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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홍규의 아나키스트 열전 130] 소로에 대한 오해와 진실
[박홍규의 아나키스트 열전 130] 소로에 대한 오해와 진실
  • 신다인
  • 승인 2023.03.13 0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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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데이비드 소로
헨리 데이비드 소로(Henry David Thoreau, 1817~1862) 사진=위키미디아.

요즘 한국에는 자연 운운하는 제목의 텔레비전 프로그램들이 많다. 그런 방송물을 만드는 사람들이나 소로와 그의 <월든>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소로를 깊은 산속 절간이나 수도원의 은둔자나 수도사처럼 말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소로가 지은 판자(숲에서 벤 통나무가 아니라 마을 폐가를 해체해 얻은 것) 오두막은 인적이 많은 골목의 낮은 언덕에 있고, 부근에는 유명한 낚시터가 있었으며, 철로가 부근을 지나서 누구나 찾기 쉬운 곳이었다. 산속이기는커녕 마을에서 평지로 십 리도 안 되는 거리에 있어서 반 시간이면 마을 우체국에 닿았다. 게다가 항상 너무 많다고 불평할 정도로 많은 손님이 소로의 오두막을 찾아왔다. 소로는 스스로 음식을 만드는 일에 지치면 언제든지 마을에 나가 친구 집에서 밥을 얻어먹었다.

소로가 살았던 숲에는 누구나 자유롭게 다녔다. 자주 오는 사냥꾼, 스포츠맨, 벌목꾼, 지주, 남자아이들 등만이 아니라 마을 사람들도 자주 왔다. 술꾼들이 술을 마시다가 한밤중에 수영하러 오기도 했다. 소로의 밭을 보고 콩을 늦게 심었다고 참견하는 자들도 있고, 소로의 침대 시트가 더럽다고 불평하는 부인도 있으며, 숲에서 젊은 여성을 쫓는 악한과 맞닥뜨리기도 했다. 소로 가족은 매주 토요일 오후 그의 오두막을 찾아왔고, 소로는 일요일마다 가족이 사는 집에 들렀으며, 마을 사람들을 위해 일을 해 하루 일당으로 1달러를 벌었다. 그러니 숲속에 집이 있다는 것뿐이고, 사실 그 전후처럼 사람들과 어울려 지냈다.

게다가 그 생활도 2년 남짓으로 끝났다. 44년 생애 중에 2년이었고 그 전후로는 숲속이나 산속에 산 적이 없다. 그러니 그 숲속 생활에 특별한 의미를 둔 것이 아니었다. 그가 그렇게 판자 오두막에서 산 이유는 그렇게 소박하게 살 수도 있고, 그렇게 소박하게 사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였을 뿐이었다. 돈이나 권력이나 기계 따위에 메이지 않고 자연 속에서 자유롭게 살면서 자급자족하며 그런 자유로운 사람들이 함께 모여 자치하는 것이 가능하고 바람직하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나는 그런 삶을 아나키스트의 삶, 삼자주의자-자유, 자치, 자연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본다. 그 무엇에도 메이지 않는 자유로운 사람들이 자급자족하면서 함께 어울려 세상살이를 의논하고 자연 속에 사는 것이 아나키즘이다.

소로를 ‘숲속의 성자’니 하며 신비화하는 경향과 달리 나는 그를 아나키스트로 이해한다. 흔히 소로는 자연주의자, 비폭력주의자라고 한다. 맞다. 그러나 그는 자연주의자임과 동시에 문명주의자였고, 비폭력주의자임과 동시에 폭력주의자였다. 비록 그 문명과 폭력이 대단히 제한된 범위에서 인정한 것이었어도 말이다. 문제는 저항이지 그 방법이 폭력이냐 아니냐가 아니다. 나는 그것이 악법에 대한 저항, 잘못된 중앙 집중의 권력과 자본에 대한 저항이라고 본다. 그런 점에서 나는 소로 사상을 자유, 자치, 자연에서 찾는다. 소로는 자연주의나 비폭력주의를 넘어서서 19세기 미국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모두를 거부한 사람이었다. 명실공히 19세기 미국 문명, 자본주의 문명에 철저히 반대하여 자유, 자치, 자연의 삶을 살았다.

흔히들 <월든>을 읽고 전원생활이나 귀농했다고 하는 사람들은 그 책을 무슨 성경처럼, 소로를 무슨 성인처럼, 도사처럼 받드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소로는 전원생활이나 도사는 커녕 2년 정도 제멋대로 호숫가에 통나무집을 짓고 건들건들 놀았을 뿐이고 심심하면 마을에 와서 놀기도 했고, 그 사이에 세금을 내지 않아 감옥에 갇히기도 했다. 이는 남들이 오로지 돈벌이에 미쳐 달리 사는 방법이 없다고들 하는 통에 화가 나서 그렇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지, 농촌에서 사는 것이, 농사를 짓는 것이 무슨 대단한 일이라고 소로가 생각한 때문이 아니었다. 그는 무슨 일이든지 열심히 하는 것을 싫어했고, 1주일에 6일 일하고 하루 쉬는 게 아니라 하루 일하고 6일을 놀자고도 했다. 물론 그 말도 하나의 실험, 모험에 불과했다. 중요한 것은 오로지 돈벌이 물질주의에만 미치지 않고 언제나 정신적인 여유를 갖고 사는 삶이다.

