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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와 반목했던 한국 기독교, 반공주의로 진화
국가와 반목했던 한국 기독교, 반공주의로 진화
  • 최승우
  • 승인 2023.03.15 08: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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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 열린연단 ‘자유와 이성’ ㊴ 김흥수 목원대 명예교수(신학과)

네이버 ‘열린연단’이 시즌9를 맞이해 「자유와 이성」을 주제로 총 44회 강연을 시작했다. ‘자유’를 중심으로 인간과 자연의 본성, 재난과 질병에 대한 제약과 해방 등을 역사, 정치, 철학, 과학기술 등 다양한 학문 분야에서 살펴본다. 지난달 18일 김흥수 목원대 명예교수(신학과)가 「한국에서 근대적 자유와 기독교」를 강연했다. 주요 내용을 요약·발췌해 소개한다. 제40강은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정치학과)의 「자유주의적 민주주의의 위기: 비자유주의적 민주주의의 부상」, 제41강은 박명림 연세대 교수(지역학협동과정)의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적 역학 관계」, 제42강은 전재성 서울대 교수(정치외교학부)의 「자유주의적 국제 질서의 위기」가 예정돼 있다. 
자료제공=네이버문화재단
정리 최승우 기자 kantmania@kyosu.net

반공주의가 상대적으로 강한 보수 교회들은 진보 교회들의 통일 운동을 우려했다. 
한기총의 등장 이후 개신교는 오늘날 한국 보수주의의 핵심적 생산처로, 
반공적 자유민주주의의 요새로 자리 잡고 있다.

한국 기독교의 역사는 한반도에서 자유주의의 대의를 구현해 온 역사였으며, 이것은 천주교와 개신교 모두에 해당된다. 자유의 확보는 국가와 관련됐으므로 천주교와 개신교 양자 모두 국가와 싸울 수밖에 없었다. 이 싸움은 18세기 후반부터 시작됐다. 한국 기독교사는 교회와 국가의 관계사이기도 했다. 

한국 기독교의 역사에서도 정치권력과 종교 공동체의 관계는 천주교 수용 처음부터 문제가 됐다. 천주교가 수용될 당시 조선 왕조는 성리학을 정학(正學) 및 국가의 지도 이념으로 삼았다.

정학에 위배되는 사상과 종교는 이단사설로 규정되고 이에 대한 탄압이 자행됐다. 조선 사회에 새롭게 전래된 천주교 신앙도 척사위정론에 근거해 조선 성리학과 조선 왕조로부터 배척받게 됐다. 

의례와 교의에서 자치권을 주장하는 천주교회와 이를 거부하는 조선 정부 간의 충돌은 한 세기 동안 계속됐다. 천주교보다 정확히 한 세기 후에 수용된 개신교는 어떻게 한국에서의 근대 시민사회 형성의 동력이 됐을까? 개화기 한국에서 가장 포괄적이고 직접적으로 서양 문명을 전파한 사람들은 선교사들로 사회 도처에 자유의 입김을 불어넣은 것도 그들이었다. 

1910년 일제강점기가 시작되면서 기독교는 1911년에 일어난 105인 사건과 1919년 3·1 운동에서 조선총독부가 크게 충돌했는데, 이 두 사건에서 기독교인들이 종교의 자유나 시민의 자유를 어떻게 언급했는지 분석하는 글은 아직 없다.

기독교는 종교와 관련된 문제, 즉 사립학교법, 신사 참배, 종교단체법 문제로 조선총독부와 충돌했다. 이 세 사건들은 일제의 대표적인 종교 간섭 사례였다. 교회에서는 이것들을 대하는 과정에서 비로소 종교의 자유, 정교 분리 문제를 제기했다.

일제의 종교 정책은 표면적으로는 종교 자유를 보장했지만, 국가주의적인 정책이었으며, 교회는 이 정책에 시달렸다. 이 상황에서 한국은 해방을 맞이했고 1948년 제헌 헌법에 미국식 정교 분리와 비슷한 종교 조항이 생겼다.

김흥수 목원대 명예교수(신학과)는 “한국 기독교인들은 기독교에 적대적이고 비우호적이었던 조선 시대와 일제강점기를 거쳤다”라며 “그들은 국가의 권위, 국가의 종교 간섭, 종교의 자유, 양심의 자유같은 문제를 생각하기 시작했다”라고 설명했다. 사진=네이버문화재단

종교의 자유, 국교, 정교 분리를 언급한 종교 조항은 제정 과정에서 헌법기초위원회와 국회에서 제법 많은 논의가 진행됐는데, 종교 조항에 대한 논의는 주로 기독교인 의원들이 주도했다.

1970년대부터 1980년대에 걸친 시기는 한국 역사상 처음으로 종교의 정치 비판 문제로 정교 분리 논쟁이 벌어진 시기였다. 근대 인권 운동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의 절망으로부터 탄생했다. 세계 대전을 겪으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됐으며, 전쟁터와 강제 수용소에서는 그 어디에서도 자유와 평등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런 절망의 세계에서 모든 사람의 자유와 평등한 권리와 존엄을 말하는 세계인권선언이 만들어졌다. 인권 중시 경향은 1940년대 이후 세계 개신교를 이끌어 온 세계교회협의회의 에큐메니컬 운동에서도 나타났다. 1970년 전후로 에큐메니컬 운동은 교회들은 제3세계가 직면한 문제에 초점을 맞췄으며 1970년대 중반부터는 해방신학의 영향하에서 종교자유보다는 사회적, 경제적 권리에 더 큰 관심을 가졌다

기독교 사회 운동 세력들은 남한 사회의 자유와 인권의 보장, 그리고 사회 정의가 이뤄져야 한다고 봤으며 그래서 민주화와 인권 수호가 중요한 과제가 됐다. 교회가 한국 사회의 이런 문제들에 직접 뛰어든 것은 박정희 정부의 유신 헌법과 함께 찾아왔다. 

