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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철학, 과학기술과 지구위기에 대응할 방법과 방향을 고민해야” 
“한국철학, 과학기술과 지구위기에 대응할 방법과 방향을 고민해야” 
  • 최재목
  • 승인 2023.03.22 08:4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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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우진·조성환 교수 서평에 답하다③ 한국철학의 위상과 과제(끝)

지난 1월 3일자 <교수신문>에, 이우진(공주교대 교수·교육철학)·조성환(원광대 동북아시아인문사회연구소 HK교수·한국철학) 두 교수가 최재목 영남대 교수(철학과)의 『비교양명학: 한중일 삼국의 시야에서』(2022년, 상해 고적출판사 간행)를 읽고 서평을 실었다. 서평 마무리 부분에서 두 교수는 저자에게 세 가지를 질문했다. ‘기후변화 시대, 동양철학의 비전은 있는가?’와 ‘한국에서 인문학 하는 태도 문제’에 이어 마지막 세 번째 질문 ‘한국철학의 위상과 과제’에 대한 최재목 교수의 답변을 싣는다. 

이우진·조성환 교수의 세 가지 질문은 이렇다. 
①전통 동양철학의 현재적 의미 : 생태위기와 기후변화로 지구에서의 거주가능성 자체가 문제 되고 있는 오늘날, 유학은 인류에게 어떤 비전을 제시할 수 있는가? 

②한국에서 인문학 하는 태도 문제 : 한국의 인문학은 여전히 ‘유럽중심주의’라는 열등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철학의 중심은 항상 ‘서양’이고, 비서구지역의 철학은 ‘주변’에 밀려나 있다. 이 ‘기울어진 철학’의 현장을 우리는 어떻게 바로잡을 수 있는가?

③한국철학의 위상과 과제 : 오늘날 한국철학 연구자들은 과연 얼마나 수준 높은 연구를 학계에 제공하고 있는가? 여전히 한문 번역 중심의 경학적 연구가 중심이 아닌가? 그래서 대중이 외면하는 것 아닌가?

 

한국철학의 다양한 결실들은 결국 ‘한국학’으로 귀착한다.

과거 중국(이나 대만)의 학술과 한학, 일본의 동양학,

서구세계의 아시아 연구 성과를 토대로 개척해 온 한국철학은

이제 첨단 과학기술과 지구적 위기에 직면하여 진일보 진화하며 내실을 기할 숙명에 처해 있다.

한국철학의 수준? 대중의 외면? 

조성환·이우진 교수의 이번 질문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먼저, “오늘날 한국철학 연구자들은 과연 얼마나 수준 높은 연구를 학계에 제공하고 있는가?”이다. 여기에는 일단 ‘어느 정도 그렇다’라고 해두고 싶다. 지난 두 번째 답변에서 한국철학 나아가 한국학이 이미 국제적인 무대에 진입한 경우를 살펴보았다. 물론 미시적으로 “어느 분야가 어떤가?”는 다시 구체적으로 살펴봐야 할 것이다. 

다음 질문은 “(한국철학은) 여전히 한문 번역 중심의 경학적 연구가 중심이 아닌가? 그래서 대중에게 외면받는 것이 아닌가?”이다. 여기서 ‘한문 번역 중심의 경학적 연구’(a)와 ‘대중의 호응’(b)은 양립할 수도 있고, 또한 연계될 수도 있다는 점을 미리 언급해 두고 싶다. 다시 말해서 a는 a대로, b는 b대로 심화될 수 있기도 하고, a의 성과가 b로 연결될 수도 있다는 말이다. 이 대목도 좀 더 구체적인 예를 들어 설명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 말하는 ‘한국철학’은 ① ‘한국 지역 내에서 이루어진 혹은 이루어지고 있는 모든 철학적 작업’을 통칭하거나 ② ‘한국의 전통 철학사에서 다루는 인물들의 철학’에만 국한해야 한다. 일단 이번 답변에서는 후자에 국한하되, 경우에 따라서는 ①의 범위 내에서 동양철학 내지 그에 준하는 범주까지 고려해보기로 한다. 

