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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면으로의 초대] 한글정신 기리는 국어학자 허웅 교수
[지면으로의 초대] 한글정신 기리는 국어학자 허웅 교수
  • 김정아 기자
  • 승인 2001.08.13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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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08-13 12:53:37
“1926년에 조선어학회(한글학회의 전신)에서 한글날을 기려 지키기 시작한 것은 우리의 말과 글을 없애려는 일제에 저항하는 수단이었고, 국민에게 우리말의 중요성을 알린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한글날을 기념하지 않는 것은 한글날을 제정했던 역사의 맥락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달 15일에 ‘자랑스러운 서울대인상’을 이희호 씨와 함께 수상하는 허웅 서울대 명예교수는 일제시대에 연희전문에서 수학하며 주시경 선생의 큰 제자 최현배, 김윤경 선생 등을 스승으로 두었으며, 해방 이후 연세대와 서울대에서 가르치며 우리 나라 언어학의 기초를 닦았다. 그의 ‘언어학: 그 대상과 방법’(1981)은 64년에 출판된 ‘국어학개론’의 개정본으로, 우리 나라 최초의 체계적 언어학 학술서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외에도 허 교수는 ‘우리옛말본’(1979)이나 ‘국어음운학’(1985), ‘20세기 우리말의 형태론’(1995) 등 우리 나라 국어학의 획을 긋는 저작을 꾸준히 집필해 왔으며, 대표작 중 하나인 ‘20세기 우리말 통어론’(1999)은 5년여의 준비 끝에 여든이 넘은 나이에 완성된 노작이다.
지금도 그는 ‘형태론’과 ‘통어론’의 수정작업을 진행 중에 있다. 한글학회 회장 겸 이사장을 맡고 있는 허 교수는, 학회사업의 중심은 연구가 되어야 하지만, 말과 글의 바른 길을 모색하고 실천하는 것도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한 일이라고 말한다. 한글학회에서 관심을 기울이는 사업 중 하나는 남북한의 맞춤법 및 표준어의 일원화. 지난 8월 15일 북한의 국어학자 유렬 씨와 만나 남북언어통일의 필요성에 합의한 바 있는 허 교수는, 서로의 말과 글을 나눠 통일의 기초를 닦기 위해서는 남북의 국어학자가 지속적으로 만날 수 있는 장이 하루 빨리 마련돼야 함을 강조한다.

허웅 교수의 중대한 관심사 중 하나는 한글전용의 문제. 허 교수는 한자병용정책을 봉건적 권위주의의 유물이라고 비판하며, 이미 99.9%는 한글전용이 이루어졌다고 평가한다. “글자란 쉬워야 합니다. 글자가 어려우면 글을 배우는 사람이 적어지고, 글을 배우는 사람이 적어지면 민주주의가 발전할 수 없지요. 심지어 중국과 일본에서도 각각 복잡한 한자를 간략하게 표기하는 약자와 간자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가 3천 전에 만들어진 어려운 한자를 사용해야 합니까?”

초등학교 언어교육의 문제에도 관심을 갖고 있는 허 교수는 초등학교에서 한자나 영어를 가르치는 것에 반대한다. 초등학교 기간은 우리말글을 이해하고 표현하는 확고한 기반을 마련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말글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는 아이에게 다른 언어를 가르친다면 효과 없는 부작용만 낳을 뿐이라는 것. 이와 함께 허 교수는 일각에서 제기되는 영어공용화론에 대해서도 심각한 우려를 표명한다. 그의 가장 큰 우려는 언어공용화가 언어의 계층적 차이를 초래할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기존의 계급 관계 위에 언어에 의한 계급이 겹쳐진다면, 그 두터운 벽을 어떻게 극복하겠느냐는 것이다. “영어를 잘 하는 사람에게는 특권을 누릴 기회가 왔는지 모르지만, 나라의 장래를 위해서는 새로운 비극이 아닐 수 없습니다.”이렇듯 우리네 말글살이를 민족사적 운명으로 인식하는 허 교수의 연구자세는 주시경 선생을 비롯한 일본강점기 한글학자들을 연상시킨다. 실제로 그는 지금까지 자신이 행해온 작업이 그들의 정신세계에 감화 받은 바 크다고 술회한다. “19세기 말 나라의 운명이 아침이슬처럼 위태로울 때, 주시경 선생은 나라를 바로잡기 위해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를 고민했습니다. 그에게 한글의 연구와 정리는 민족적 사명이었던 것입니다.”허 교수에게는 한글날이 소홀히 취급되는 작금의 상황도 걱정스럽다.
“한글학회는 1926년부터 지금까지 한글날을 지켜왔습니다.
한글날이 공휴일로 지정된 것은 의외로 전두환 때였습니다.
그 사람이 세종을 알았을 리 만무하지만, 국가차원에서 한글날을 기념하면 한글의 위상도 높아지고 한글에 대한 일반 국민의 인식도 좋아질 터이니 우리는 쌍수를 들고 환영을 했지요. 헌데 노태우 때 한글날을 공휴일에서 빼버렸고, 그때부터 우리는 정부에 대해 비난도 하고 청원도 하고 심지어 민족반역자라는 말까지 써가며 공격도 했습니다.

그러나 정부에선 지금까지 끄덕도 안 해요.”
젊은 국회의원들이 한글날을 국경일로 만드는 작업을 시작하는 요즘, 1926년 첫 번째 한글날(그때는 가갸날)에 한용운이 동아일보에 썼던 글이 새삼 마음에 닿는다. “가갸날에 대한 인상을 구태여 말하자면, 오래간만에 문득 만난 임처럼 익숙하면서도 새롭고 기쁘면서도 슬프고자 하여 그 충동은 아름답고 그 감격을 곱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바야흐로 쟁여 놓은 포대처럼 무서운 힘이 있어 보입니다.”

<김정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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