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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랑 끝으로 내몰리는 노동자
벼랑 끝으로 내몰리는 노동자
  • 신희선
  • 승인 2023.03.27 08:4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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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깍발이_ 신희선 숙명여대 기초교양대학 교수·정치학

 

신희선 숙명여대 교수

“경직된 52시간제로는 디지털 시대 글로벌 경쟁에 대응할 수 없다”는 이유로 노동부가 내놓았던 69시간 근로시간 개편안이 MZ세대의 싸늘한 여론에 좌초하고 말았다. 대통령실은 노동약자를 위한 개편이라고 역설하며 주당 최대 노동시간의 조정을 지시했다.

이런 상황에서 국토부 장관은 전국의 건설현장에서 타워크레인 불법행위를 특별점검 하겠다고 나섰다. “타워크레인에서 내려와 30분, 1시간을 허비하는 것은 성실의무 위반”이라며 ‘운행기록장치’를 장착해 시간 내 작업을 종료하지 못할 경우, 태업으로 간주해 면허를 정지시켜 버리겠다고 했다.

장시간 노동으로 악명을 떨치고 있는 우리나라는 이미 휴일·휴가도 반납하고 일만 하다 죽는 과로사회로 전락하였다. 35m의 ‘높고 좁은’ 크레인 공간이 노동자들의 고공농성 현장이 되기도 했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노동문제를 보며 이 땅의 노동자들이 벼랑 끝으로 내몰리고 있는 건 아닌지 생각한다. 

한국의 노동 시계가 거꾸로 가고 있다. 노동자의 근무시간이 주 55시간을 넘지 않아야 한다는 WHO의 권고는 오래 전 의미를 상실해버렸다. 2021년 기준으로 한국의 노동자는 1,915시간을 일했다. OECD 연평균 1,716 시간을 훌쩍 넘어선 것이다. 노동시간이 가장 짧은 독일의 1,349시간과는 비교조차 어려운 형편이다. 법으로 보장된 연차휴가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고 있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2022년 전국 일-생활 균형 실태조사’에 따르면 법적으로 보장된 휴가를 5일이나 사용하지 못했다. ‘연차수당으로 받기 위해’(20.1%), ‘대체인력이 부족해서’(18.3%), ‘업무량 과다’(17.6%) 등의 이유로,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또 다시 일을 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바짝 몰아서 일하고, 몰아서 장시간 쉴 수 있다’는 정부의 말은 사실상 어불성설이다. 유연·탄력근로제라는 이름으로 노동시간은 연장될 것이 분명하다. 경영자가 이를 악용할 경우 노동자의 삶은 더욱 피폐해질 것이다. 

노동자의 권리가 무너지고 있다. 정부의 기업 중심 정책 구도에서 노동자는 점점 투명인간이 되고 있다. ‘노동개혁’을 운운하며 노조의 회계장부를 들추고 압수수색으로 노동자 집단을 밀어붙여도 그들의 목소리는 우리에게 잘 들리지 않는다. 노동자가 자신의 존엄성을 훼손당하지 않도록, 그들의 자유와 주체성을 위협받지 않도록 하는 것이 정부의 역할인데, 거꾸로 노동부가 나서서 노동자의 권리를 훼손하고 있다.

일하는 현장 곳곳이 기계화, 자동화, 무인 로봇 등으로 인간 노동을 대체하는 시대에, 장시간 노동은 여전히 일상이 되고 일과 삶의 워라밸은 아득히 멀기만 하다. 특히 건설 및 제조업의 경우 장시간 노동은 가뜩이나 취약한 안전문제를 더욱 심각하게 만들 것이다. 

“한국의 노동자에게는 최소한의 노동조건을 지킬 방법이 법밖에 없다.” 그러나 한진중공업 사태 때 크레인에 올랐던 『소금꽃 나무』의 김진숙은 법이 권력의 편이라고 했다. “법이 노동자에 대해서 단호한 만큼 권력에 대해서도 그렇게 냉정하고 단호했으면 좋겠어요. 노동자들에 대해선 가차 없기가 추상같지 않습니까? 만날 힘없는 사람들에게만 호통 치지 말고 진짜 단호할 데서 단호했더라면 이 땅에 부정과 비리는 애초에 근절되지 않았겠습니까.”

이처럼 노조 상생의 문화가 뿌리내리지 못한 한국 사회에서 법은 과연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 것인지, “미래 세대의 운명”을 위한 개혁이라고 현 정부가 강조하는 ‘자유’의 깃발은 무엇을 위해 나부끼는 것인지 묻게 된다.  

벼랑 끝으로 밀려나고 있는 노동자의 삶이 위태롭다. 노동자의 처지를 이해하고 공감해주는 사회적 지지가 절실하다. “사램이 오죽하면 글겄냐.” 정지아는 『아버지의 해방일지』에서 “민중이 마늘 반접 따위 훔치지 않고도 배곯지 않는 새로운 세상을 꿈꾸었던” 아버지의 장례식을 치르며, 진작 아버지 말을 들을 걸 그랬다고 말한다.

조금도 나아지지 않는 현실, 미래도 크게 달라지지 않을 노동자의 불안한 삶을, ‘오죽하면 그럴까’ 먼저 헤아리는 마인드가 없는 권력 엘리트가 지배하는 지금, 생계를 꾸리느라 고단한 현장을 떠나지 못하는 이들, 높고 좁은 작업장인 크레인에서 위험노동을 하는 이들을 위한 정의롭고 평등한 나라는 잃어버린 꿈이 되고 있다. 

신희선 숙명여대 기초교양대학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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