과거 우리나라에서 철학하는 학자들의 고민이 담긴, 한국의 철학하는 수준을 가늠할만한 책으로 『한국에서 철학하는 자세들 : 철학연구 방법론의 한국적 모색』(심재룡 외. 집문당, 1989)이 있다. 이 책을 넘어설 새로운 버전의 작업이 지금 절실히 요구된다.

<교수신문> 1월 2일자 5면에 실린 이우진, 조성진 교수의 서평

레세페르 vs 정책적 관여의 균형을 

학문의 발전은 규제와 간섭보다는 기본적으로 ‘레세페르’(각자 알아서 하는 대로 내버려 둬라!)의 자유방임에서 원동력이 생겨난다고 본다. 그런데 이것이 효력을 발휘하려면 이른바 ‘학문 시장’에서 ‘완전한 자유경쟁’이 전제되어야 한다. 국가와 권력이 ‘감 놔라 대추 놔라’해선 안 된다. 

물론 경우에 따라서 반드시 레세페르에만 머물러서도 안 된다. 내버려 두는 것만이 최선은 아니라는 말이다. 학문의 내용, 시급성, 중대성, 규모에 따라 국가적 정책적 도움이 필요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수 희귀 분야의 연구, 국제적 성과를 낼 연구, R&D 같은 응용적 융복합 연구를 위해서는 정책적 기획의 견인이 필요하다.

현재 한국연구재단의 지원 같은 국가 차원의 연구비 흐름이 창의성과 집단지성적 협업을 촉진시켜 탁월한 연구와 집약적 대규모 사업을 성공시킬 수 있다. 예컨대 고전 번역이든 한국학의 국제화든 돈 없이 머리로만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따라서 자유방임과 규제의 균형이 필요하다고 본다. 이 점에서 한국철학의 미래도 마찬가지라 하겠다. 

한국철학 성과에 대한 소략한 회상 

희랍의 필로소피아(philosophia)를 잇는 필로소피(philosophy)가 일본의 계몽주의/실증주의 철학자 니시 아마네(西周. 1829-1897)에 의해 ‘희현학(希賢學)→희철학(希哲學)→철학(哲學)’의 과정을 거쳐 근대 이후 동아시아 전역에 ‘○○철학’, ‘철학과’로 ‘제도적 지(知)의 형식으로 정착해왔다. 

우리 전통에 없던, 일제의 번역어를, 그것도 서양에서 탄생한 지식 장르를 수입하여 일본철학계의 영향 하에 ‘경성제국대학’에서 ‘데·칸·쇼와 헤겔변증법’을 발신하였다. 그 이래 ‘철학’이라는 이름을 달고 세상에 횡행하는 이 지적(知的) 현상을 우리는 지금 어떻게 반성하고 있는가?

서구화, 세계화라는 명분에 서양철학은 “한국에 무슨 철학이 있어? 그게 철학이야?”라며 진리의 지역성을 넘어선 보편성을 무기로 거들먹대왔다. ‘벚꽃 피는 순서대로 대학이 망한다’는 괴소문처럼, 틈만 나면 철학과를 없애려는 대한민국의 많은 대학들의 기획 앞에 솔직히 필자는 불편하고 씁쓸하다. 왜냐하면 ‘일제의 잔재 + 근대 서구(→서양철학)의 그림자’라는 이중의 칙칙한 얼룩 때문이다. 

그럼, 어떻게 할 것인가? 개명할 것인가? 그대로 밀고 나갈 것인가? 답도 없이 그냥 ‘철학, 철학…’하며 앵무새처럼, 말끝마다, 습관적으로, 지껄여대긴 하나…. 미래가 불투명할 때는 성급한 예측이나 망상은 접고, 감당 가능한 능력과 실천 내에서 선한 연쇄작용을 기대하여 사유하고 실천해가야 마땅하다. 

다행히 한국철학이 걸어온 길을 돌이켜 본다면 무위도식했던 것은 아니다. 힘겨운 노력과 성과가 많았다. 학술의 깊이 또한 갖게 되었다고 자부한다. 오늘에 이르기까지 한국철학계의 작업 가운데 (필자의 소견에서) 두드러진다고 판단되는 것을 소개해보면, 철학, 중문학, 한문학, 서지학 등과 협업하며 많은 진척을 가져온 것이 사실이다. 