소로의 월든 초판(1854년) 표지. 사진=위키미디아.
소로의 월든 초판(1854년) 표지. 사진=위키미디아.

소로가 숲속에 들어간 것은 썩은 세상이 지겨워, 기계가 아닌 인간이 되고자 잠시 들어가 본 것에 불과했다. 게다가 당시 숲이란 인디언들이 숨어 살거나 노예들이 도망치기 위해 숨는 음험한 범죄나 악의 소굴로서 신사숙녀 백인이 들어갈 만한 곳이 아니었다. 그러나 소로는 도리어 평생 그 우아한 신사숙녀들을 싫어하고, 학대받는 그 원주민이나 노예들에게 공감하면서 스스로 그들처럼 언제나 모험과 위기와 발견을 찾아, 단 한 순간도 어떤 정형적인 생활습관에 메이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다. 소로는 언제나 ‘멋대로’ 살고자 한 반항자였고 반역자였으니 그 숲에 들어가는 것이 조금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정의에 따라 ‘멋대로’ 반항하고 반역함이 인간다운 것으로서 이는 국민으로서 법을 지키는 것 보다 앞서는 일이었다.

그러니 그는 숲속 나무 밑에서 도가 저절로 찾아오기를 기다리며 불철주야 앉아 소위 도를 닦는다고 하는, 또는 밑도 끝도 없는 말을 주절거리며 선을 한다고 하는 신비의 도사가 아니다. 또한 나라의 임금이 귀양을 보내서 시골에 온 선비가 하염없이 그 임금을 그리워하면서 음풍농월을 읊었다는 저 귀거래사가 기생과 가야금과 함께 하는 자연도 아니다. 굳이 우리 역사에서 소로를 찾는다면 홍길동이나 임꺽정이나 장길산이고, 소로의 자연이라면 그 도둑들이 숨어 살던 자연이다. 그들은 자연에 대한 노래커녕 말 한마디 남기지 않았으나 내가 이해하는 소로의 자연은 그런 도둑의 자연이다. 물론 소로는 도둑이 아니었고, 특히 떼도둑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홀로였었다. 그야말로 고독한 ‘황야의 무법자’ 한 사람이었다. 무법자가 떼를 지우면 그건 떼도둑 패거리에 불과하다.      

소로는 불철주야 도를 닦는 것처럼 고행의 노동을 강요하는 세상이 싫어 2년 정도 도망치다시피 하여 숲속에 들어가 짐승처럼 뒹굴고 살다가, 당연히 다시금 그 생활이 지겨워지자 그곳을 떠나서 다시는 돌아가지 않고 다른 새로운 경험을 위해 떠났을 뿐이었다. 그런 그를 ‘숲 속의 성자’라고 하다니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말이다. 그는 성스럽기는커녕 짐승스럽다. 성자는커녕 야인이다. 그렇다. 소로는 들판의 사람이었다. 숲속보다 도리어 황야가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그야말로 고독한 황야의 무법자였다.

숲에 들어오기 전에도 그는 숲에서 도끼로 찍은 나무로 ‘멋대로’ 만든 보트를 타고 강을 가로질러 그 원류를 찾아가는 위험한 모험을 했고, 그 뒤에도 수많은 강과 산을 탐험했다. 그는 서재에 앉아있는 학자인 적이 평생 단 한 번도 없었고, 언제나 모험을 하면서 그 모험을 토대로 삼아 글을 썼다는 점에서 헤밍웨이의 대선배였다.

소로는 평생 거의 무명이었다. 몇 번의 강연자로 인구 2천 명의 고향 콩코드와 그 주변 마을들에서는 조금 알려졌으나 그나마 악평이 더 많았고, 평생 출판한 단 두 권의 책은 몇 년 동안 몇백부 정도밖에 팔리지 않았으며, 몇 권의 잡지에 발표한 글들도 거의 인기가 없었다. 빈센트 반 고흐보다는 나았지만, 생전 세상의 인정을 받지 못하고 살았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였다. 아니 평생 세상의 인정을 받지 않으려고 세상과 거꾸로 ‘멋대로’ 살았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였다. 그렇다고 해도, 나는 빈센트 반 고흐 그림이 세상에서 가장 비싸게 팔리는 것을 정말 싫어하듯이, 소로가 마치 구세주인 양 받들어지는 것도 정말 싫다. 나는 반 고흐를 좋아하고 그의 그림도 좋아하지만 그것이 세계 최고라고는 생각하지 않고 그만큼 좋아하는 화가나 그림이 더 많이 있다. 마찬가지로 소로가, 특히 그의 <월든>이 마치 세상을 구제라도 하는 성격이라도 되는 양 섬기는 꼴은 정말 싫다.

 

박홍규 영남대 명예교수∙저술가

일본 오사카시립대에서 법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미국 하버드대, 영국 노팅엄대, 독일 프랑크푸르트대에서 연구하고, 일본 오사카대, 고베대, 리쓰메이칸대에서 강의했다. 현재는 영남대 교양학부 명예교수로 있다. 전공인 노동법 외에 헌법과 사법 개혁에 관한 책을 썼고, 1997년 『법은 무죄인가』로 백상출판문화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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