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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의 문화등반 56] 지식과 믿음 사이
[한민의 문화등반 56] 지식과 믿음 사이
  • 한민
  • 승인 2023.03.29 08:3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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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의 문화등반 56

 

한민 문화심리학자

넷플릭스 다큐 「나는 신이다」가 화제다. JMS, 구원파, 아가동산, 만민중앙교회, 그 외에도 한국에는 다큐에 포함되지 않은 수많은 사이비 교단들이 존재한다. 흥미롭게도 이들은 서양에서 유래한 한 종교에서 분화되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전통 종교와 민족 종교 계열의 사이비들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그 공통점은 바로 메시아(구세주) 신앙이다.

이 세상은 죄와 고통으로 가득하지만 곧 세상을 구원할 구세주가 오는데 자신들의 교주가 곧 구세주라는 식이다. 메시아 신앙은 외래 종교인 기독교의 핵심 교리지만 한국문화와 한국인들의 심성과도 관련이 깊다. 삼국시대부터 이어져온 미륵(彌勒)신앙이 바로 메시아 신앙이기 때문이다. 

계속되는 전쟁과 삶의 고통에 지쳤던 민초들은 새 세상을 열어줄 구세주를 원했고 미륵이 바로 그런 존재였던 것이다. 후고구려의 궁예 등 나라가 어려울 때 미륵을 자처했던 인물들이 줄줄이 나타났던 이유이며, 구한말 전래된 기독교가 그토록 짧은 시간 안에 교세를 확장할 수 있었던 이유다. 

다큐에 등장한 교단들은 대개 1980년대와 1990년도에 설립되었다. 당시는 소위 ‘세기말’로 온갖 종말론이 판을 치던 시기였다. 100년이 끝나는 그냥 세기말이 아니라 연도의 앞자리가 1에서 2로 바뀌는 밀레니엄의 마지막 시기였으니까. 21세기가 시작될 2000년은 서력 기원의 기준이 되는, 예수가 태어난지 2000년이 되는 해였기 때문에 그 심각성(?)은 더 컸다. 

다큐를 통해 드러난 메시아를 자처하는 교주들의 행태는 실로 충격적이다. 더욱 충격적인 사실은 교주들의 그러한 만행을 용인하고 거기에 동참하는 신도들이 있다는 것이다. 그 중에는 좋은 대학을 나오고 훌륭한 직업을 가진 인물들도 많다. 뛰어난 두뇌와 지식을 갖춘 지성인들마저 사이비 종교에 빠져드는 이유는 무엇일까.

간단히 말하자면 맹목적인 믿음이다. 내가 가진 믿음이 절대적이라는 생각과 내가 한번 믿기 시작한 것은 끝까지 믿으려 하는 인간의 심리적 특성이 결합하면 놀라운 결론에 이른다. 이성적 판단을 하지 못하고 오직 믿음을 위한 믿음만 남게 되는 것이다. 누구보다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지식인들마저도 사이비에 빠져들어 한 인간에게 절대적 충성을 바치게 된다.

문제는 수많은 사이비 교단을 양산하고 셀 수 없이 많은 피해자들을 만들어낸 이 맹목적 믿음을 사이비가 아닌 일반 교단에서도 지나치게 강조하고 있다는 점이다. 사이비 교단들이 파생된 그 종교는 소위 ‘어린아이와 같은’ 믿음을 말한다. 어린아이가 부모를 믿고 따르듯이 일체의 의심이 없는 순수하고 절대적인 믿음을 신도들에게 요구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믿음이 절대자가 아닌 절대자의 대리자 또는 구세주로 믿어지는 어떤 인물을 향할 때 일반 교단의 평범한 종교활동은 삽시간에 사이비로 화한다. 따라서 현 시대 종교인들에게 필요한 덕목은 도마(토마스)의 호기심이다. 도마는 부활하신 예수를 믿지 못하고 십자가에 못 박힐 때 생긴 손과 발의 못 자국을 보여달라고 말한 사람이다. 

예수께서는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더 복되다’ 하셨으나 도마와 같은 태도가 잘못되었다고는 할 수 없다. 이제껏 존재했던 사이비 교단의 신도들 중 자칭 메시아의 신성을 의심하는 이들이 좀더 많았다면 그런 사이비 교주들이 판을 치는 일도, 단지 순수한 믿음을 가졌을 뿐인 수많은 희생자들이 발생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신의 실재 여부는 과학으로 판단하기 어렵다. 따라서 현대사회에서는 지식과 믿음을 분리하는 태도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져 왔다. 신이 존재한다고 해도 신의 뜻과 섭리를 일개 인간이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우주를 창조한 신이 개인의 소소한 소망에 반응할 거라는 기대는 어떤 면에서도 그다지 설득력이 없다. 그러한 존재를 전조작기 수준의 인지로 믿으라고 요구하는 것은 많은 부작용을 낳는다는 사실을 현대사회의 신앙인들은 깨달아야 한다. 

전조작기란 발달심리학자 장 피아제의 용어로서 대략 2세에서 7세 수준의 인지발달 단계를 말한다. 전조작기는 사물의 상태가 달라져도 그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는 보존개념을 깨닫기 전이며, 나의 관점 외에 다른 사람들의 관점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문자 그대로 ‘어린아이와 같은’ 인지 수준을 말한다. 

한민 문화심리학자
문화라는 산을 오르는 등반가. 문화와 마음에 관한 모든 주제를 읽고 쓴다. 고려대에서 사회및문화심리학 박사를 했다. 우송대 교양교육원 교수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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