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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 카레니나 만난 톨스토이’...참회는 죽음뿐일까
‘안나 카레니나 만난 톨스토이’...참회는 죽음뿐일까
  • 김재호
  • 승인 2023.03.27 02:0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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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_「톨스토이 참회록, 안나 카레니나와의 대화」(극단 피악, 극작·연출 나진환, 출연 정동환, 정수영, 주영호 등)

“매 순간 상처를 입히고 마지막에는 죽인다.”(Vulnerant omnes, ultima necat) 이 라틴어 문구의 주어는 ’시간(인생)‘이다. 프랑스의 한 교회에 놓여 있는 해시계에는 인생의 덧없음이 이같이 새겨져 있다. 연극 「톨스토이 참회록, 안나 카레니나와의 대화」를 보며 이 라틴어 문구가 떠올랐다. 물리적 시간(크로노스)은 우리를 죽이지만, 참회의 시간(카이로스)은 영원을 꿈꾸게 한다. 공연은 다음달 16일까지 홍익대학교 대학로 아트센터에서 펼쳐진다. 

 

톨스토이를 연기한 정동환 배우. 관록이 드러나는 독백을 들려주었다. 사진=극단 피악

뮤지컬 드라마로 선보인 「톨스토이 참회록, 안나 카레니나와의 대화」는 나진환 성결대 교수(연극영화학부)가 극작·연출을 맡았다. 이 작품은 2022년 러시아 스몰렌스크 국제연극제 심사위원 특별상을 수상했다. 나 교수는 “시대의 결핍에 대한 반응으로서 연극의 새로운 영토를 개척하려 한다”라며 “연극의 본질적 사명감과 책임감”을 언급했다. 그는 아사 직전의 순수예술판을 우려하지만 동지인 성스러운 배우들이 있어 용기를 냈다. 특히 “어딘가에 있을 인문학을 사랑하는 관객을 믿고, 비극을 사랑하는, 즉 연극예술의 본질을 갈망하는 관객이 있으리라 믿는다”라고 밝혔다. 

이번 작품은 극단 피악의 인문학적 성찰시리즈-레퍼토리 중 하나이다. 고전에 기대어 인간을 인문학적으로 관조했다. 나 교수는 “인간이란 정말 모순되면서도 복잡한 생명체인 것은 분명하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실존 방식도 인간의 자유의지에 속하게 해 주셨다”라며 “따라서 우리는 인간을 단순한 이데올로기로 규정하는 것을 단호히 거부하면서, 인간의 아름다운 실존의 여정이 무엇인지, 우리의 탐구는 멈추지 않고 계속될 것이다”라고 강조했다. 

 

젊은 자신과 대화하는 톨스토이
자신의 생각과 마주하는 안나

「톨스토이 참회록, 안나 카레니나와의 대화」는 내용과 형식면에서 도전적이다.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1828∼1910)가 자신의 작품 『안나 카레니나』(1878)의 주인공 안나를 만난다. 안나는 연극 속 또 다른 배우가 연기한 자신의 생각과 마주한다. 또한 톨스토이는 과거의 젊은 자신과 대화한다. 내가 또 다른 나와 마주하는 셈이다. 무대 장치 역시 창의적이다. 무대 위 배우는 종종 마치 분신처럼 스크린에 비친다. 독백과 노래는 바이올린·첼로·피아노의 선율을 타고 흐른다. 무대 중앙을 사각형으로 두른 틈새에는 물이 고여 있다. 물은 원래 어디로든 흐르는 게 자연스러운데, 감옥에 갇혀 있는 듯하다. 마치 우리의 인생처럼 말이다.  

연극은 러시아 아스타포보 간이역에서 톨스토이의 딸이 저녁 6시라는 시간을 가리키며 시작된다. 공연을 다 보고 나면 알 수 있듯이, 이 역은 현재 ’톨스토이역‘으로 바뀌었다. 공연의 마지막에 시간은 저녁 6시5분이 돼 있다. 톨스토이가 죽기 전 마지막 5분은 참회로 점철돼 있다. 톨스토이가 죽기 전 남긴 말은 “하지만 농민들... 농민들은 어떻게 죽지?”였다. 귀족으로 살았지만 농민을 동경했던 그는 죽는 순간만이라도 농민이 되고 싶었다. 계급을 초월해 비폭력·사랑·평화를 갈구했던 톨스토이였다. 

 

톨스토이(정동환 배우)는 자신을 용서했을까, 안나 카레니나(정수영 배우)는 스스로를 사랑했을까. 사진=극단 피악

 

진실·사랑 갈구했던 톨스토이와 안나

톨스토이 역은 정동환 배우가 맡았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자신의 대사가 노래처럼 들리길 바랐다. 기자가 관람한 공연에서 가장 돋보였던 건 명확하고 유연한 대사 전달이었다. 막힘없이 흐르는 정동환 배우의 대사는 정말 노래 같았다. 톨스토이는 자신이 젊은 시절 기만했던 날들을 후회하고 참회한다. 진실을 외면한 채 진보를 외치고, 자유니 사랑이니 떠들어댔던 스스로를 원망하는 것이다. 신이 있다면 그런 톨스토이를 구원해 줬을까. 그렇다면 과연 인생의 진실은 무엇이고, 역사는 어디에서 어디로 흘러가는 것일까. 

안나 역은 정수영 배우가 분했다. 이번 작품에선 고전 『안나 카레니나』도 만날 수 있다. 톨스토이가 창작한 이야기는, 참회를 하는 가운데 액자 구성처럼 들어가 있다. 안나는 끝없이 사랑을 원했으나 집착·파멸로 흘렀다. 아니, 사랑이란 게 원래 파국으로 치닫는 것인지 모른다. 그걸 누구나 알면서도 모르는 것처럼 여기는 것일 뿐. 정수영 배우는 안나가 지닌 고상함과 광기의 이면을 제대로 드러냈다. 사랑이 시작될 땐 고상함이 베어 나지만, 사랑이 끝날 땐 언제나 서늘함이 놓여 있다. 마지막에 이르러 안나는 사랑이 무엇인지 깨달았을까.  

『안나 카레니나』에서 안나와 불륜이자 운명적 사랑을 하게 되는 브론스키 백작 역은 주영호 배우가 맡았다. 그는 젊은 톨스토이 등 여러 역을 동시에 소화했는데, 강렬한 에너지와 함께 빛나는 연기를 보여줬다.  

 

 

마지막 기차는 곧 죽음...비밀을 품은 그대는 못 오리

톨스토이와 안나 둘 다 처음부터 마지막 기차를 기다린다. 마땅히 갈 곳이 없어 서성이는 두 인물은 닮았다. 그리고 톨스토이와 안나는 마지막 기차에 오른다. 그것은 죽음이었다. 톨스토이는 자신을 용서했을까, 안나는 스스로를 사랑했을까. 대답은 비극에 가까운 것 같다. 

「톨스토이 참회록, 안나 카레니나와의 대화」의 여러 노래 중 다음의 가사가 가장 와닿았다. ”비밀을 품은 당신은 영원히 오지 못하리.“ 누구나 비밀을 간직하고 산다. 톨스토이에게는 기만·방탕, 안나에게는 불륜이 아니었을까. 당신은 과연 어떤 비밀을 품고 사는가. 

김재호 기자 kimyital@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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