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3-29 22:45 (금)
성별 특성 반영한 연구가 기초과학 연구 혁신 이끈다
성별 특성 반영한 연구가 기초과학 연구 혁신 이끈다
  • 김혜진
  • 승인 2023.03.28 09:0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한국과학기술젠더혁신센터·교수신문 공동기획_ 젠더혁신, 연구와 삶을 바꾸다①

최근 과학기술 연구에서 성별 편향을 줄이는 젠더혁신(Gendered Innovations)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다. 생물학적인 성(sex)과 사회문화적인 젠더(gender)의 차이를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다. 의생명 분야는 물론 최근에는 인공지능(AI)과 데이터를 활용하는 과학기술·산업현장·생태계 등에서도 젠더혁신이 주목받고 있다. 이에 교수신문은 한국과학기술젠더혁신센터(GISTeR, 소장 이혜숙)와 공동으로 총 5회에 걸쳐 과학기술과 산업현장 등에서 젠더혁신의 중요성과 동향, 앞으로의 과제를 조명해보는 연재를 마련했다.

①기초 뇌과학과 과학기술젠더혁신(이하 젠더혁신)
② 임상의학과 젠더혁신
③ 인공지능(AI)와 젠더혁신
④ 산업현장과 젠더혁신
⑤ 지속가능발전과 젠더혁신

“국내에서도 논문 발표 과정에서 성별 특성을 고려하는 것이 
이제는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인식의 전환이 일어나고 있다. 
특히 뇌과학은 다른 분야에 비해 성별 특성이 더 많이 고려될 수밖에 없다.”

입덧 완화제·코로나19 백신의 교훈 

제2차 세계대전의 후유증으로 유럽의 많은 사람이 불면증에 시달렸다. 당시 독일의 한 제약회사가 의사의 처방이 없더라도 진정제와 수면제로 사용할 수 있는 탈리도마이드(Thalidomide)라는 약을 개발했다. 1957년 출시된 이 약은 특히 입덧 완화에 효과가 있는 것으로 알려지면서 50여 개 나라에서 많은 임산부가 복용했다.

하지만 결과는 끔찍하고 치명적이었다. 1962년 판매가 금지되기까지 탈리도마이드 부작용으로 1만2,000명의 기형아가 탄생했고, 사산(死産)된 아이도 부지기수였다. 임산부를 대상으로 한 임상 연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서 발생한 비극이었다.

미국질병통제예방센터(CDC)에 따르면 2021년 3월 기준 코로나19 백신 부작용 사례 가운데 79.1%가 여성이었다. 성별에 따른 투여량이나 생물학적 면역 반응 등이 충분히 고려되지 않은 결과였다. 사진=픽사베이

최근 코로나19 백신 부작용 사례도 의생명 분야의 연구에서 성차와 성별 특성 요소의 중요성이 다시 한 번 확인되었다. 미국질병통제예방센터(CDC)에 따르면 2021년 3월 기준 코로나19 백신 부작용 사례 가운데 79.1%가 여성이었다. 백신의 개발 과정에서 성별에 따른 투여량이나 생물학적 면역 반응 등을 충분히 고려하지 못한 결과였다.

앞서 2014년 미국식품의약국(FDA)이 발표한 약품 부작용에 대한 보고서에 따르면 여성이 남성보다 약에 대한 부작용이 컸고, 심지어 일부 약은 여성에게 약효가 없는 경우도 있었다. 

기초과학 연구의 젠더혁신 강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의생명 분야를 비롯한 기초연구에 임산부를 포함한 남녀노소 모두를 대상으로 충분한 과학적 연구가 필요하다는 주장이 꾸준히 제기되어 왔다. 성별과 젠더 차이를 인식하고 고려하는 연구 방법을 도입해 과학기술 연구에서 성별 편향을 줄여야 한다는 이른바 젠더혁신이다.

최근 들어 과학기술 연구에 젠더혁신을 반영하기 위한 움직임이 곳곳에서 포착되고 있다. 실제 <네이처>나 <셀> 등 세계적 학술지의 경우 논문 게재 시 성별 특성 등을 고려한 보고 항목이 강화되고 있다.  

박상준 가톨릭의대 연구계약교수

뇌 오가노이드(유사장기신생물)를 이용해 장기적인 뇌 발달 과정을 추적·관찰 중인 박상준 가톨릭의대 연구계약교수(의생명과학교실)는 “지난해와 올해 초 네이처지 계열과 셀 프레스 계열지에 논문을 투고했는데 성별 균형을 위해 어떤 노력을 했는지 보고하는 항목이 있었다”며 “단순히 연구자의 남녀비율뿐 아니라 실험에 사용한 동물이나 세포의 성별을 고려했는지를 구체적으로 설명해야 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박 교수는 “저의 연구 주제에서는 성이나 젠더가 민감한 변수는 아니었지만, 이번 경험을 통해 후속 연구에서는 성차나 젠더 관련 변수를 좀 더 중요하게 고려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라고 덧붙였다.

