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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치게 뜨거웠던 융합의 위태로움
지나치게 뜨거웠던 융합의 위태로움
  • 이덕환
  • 승인 2023.03.28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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學而思_ 이덕환 편집인 / 서강대 명예교수. 화학·과학커뮤니케이션

 

이덕환 편집인

 융합과 통섭의 열기가 뜨거웠던 때가 있었다. 융합을 표방하는 학과들이 우후죽순처럼 등장했다. 융합을 강조하는 지식경제부가 등장했고, 교육부도 창의적 융합인재 양성을 지향하는 STEAM을 들고나왔다. 융합만 앞세우면 만사형통이었다. 낯선 과학 용어를 들먹이는 인문사회학자와 동서양의 철학자‧시인의 이름을 자연스럽게 입에 올리는 과학자‧공학자들이 당당하게 석학의 반열에 올랐다.

그런데 융합‧통섭의 성과가 도무지 분명하지 않다. 대학에서 문과와 이과의 장벽은 여전하다. 고등학교의 교육과정과 수능을 문‧이과 통합형으로 바꿨는데도 대학의 현실은 요지부동이다. 인류학과와 경제학과는 여전히 문과로 분류된다. 고(古)생물학과 거시경제학에 관심을 가진 학생들에게는 몹시 고통스러운 일이다. 떠들썩하게 만들어놓은 융합학과와 융합대학원도 존재감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물론 대학에도 작은 변화의 조짐이 나타나고 있기는 하다. 실제로 문과 계열의 학생들이 이과 계열의 과목을 수강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특히 코딩 과목에 대한 열기가 뜨겁다. 영어만 잘하면 출세가 보장된다고 믿었던 10년 전의 황당한 망령이 되살아나고 있는 셈이다. 그마저도 융합‧통섭의 결과라고 할 수도 없다. 이과 졸업생을 선호하는 취업 시장에 적응하기 위한 학생들의 절박한 몸부림이 만들어낸 변화일 뿐이다.

어설픈 융합‧통섭의 부작용도 만만치 않다. 인간과 자연의 정체‧역사‧미래에 대한 깊은 고민이 자극적이고 감성적인 궤변에 밀려나고 있다. 인류의 피와 땀으로 이룩해놓은 엄중한 인문학과 자연과학이 대중화의 탈을 쓰고 희화화(戲畫化)되고 있다. 그래서 ‘지구가 몸살을 앓고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넘쳐난다. 실제로 몸살을 앓고 있는 것은 ‘지구’가 아니다. 심각한 위기에 처한 것은 지구의 표면에서 어렵사리 살아가고 있는 ‘인간’이라는 명백한 진실이 철저하게 무시되고 있다.

현대 과학의 개념과 용어의 오남용도 심각하다. 양자역학의 ‘불확정성’(uncertainty)과 ‘이중성’(duality)이 철학적 담론의 주제가 돼버렸다. ‘엔트로피’(entropy)가 언제나 증가하는 것으로 잘못 소개되고 있다. ‘평형’(equilibrium)과 ‘균형’(balance)의 구분하지 않는다. 비평형 열역학의 ‘자기 조직화’(self organization)가 사회학의 핵심 이론으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정치와의 담합에 맛을 들인 대기과학‧기후학이 ‘인류세’를 앞세워 지질학을 파고든다. 현대 과학이 자연을 파괴하고, 인간성을 말살했다고 우기는 어설픈 인문학자들이 인류세에 열광한다.

합리성‧객관성을 추구하는 과학의 개념과 용어는 지나칠 정도로 엄격하고 분명하게 정의된다. 복잡한 과학에 대한 소통을 가능하게 만들기 위한 노력의 결과다. 과학 용어의 임의적·자의적 해석은 허용되지 않는다. 어쩔 수 없이 애매하고 모호할 수밖에 없는 상상력의 산물인 인문학의 경우와는 매우 다른 특성이다. 실제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유’와 윤석열 대통령이 강조하는 ‘자유’는 상당히 다른 개념이다.

어설픈 융합형 석학에 의한 소모적인 혼란도 심각하다. 인문사회계 학생들의 필독서가 돼버린 『엔트로피』가 대표적인 경우다. 스스로를 ‘경제학자’가 아니라 ‘행동가’라고 밝히는 제레미 리프킨이 열역학에서 ‘고립계’(isolated system)을 뜻하는 ‘우주’(universe)를 실제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으로 착각해버렸다. 실제로 추운 날 저절로 얼음이 얼 때는 명백하게 엔트로피가 오히려 줄어든다. 엔트로피가 언제나 증가한다는 리프킨의 전제는 현실과 맞지 않는 것이다. 온 나라를 시끌벅적하게 만들었던 클라우스 슈밥의 ‘제4차 산업혁명’도 정확한 근거를 찾기 어려운 것이다.

사실 융합과 통섭은 일제가 우리에게 남겨준 ‘문과’(인문계)와 ‘이과’(자연계)의 강고한 장벽에 대한 때늦은 반성에서 시작된 일이다. 그런 융합‧통섭을 과도한 환원주의를 강조하는 현대 생물학 중심의 흡수·통합 시도라고 우기는 모습은 절망적이다. 도가(道家) 사상에 관심을 보였던 프리초프 카프라와 전일주의(holism)를 닮은 비평형 통계열역학을 창시한 일리야 프리고진을 최고의 과학자로 신봉하던 ‘한국판’ 신(新)과학이 진화한 결과이기도 했다.

이제 현란한 구호만 앞세운 무늬만의 융합‧통섭은 설 자리를 상실해버렸다. 21세기의 시대정신이고 인문정신으로 자리잡은 ‘과학정신’이 융합과 통섭의 새로운 목표가 되어야만 한다. 비판적 이성과 실증적 증거에 바탕을 둔 열린 자세로 무장해야만 진정한 융합과 통섭이 가능하다는 뜻이다.

이덕환 편집인
서강대 명예교수 / 화학·과학커뮤니케이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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