한국 기독교교회협의회는 1974년 5월 ‘인권의 유린을 방지 또는 제거하는 책임’을 수행하기 위해 인권위원회를 창설했다. 박정희 정권은 반공 이데올로기를 이용해 민주화 운동을 탄압하는 경우가 많았고 민주화 운동 진영에서는 이를 인권 운동으로 대응했다. 한국 기독교교회협의회 인권위원회가 조직된 직후 한국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조직됐다.

정의구현사제단은 19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원주 교구장 지학순 주교가 구속되자 1974년 9월 조직됐으며, 명동성당에서 열린 창립 기도회에서 유신 헌법 철폐와 민주 헌정 회복, 긴급조치의 전면적인 무효화, 국민의 생존권과 기본권 존중, 서민 대중을 위한 경제정책 확립을 요구하는 선언문을 발표했다. 

1978년 이후에는 개신교와 천주교를 포함한 기독교계의 인권 운동은 시민사회와의 연대로 확장됐다. 한국 기독교교회협의회의 정치적 인권 운동은 온건한 사회 개혁 노선이었다. 교회의 반공 노선의 역사는 길다. 반공 노선은 1920년대에 형성됐으며, 1930년대가 되면 교회가 만든 사회신경에도 들어갔다.

1932년에 만들어진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의 사회신경(12조)은 “일체의 유물 사상 계급적 투쟁 혁명 수단에 의한 사회 개조와 반동적 탄압에 반대”한다는 반사회주의 노선도 강조했다. 

한국 기독교교회협의회의 선언은 통일 방안을 언급하지 않았으며 따라서 연방제도 언급하지 않았지만, 평화 체제의 수립과 군축, 조건부 미군 철수를 주장했는가 하면, 민족의 대단결을 위한 남북 교류를 요청했다.

이것은 기독교인들의 반공 활동을 한국 사회에 대한 교회의 중요한 봉사로 평가해온 보수 측의 반공 친미적 교회의 반격을 불러왔다.

이렇게 해서 1989년 탄생한 새 연합체가 한국기독교총연합회(이하 한기총)였다. 한기총의 탄생은 월남한 교역자들의 상징적 인물 한경직 목사와 교회 원로들의 모임으로부터 시작됐다. 

한기총은 2003년부터 서울 한복판에서 단독으로 또는 우익 단체들과 연대해 수만, 수십만 명의 개신교 신자들이 참여한 대규모의 정치적 집회를 개최, 한국 우익의 대표로 부각됐다. 한국 교회의 친미 반공주의는 대형 교회의 설교에서도 잘 드러난다. 최근의 한 논문에 의하면 한국 대형교회 설교의 일관된 특징은 반공주의이다. 

한국 기독교인들은 기독교에 적대적이고 비우호적이었던 조선 시대와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국가의 권위, 국가의 종교 간섭, 종교의 자유, 양심의 자유 같은 문제를 생각했다.

천주교인들은 황사영 백서와 정하상의 상재상서 그리고 구속된 신도들의 재판 과정에서, 개신교는 일제의 종교 간섭(개정사립학교 규칙, 종교단체법 제정, 신사 참배 강요)을 겪으면서 이 문제들을 숙고했다. 개신교 선교사들은 특히 신사 참배 강요에 대처하는 과정에서 종교의 자유, 양심의 자유를 언급했다. 

이런 일들은 한국에서 근대적 자유가 뿌리내리는 중요한 계기로 작용했으며, 해방 후에는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헌법의 종교 조항 제정에 관심을 갖게 했다. 이 관심은 1970년대 후반 이후 약 10년 동안 교회와 국가 관계에 대한 관심의 급증으로 나타났다.

1970년대에는 세계 교회의 관심이 종교의 자유로부터 인권으로 옮겨갔으며 국제적 영향 속에서 이런 경향은 한국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였다. 1970~1980년대에 교회의 사회 운동은 대부분 진보 세력의 인권 운동이나 통일 운동을 의미했지만, 보수그룹은 이 운동에 맞서서 대체로 군부 정권의 국가 안보 이데올로기와 반공주의 정책을 지지하는 데 더 관심을 뒀다. 

진보와 보수 교회의 차이는 통일 문제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났으며, 반공주의가 상대적으로 강한 보수 교회들은 진보 교회들의 통일 운동을 우려했다.

그 과정에서 보수 교회의 정치적 입장을 대변하는 한기총이 조직됐다. 한기총의 등장 이후 개신교는 오늘날 한국 보수주의의 핵심적 생산처로, 반공적 자유민주주의의 요새로 자리 잡고 있다. 

개신교의 반공적 자유민주주의는 자유민주주의를 세우려면 공산주의를 막아야 한다는 논리에 근거하고 있다. 한기총은 통일 대화보다는 북한 교회 재건과 북한의 종교의 자유에 더 큰 관심을 표명했다.

최근에는 이 계열에서 다양한 단체들로 구성된 기독교 극우 세력이 형성되고 있다. 한국 기독교의 주류 교회들은 기독교계 신흥 종파나 이단 종파의 종교의 자유에 대해서는 자유주의적 접근이 아니라 교리적으로 접근했다.

오랫동안 주류 교회들은 국가의 간섭을 요청해 이단적 신흥 종파의 종교의 자유를 침해했으며, 양심적 병역 거부 등 양심의 자유에 대해서도 반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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