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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일의 돌핀
17일의 돌핀
  • 최승우
  • 승인 2023.03.28 10:3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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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요나 지음 | 256쪽 | 앤드

넥서스 경장편 작가상 수상
한요나 작가의 첫 SF소설집!

“언니, 좋아해요.”
“나도. 그러니까 죽지 말고,
다 터뜨려 버려.”

제2회 넥서스 경장편 작가상 우수상을 수상하며 소설가로서의 첫 발걸음을 내딛은 한요나 작가. 장편소설 『오보는 사과하지 않는다』를 통해 서늘하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안온한, 냉혹하지만 동시에 다정한 세계를 그려 낸 그가 이번에는 첫 SF소설집을 독자에게 선보인다. 

앞으로 가는 사람과 뒤로 가는 사람의 사랑과 이별
정체불명의 거대 적과 맞서 싸우는 소녀들
꿈을 기록하는 드림플레이어와 인간의 몸에 깃든 낯선 존재 ‘타곳’
다리를 잃은 생물학자 로기와 ‘다수린의 돌’
사람들과 한 발자국 떨어진 채 외계인이 되어 버린 아이
어느 날 갑자기 그림자가 사라진 개 ‘엔트로피’와 주인
미지로 떠나 버린 언니와 우주정거장에 남은 동생

한요나의 독특하면서도 매혹적인 세계가 겹겹이 녹아 있는 여덟 편의 단편소설을 한데 묶었다. 한 편씩 읽어 나갈 때마다 독자들은, 때로는 이해하고 때로는 오해하며 살아가는 우리들의 이야기를 새롭게 바라보는 작가의 SF적 상상력에 놀랄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한요나는 진보하는 기술과 미래를 예견하는 SF 장르를 차용하면서도 우리 마음속 가장 내밀한 곳에 남아 있는 존재들―가족, 연인, 권태, 연대, 이해―을 오롯이 응시한다. 점점 더 빠르게 진보하고 발전하는 세계 속에서 소외당한 이들을 묵묵히 감싸 안는다. 물결이 치듯 유려하게 흘러가며 인물의 내면을 풀어내는 한요나의 문장은 팬데믹과 계급 나누기, 혐오로 점철된 사회에 피로해진 독자들에게 따뜻한 위로가 되어 주지 않을까?

◆ 책 속으로

돌핀, 돌핀에 대해 이야기해야 한다. 1행성의 중력은 지구와 달라서 차도보다는 비행길이 더 발달했다. 교차로 역할을 하는 비행길이 γ형 비행길이다. 나는 특수 수송선 기사로 일하고 있다. 개인 자산으로 돌핀(돌핀은 내 수송선의 이름이다.)을 갖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개인 기사로는 비교적 어린 나이였지만, 수송선을 구입하기 위해 들인 시간은 평균적인 수송선 기사들과 비슷하다. 나는 일찍 운전대를 잡았고, 그만큼 충분히 고생했다. - 「17일의 돌핀」 중에서

나란히 서서 걸어가던 해안이 말을 걸었다. 넌 참 궁금한 것도 많다. 궁금한 걸 참지 못하고 바로 묻는 것도 신기하다. 그럴 수 있는 네가 부럽다. 그러면 내가 다시 작아진다. 그래서 너와 있는 게 자꾸 껄끄럽고 불편하다. 그래, 나는 해안이 불편했다. 그런데도 계속 해안과 있게 되는 것이 이상했다. 이런 게 운명이라면 놓아 버리고 싶었다. - 「바닷가의 모리유」 중에서

꿈을 자세히 기억하지 못하는 건 내겐 좋은 일이었다. 적어도 직장에 다니는 동안은 그랬다. 꿈을 꾸지 않는 방법을 알 수 없으니, 꿈을 꾸더라도 기억하지 못하는 쪽이 좋았다. 물 먹은 스펀지처럼 축축 처지거나 폭삭 젖은 신문지 꼴로 사무실을 돌아다니면 걸레가 되는 기분이었다. - 「재생되는 소녀」 중에서

타인에게 우리를 소개할 때는 연인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 인간 안에는 나도 있다. 나는 타곳이다. 셋이서는 연애를 할 수 없다. 그래서 인간의 애인이 함께 있을 때 나는 활동하지 않는다. 나는 이들이 연애를 하고 있는 건가, 양육을 하고 있는 건가 헷갈렸다. 나는 그녀의 몸에 기생하면서 그녀를 돌보고, 그녀는 나를 돌본다. 그리고 애인도 그녀를 돌본다. - 「My First Bunny」 중에서

사람이 적은 곳에서 자유롭게 수영을 하면 다리가 자라지는 않아도 빛나는 비늘이 자랄 것 같았다. 몸의 새로운 부분이 생기는 것은 생물학자로서 즐거운 상상이었다. 어떤 생물이든 필요 없는 기관은 없고, 모든 것은 생존과 연결되었다. 로기는 자신의 생존과 연결되는 몸의 구석구석을 생각했다. 사라진 다리 때문에 생존이 끝나지는 않았으므로 고개를 갸우뚱했다. - 「로기」 중에서

아이는 equal이라는 단어를 좋아한다. 기분? 느낌? 좋은 것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말하고 싶지만, 아이에게 언어는 너무 어렵다. 그림처럼 그냥 예뻐서 좋아하고 싶다. - 「외계인이 냉장고를 여는 법」 중에서

여전히 엔피의 그림자는 돌아오지 않았다. 언제 돌아올지는 알 수 없지만, 밥도 잘 먹고 내가 없는 시간에는 잠도 자는 것 같다. 내가 퇴근하고 들어오면 옛날만큼 반겨 주진 않았지만, 그래도 힘을 내어 자리에서 일어나곤 했다. 그래서 죽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네가 죽지만 않는다면 나는 괜찮을 것 같아.” - 「완벽한 그림자의 오후」 중에서

반가비의 사람들은 떠나거나 누군가를 잃고 돌아오거나 한다. 평생을 우주를 떠돌며 살았던 이모는 이모부의 사고 이후 정거장에 완전히 정착했다. 더 이상 떠나지 않기로 다짐하면서 가정용 소형 우주선도 팔아 버렸다. 동생과 아들 곁에서 사라지지 않는 가족이 되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건 원우 오빠도 비슷한 것 같았다. 나도 일단은 엄마와 함께 사는 집에서 떠나지 않고 있다. 하지만 그건 가족을 위해서가 아니다. 여기에 남아 있고 싶어서도 아니다. - 「빈 노래의 자리」 중에서

최승우 기자 kantmania@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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