성별 특성 고려한 뇌과학 연구성과 속속 도출 

일선 연구 현장, 특히 기초 뇌과학 분야에서 젠더혁신과 관련된 주목할 만한 연구 성과가 속속 도출되고 있다. 2019년 기초과학연구원(IBS) 김은준 시냅스 뇌질환 연구단장(카이스트 생명과학과 석좌교수)은 남자가 자폐에 더 많이 걸리는 이유를 규명한 연구 결과를 국제 학술지 <네이처 뉴로사이언스>에 발표했다.

김은준 카이스트 교수

연구팀이 자폐증을 일으키도록 유전자를 결핍시킨 생쥐를 관찰한 결과, 수컷은 신경전달 균형이 무너진 데 반해 암컷은 균형 시스템을 유지시키는 유전자가 발현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연구 결과는 남녀의 뇌 발달 장애 차이 기전을 처음 규명한 것으로, 국내의 대표적인 젠더혁신 연구 사례로 꼽힌다. 

이러한 연구 결과가 축적되면서 이제 뇌질환이나 기능 연구에서 성차와 성별 요소에 대한 고려는 필수적인 요소가 되었다. 실제 남성이 여성보다 자폐스펙트럼은 4배, 파킨슨병은 2배 이상 발병율이 높고, 여성이 남성보다 우울증의 경우 약 2배, 치매는 2.4배 이상 발병율이 높은 것으로 밝혀졌다.

이에 따라 성차의 정신건강 분야에서 성별 특성을 반영한 연구도 큰 폭으로 증가하고 있다. 한국과학기술젠더혁신센터에서 2022년 웹 오브 사이언스를 이용해 성별 특성 반영 키워드가 포함된 SCI(SCIE) 논문 현황을 조사한 결과, 뇌과학 분야 논문이 2017년 800여 편에서 2021년에는 1,200여 편으로, 정신의학 분야 역시 같은 기간 550여 편에서 800여 편으로 증가했다.

김은준 단장은 “수컷만 대상으로 연구를 진행했다면 신경전달 저하가 자폐 원인이라는 점만 찾아냈을 텐데 암수를 따로 봤더니 결과를 잘 해석할 뿐 아니라 자폐를 치료하는 메커니즘도 찾을 수 있었다”라며 “국내에서도 논문 발표 과정에서 성별 특성을 고려하는 것이 이제는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인식의 전환이 일어나고 있으며, 특히 뇌과학은 다른 분야에 비해 성별 특성이 더 많이 고려될 수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김 단장은 또 “예전에는 주로 남성 샘플만 분석하다 지금은 양성을 비교 분석하다 보니 연구 기간이 길어지고 비용 측면에서도 부담이 커지는 만큼 성별 특성 연구가 더 원활하게 이뤄지려면 연구비 증액이나 평가제도 개선과 같은 지원이 뒷받침되어야 한다”라며 “그래야 성별 특성을 잘 고려한 진화된 실험 디자인이 나오고 기초과학 분야의 연구 체질도 개선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젠더혁신 이란?
연구혁신 넘어 사회문화·경제까지 영향 

젠더혁신은 남녀의 생물·생리학적 변수는 물론 사회·문화적 변수도 함께 고려하여 연구의 수월성을 높이고, 이로 파생된 기술, 제품, 서비스 등이 궁극적으로 사회, 문화, 산업, 경제의 영역까지 영향력을 넓히는 개념이다.

미국 스탠퍼드대 론다 시빙어(Londa Schiebinger) 교수는 지난 2005년 이 용어를 도입한 데 이어 2009년부터 유럽연합집행부(EC) 지원으로 전문가 60여 명과 함께 관련 연구 방법과 사례를 구축하는 젠더혁신 프로젝트를 주도했다. 그의 주장은 “성과 젠더 차이를 고려해 연구하면 모두를 위한 발견과 혁신을 이룰 수 있다”로 요약할 수 있다. 

국내외 과학기술계에서는 성별 특성을 고려한 연구개발을 제도적으로 정착시키려는 움직임이 빠르게 확산하고 있다. 미국 국립보건원(NIH)은 지난 2014년부터 동물과 세포를 사용하는 모든 전임상 시험에서 성별 균형을 맞추도록 규정을 개선했다.

유럽(EU)은 대규모 연구 혁신 프로그램인 ‘호라이즌 유럽’에서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젠더 요소를 포함하도록 했으며, <네이처> 등 세계적인 학술지는 성별 특별 변수(SABV)를 연구에 반영하고 있다.

국내에서도 지난 2021년 2월 한국과학기술젠더혁신센터(GISTeR, 소장 이혜숙)가 공식 출범한 데 이어 12월에는 성별 등 특성 분석을 반영하도록 과학기술기본법이 개정됐으며, 2023년부터 시행되는 제5차 과학기술기본계획에 ‘성별 특성을 반영한 연구기반 확보 및 적용’을 추진내용으로 포함했다. 

김혜진 한국과학기술젠더혁신센터 선임연구원 · 김봉억 기자 bong@kyosu.net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