연구소의 과학자들이 한 번도 검출된 적이 없었던 TRF라는 물질을 언제, 어떤 방법을 통해 발견했음을 알게 되었고, 왜 다른 과학자들은 이들의 주장을 받아들였을까라는 질문이었다. 라투어는 당시에 사크 연구소의 과학자들이 다른 그룹의 과학자들과 같은 주제를 놓고 경쟁관계에 있었음을 발견했고, 이 두 그룹사이에서 서로의 데이터를 놓고 그 데이터의 정당성에 대해 논쟁이 있었으며, 이런 과정에서 어느 순간 두 그룹이 어떤 특별한 종류의 데이터가 TRF의 존재를 보여준다고 동의했음을 알아냈다. 라투어의 분석에서 볼 수 있는 것은 과학적 "발견"이라는 것은 종종 이런 복잡한 과정을 거쳐서 어렵게 과학자 사회 속에서 인정된다는 것이었고, 따라서 과학에서 진리라고 말하는 것은 종종 이런 복잡한 사회적 과정의 결과라는 것이었다. 이 과정을 한 측면에서 보면 "실험 데이터를 만들어 내는 기기의 캘리브레이션(calibration)에 대한 두 팀의 합의는 TRF라는 호르몬을 존재하게 했다"라고도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라투어는 이를 "TRF가 이 두 그룹의 합의 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는 극단적인 구성주의의 명제로 표현했고, 이는 과학자들의 공격 이전에 SSK 과학사회학, 과학철학 내부에서도 많은 비판을 받았다.

분명한 것은 반실재론을 신봉하는 사람은 소수였지만 많은 SSK 과학사회학자들이 스스로를 상대주의자라고 부르는데 주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들 상대주의 과학사회학자들과 대다수 과학자들과의 차이는 아마도 과학자들이 "과학은 진리이다"는 명제를 당연하게 생각하는 반면, 과학사회학자들은 이에 대해 매우 유보적인, 회의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는 점에 있을 것이다. 앞에서 언급했지만 과학이 발전하고 있다는 역사는 우리에게 한 시대에 과학적 진리라고 생각되던 것이 시대가 바뀌면서 오류로 판정되고 잊혀지는 예를 많이 제공하고 있다. 17세기 과학혁명 이후에도 데카르트의 역학, 플로지스턴 이론, 뉴튼의 빛의 입자설, 칼로릭 열이론, 라마르크의 용불용설, 힘의 보존 법칙, 에테르 이론 등 수 많은 과학이론, 법칙이 이후 잘못된 것으로 판명이 났다. 이러한 예를 보면 우리가 진리라고 믿고있는 이론 중 50년 뒤에도 살아남을 이론이 무엇일지 짐작하기가 쉽지 않다. 아마도 과학자와 SSK 과학사회학자의 입장의 차이는 "과학은 진리이다"는 명제를 "과학은 한 시기에 자연현상에 대한 가장 그럴듯한, 설득력 있는 설명이다"로 바꾼다면 상당히 좁혀질 것이다.

결론을 대신해서
1997년부터 북미와 유럽의 학자들은 과학전쟁이 서로를 헐뜯는 식이 아닌 과학자와 과학연구가 사이의 대화와 토론을 증진시킴으로써 과학과 사회의 이해를 높이는 건설적인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목소리를 높였다. 올해 국내에서도 서울대학교 물리학과의 오세정 교수와 국민대학교에서 과학사회학을 전공하는 김환석 교수사이에 『교수신문』의 지면을 통해 과학의 객관성과 사회적 영향에 관한 논쟁이 벌어졌다. 논쟁의 발단은 현대과학이 일으키는 제반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시민들이 참여해서 과학의 민주화를 꾀해야 한다는, 사회구성주의의 대안적 과학이라는 개념에 입각한 김교수의 주장을, 자연에 대한 보편적, 객관적 진리를 발견하는 과학에 "인간적이고 환경친화적인" 과학은 있을 수 없다는 오교수의 반론이 이어지면서 시작되었다. 각각 세 번에 걸친 입장 개진과 한림대 송상용 교수의 정리로 매듭지어진 이 논쟁은 서구의 과학전쟁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인신공격과 비방이 없었고, 과학자와 과학사회학자와 같은 과학학연구자 사이의 대화를 통해 현금의 입장차이를 인식함으로써, 이후 과학과 과학학(Science Studies)사이의 접촉의 더 풍부한 접면을 만들었다는 평을 받기도 했다. 이런 의미에서 과학"전쟁"은 국내에선 없었다고 할 수 있다.

오세정 교수와 김환석 교수의 각각의 입장과 그 차이는 그들의 글에 충분히 자세하고 친절하게 서술되어 있기 때문에 여기서 다시 언급할 필요는 없다. 다만 한가지 얘기하고 싶은 것은, 이 국내 논쟁에서 언급된 "과학"이 -- 예를 들어 19세기 빛의 속도에 대한 실험과 상대론의 탄생, 아인슈타인의 광량자 이론, 산소의 발견 등 -- 현대과학과 사회의 관계를 생각함에 있어서 너무 협소하다는 것이다. 과학에는 이런 "엄밀한" 과학만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대한 보통 담론과 그 경계가 뚜렷하지 않은 덜 엄밀한 과학도 많다.

얼마만큼의 음주가 산모에게 해로운가? 지구 온난화의 주범은 이산화탄소인가 아니면 수증기인가? 동성연애는 유전인가 아니면 사회적 환경이 만든 것인가? 여성 과학자보다 남성 과학자가 많은 것은 남-녀의 두뇌차이에 근원한 것인가 아니면 사회문화적 요인에 의한 것인가? 다중인격이란 정신분석학의 개념은 과학적 근거가 있는 것인가 아닌가? 식수에 포함될 수 있는 화학물질의 기준치는 누가 어떤 근거로 정하는 것인가? 이런 질문과 관련된 과학분야의 -- 소위 의학과 생물학과 같은 "사람에 대한 과학분야"(human sciences)가 대부분이지만 환경학, 독성학(toxicology), 화학의 일부도 포함하는 -- 지식의 형성과정을 살펴보면 과학 내적인 요소와 사회문화적 (그리고 종종 정치경제적) 요소들 사이에 뚜렷한 경계가 그려지지 않는다. 과학과 정치는 뭉뚱그려져서 이런 과학내용을 규정하고, 이렇게 구성된 과학은 우리의 일상생활은 물론 사회 전반에 다시 큰 영향을 미친다. 과학지식과 권력(power)의 상호작용이 우리의 생각과 행동을 바꾸고, 우리의 생각과 행동이 역으로 지식의 내용을 변화시키는 그런 예이다. 과학지식의 사회적 구성과, "인간적이고 환경친화적인 과학"이란 얘기가 보다 의미를 가질 수 있는 영역은 빛의 속도의 측정이나 산소의 발견과 같은 문제가 아니라 바로 이런 "인간적인" 문제를 다루는 과학일 것이다. 이런 과학지식의 형성과정에 대한 과학사회학자들의 분석과 과학의 사회적 영향에 관심이 있는 과학자들과 시민의 만남은 보다 지식과 정책을 동시 형성함으로써, "민주적인" 과학과 민주적인 사회를 만드는데 일조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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