특히 중국 고대 출토 문헌 연구가 국제적인 경지로 나아가고 있다. 예컨대 『죽간 목간 백서, 중국 고대 간백자료의 세계』(2013)를 간행한 바 있는 이승률 교수(경북대 철학과)는 일본의 대동문화대(大東文化大) 이케다 도모히사 교수(池田知久, 전 도쿄대 교수)와 협업으로 마왕퇴출토문헌 역주총서(상·하)를 최근 간행하였다(일본 東方書店, 2022. 현재 한글 번역 중).

최남규 교수(전북대 중문과)는 형주시(荊州市) 박물관에서 나온 『곽점초묘죽간』을 번역한 바 있다(2016). 자료를 발굴하고 실증적으로 연구하는 작업의 수준은 절대 단시간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필로소피가 필로로기에 근거하여 다양한 기초학술과 해석학적 순환을 거쳐야 깊이 있는 사상사를 재구축할 수 있다. 

조선 유학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경전과 철학사상의 내용을 도상(圖像)으로 표현한 것인데, 이 분야의 연구가 국제적인 단계로 진척되었다는 점이다. 예컨대 한국사상연구회의 『도설로 보는 한국유학』(2000), 최석기 교수(경상대 한문학과)의 『조선시대 중용도설』(2010)과 『조선시대 대학도설』(2012), 유권종 교수(중앙대 철학과)의 『한국 유교 도상의 역사』 등은 한국 유학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걸작이다. 

그리고 사상사 정리에도 큰 자신감을 드러내는 작업을 들 수 있다. 최영성 교수(한국전통문화대)는 고대부터 현대까지의 한국유학사를 『한국유학통사』(상·중·하)(2022)로 총정리하였다(1994-1997년에 낸 『한국유학사상사』 전5권을 개명). 이기동 교수(성균관대)는 동아시아 유학(한중일과 베트남)의 전체적 구조와 흐름을 조감한 『유학 오천 년』(전5권)을 간행하였다. 

최근 동학 분야에서는 조성환 교수(원광대)가 『한국 근대의 탄생 - 개화에서 개벽으로』(2018), 『하늘을 그리는 사람들 - 퇴계·다산·동학의 하늘철학』(2022) 등 동학에 근거하여 연구를 확장시키고 있다. 덧붙인다면 동학의 작업처럼, 혜강 최한기의 통(通)의 철학을 혁신적으로 발전시킬 안목도 필요하다.

아울러 김정현(원광대 철학과) 교수 외 엮음의 『동북아, 니체를 만나다 -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동북아시아 사상의 전이와 재형성』, 백영서 교수(연세대) 엮음의 『개벽의 사상사 - 최제우에서 김수영까지, 문명전환기의 한국사상』(2022) 같은 작업은 향후 한국철학의 방향이 누구와 어떻게 협업해야 하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나아가 서양철학과 동양 및 한국 철학이 ‘체화인지’를 주제로 협업한 결과물도 돋보인다. 전남대 철학과 노양진 교수를 중심으로 한 BK21플러스 횡단형철학전문인력양성사업단의 『몸과 인지』(2015), 그리고 이영의 교수(고려대) 외의 『체화된 마음과 몸』(2022) 등이 그것이다. 

여기서는 단지 몇 가지 필자의 머리에 떠오른 표본적인 예만을 들었다. 따라서 이외에도 많은 전문적인 영역에서 한국철학의 진척이 있었다고 평가할 만하다. 일찍이 ‘고등과학원 초학제연구’의 결과물로 나온 김상환(서울대 철학과) 엮음의 『동서의 학문과 창조 - 창의성이란 무엇인가?』 (2016) 외 일련의 작업은 주목할만하다. 동서 학문의 경계를 넘어 지평의 융합을 도모하는 초학제적 노력에서 한국철학의 가야 할 길과 디테일한 방법론을 엿보게 한다.

