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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침없이 내성적인
거침없이 내성적인
  • 최승우
  • 승인 2023.03.21 17:3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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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자켓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73쪽

“우리 사이는 극명해지고
그 쓸쓸한 거리를 걸을 테니까”

여기에는 관계의 변화, 대립, 이별, 갈등 해소가 없다
교훈이나 주장도 없다

단순하면서도 자욱한 문장들, 이자켓 첫 시집 출간

유별나지 않아도 괜찮다.
신경 쓰지 않아도 돼.
그냥 걷자.
거리가 길어서 오랜 시간 걸을 수 있어.
_대산대학문학상 당선 소감 中

2019년 대산대학문학상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한 이자켓의 첫 시집 『거침없이 내성적인』이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되었다.

“단순하면서도 자욱한 문장들을 따라가다보면 어느새 시 속의 일원이 되”어버린다는 심사평과 함께 등장한 이자켓은 특유의 군더더기 없는 담백함으로 시의 세계를 비틀지 않고 정면으로 직진한다.

축구장, 영화관, 이발소와 같은 생활의 공간에서 불쑥 튀어나온 화자 역시 어떠한 설명도 덧붙이지 않고 자신이 하던 일을 이어가는 데만 집중한다.

그래서일까. 일상 언어로 이루어진 시 세계는 눈으로 따라 읽는 데에는 어려움이 없지만, 자꾸만 읽는 이를 긴장하게 만든다.

그건 이자켓의 작품이 “바로 여기 감동이 아닌 감동이며, 새로움이 아닌 새로움이고 익숙함에서 끄집어낸 다름에 있(강성은, 박소란, 유희경)”기 때문이다.

이자켓이 펼쳐 보이는 시의 세계는 한밤에 도로를 질주하는 라이더의 재킷처럼 그 무게가 가볍고 행동거지가 가뿐하기만 하다. 그는 잘 알지 못하는 세계의 낯섦을 연기하거나 이해하지 못한 단어를 애써 끌어다 쓰지 않는다.

부를 나누지 않고 뚜벅뚜벅 이어지는 40편의 작품은 아주 오랫동안 질주하던 사람이 자기가 오래전에 떠나온 길의 출발점으로 돌아와 걷는 것처럼 정직하기만 하다.

당선 소감에서 “하던 대로 하겠다 [......] 유별나지 않아도 괜찮다”라고 말한 시인은 시에서만큼은 욕심을 부리지 않는다.

이자켓은 시를 걷는 사람이다. 그 길이 길고 혼잡할수록 오래 걸을 수 있어 좋다며 묵묵히 걷는 사람이다. 낯설지 않은 풍경으로 들어가 앞을 보며 계속해서 걷는 그를 보면 거침없이, 내성적인 세계로 가지 않을 이유가 없다.

최승우 기자 kantmania@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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