마지막으로 고전 번역과 대중성의 문제이다. 한 마디로 번역은 번역대로 더 깊어져야 한다. 아울러 이에 기반하여 대중화는 대중화대로 논리를 갖고 더 진척되어야 마땅하다. 양자는 서로 연관될 수 있지만 완전히 일치하지 않을 수 있다. 그렇다고 양자가 완전히 분리됨을 의미하지는 않고, 서로 긴장 관계를 가지며 상생해야 한다. 

예컨대 한국양명학계에서 김세정 교수(충남대 철학과)가 꾸준히 추구해온 생태학적 탐색(『돌봄과 공생의 유가생태철학』)은 현대적 음미를 기반으로 충분히 대중적으로 계승되고 있다. 그리고 주역을 새롭게 살린 이용주 교수(광주과학기술원)의 『주역의 예지』(2021)에서 보듯이 고전 번역의 충실성과 학문의 깊이 내에서 대중성이 살아난다.

그래서 한국철학의 대중성은 그 스스로를 드러내는 방향과 숙달된 방법으로 실현될 수 있다고 하겠다. 어려운 내용들을 알기 쉽게 대중의 눈높이와 느낌 속으로 가 닿도록 워딩, 스토리텔링하는 기법은 한국철학자 자신이 부단히 절차탁마해야 할 사안이리라. 

이런 한국철학의 다양한 결실들은 결국 ‘한국학’으로 귀착한다. 과거 중국(이나 대만)의 학술과 한학(漢學), 일본의 동양학, 서구세계의 아시아 연구 성과를 토대로 개척해 온 한국철학은 이제 첨단 과학기술과 지구적 위기에 직면하여 진일보 진화하며 내실을 기할 숙명에 처해 있다.

포스트 휴먼·지구위기 시대의 한국철학

시대가 변할수록 - 개인의 영웅적, 천재적인 작업도 가능하지만 - 연구 내용에 따라서 AI, 빅데이터 등 첨단 과학기술의 도움이 절실한 곳도 있다고 본다. 최근 ‘한문고전 자동번역서비스’ 같은 것도 생겨나고, 한문 탈초(脫草) 작업도 광학 문자 인식(OCR) 엔진(또는 소프트웨어)에 의해 추진될 전망이다. 시급성을 요하는 전문 연구에서도 어느 정도까지는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으로 전망된다. 

요즘 뉴스에서 자주 접하는 건으로, 미국 ‘오픈AI’사가 만들고, 마이크로소프트사가 투자해서 진화시킨 인공지능(AI) 챗봇 ‘챗GPT’가 화제이다. 한글 버전으로는 네이버의 인공지능 '하이퍼클로바'가 있다. 이것은 현존하는 최고 인공지능 기술인 'GPT-3'을 뛰어 넘는다고도 한다.

이런 생성형 인공지능이 인간을 대신하여 글도 쓰고 그림도 그리고 노래도 부르고, 나아가 전문적인 논문도 작성하고 강의도 하는 등 인간과 협업하는 동반자로서 한국철학 내에도 깊이 침투해 올 수 있다. 그 추세를 기꺼이 받아들이며 나아가야 한다고 본다. 

그래서 다시 ‘인간은 누구이며’, ‘우리는 어디에 있고’,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물으며 포스트휴먼 시대와 함께 호응하는 길을 구상할 수 있을 것이다. 이때 새로운 형태의 ‘사단칠정론’, ‘인물성동이론’ 같은 주제들이 새 옷을 바꿔입고 등장할 수 있지 않을까. 여기에 기후와 지구 위기 시대의 철학적 번민까지 스스로의 과업으로 감수하며 한국철학을 시대에 맞게 성장시켜 가야 한다. 이럴 때 전통적 한국철학 주제들은 현실과의 ‘만남’ 그리고 상호침투와 공명으로 창신(創新)할 것이다.

최재목 영남대 철학과 교수
일본 츠쿠바대에서 석·박사학위를 받았다. 전공은 동양철학(양명학), 넓게는 동아시아철학사상문화비교다. 한국양명학회장과 한국일본사상사학회장 등을 지냈다. 저서로 『동아시아 양명학의 전개』 『내 마음이 등불이다: 왕양명의 삶과 사상』 『노자』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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