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3-29 05:55 (금)
‘그냥 쉰다’란 말이 들춰낸 ‘정형 노동’의 세계
‘그냥 쉰다’란 말이 들춰낸 ‘정형 노동’의 세계
  • 박수민
  • 승인 2023.03.13 08:5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학문후속세대의 시선
박수민 연세대 사회학과 BK21사업단 연구원
박수민 연세대 사회학과 BK21사업단 연구원

‘대체 이게 무슨 뜻이야’ 글에 파묻혀 사는 여성 연구자인 내가 플랫폼 음식배달 노동에 대해 연구하는 과정에서 가장 많이 한 혼잣말은 아무래도 역시 ‘이게 무슨 말’이었다. 플랫폼 음식배달 산업과 음식배달 노동에 관한 연구를 해야겠다고 결정한 뒤 내가 제일 먼저 한 일은 오픈카톡방에 참여한 것이다. 초반에는 카톡방에 올라오는 대화의 많은 내용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오토바이에 대한 얘기가 어찌나 많던지. 비싼 데다가 복잡하기까지 한 오토바이 유상보험의 세계는 또 어떠한가. 온라인을 벗어나 현실에서 노동자를 만나기 시작하면서도 혼잣말은 줄어들지 않았다. 그러나 손님-상점-노동자를 연결하는 알고리즘보다 더 이해하기 어려운 말은 바로 “요즘 그냥 좀 쉬었어”라는 말이었다.

이런저런 모임이나 회의에서 혹은 인터뷰에서 만난 배달 노동자 중에는 “요즘 쉬고 있다”고 말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는데, 이 말은 나에게 큰 혼란을 주었다. 배달노동자들은 건당 요금을 받기 때문에 일을 쉬면 돈을 벌지 못한다. 쉬면 당장 소득이 없어지는 이들이 짧게는 하루에서 길게는 몇 주를 이유 없이 ‘그냥’ 쉰다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쉰다는 것은 매시간을 쪼개 바삐 움직이는 배달 노동의 특성과도 전혀 맞지 않았다. 그냥 쉰다는 것은 대체 무얼까? 정말 쉬는 것일까? 남에게는 말하기 귀찮고, 싫은 개인사를 처리한 것을 그냥 쉬었다고 표현한 걸까? 

한참 시간이 지나고 나는 ‘그냥’도 정말 많은 뜻이 있고, ‘쉰다’는 것에도 많은 유형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배달 노동은 계절을 심하게 타는 노동이다. 덥고, 춥고, 비 오고, 눈 올 때 일이 몰린다. 몸이 힘들어도 일이 있을 때 참고 일하는 대신, 날씨 좋고 배달이 없는 시기에는 여행도 가고, 일도 느슨하게 하면서 긴장을 덜어낸다. 온종일 일하지 않고 바쁜 식사 시간에만 잠깐씩 일을 하는 것을 쉬었다고 얘기하는 경우도 있다. 사고의 후유증으로 육체적·정신적으로 컨디션이 저조해져서 일을 나오지 못할 때도 있다. 업황이 불안정한 상황에서 다른 길을 모색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냥 쉰다’의 뒤에 이렇듯 다양한 뜻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후에도 나는 무언가가 찜찜했다. 왜 아파서 쉰 것을 그냥 쉬었다고 말했을까? 꽤 오랫동안 ‘그냥 쉬었다’의 의미를 캐물었지만 현장의 흐름에 휩쓸리고, 논문 마감에 쫓기면서 ‘그냥 쉬었다’는 떠올랐다 사라지는 다른 여러 단상들과 함께 밀려났다.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냥 쉰다는 말이 뜻하는 배달 노동자들의 다양한 상황에는 휴가, 병가, 파트타임 근무나 취업준비 같은 단어가 붙지 않는구나. 휴가, 병가, 파트타임, 취업준비와 같은 상태는 조직이 붙여주는 것이구나. 매일, 꾸준히, 장시간 노동을 하는 것이 일의 기준이 되면, 그 이외의 삶의 방식은 모두 쉬는 것이 되어 버린다.

그제야 나는 찜찜함의 정체를 깨달을 수 있었다. 특수고용노동이라는 비정형(非定型) 노동을 연구하면서도, 나는 여전히 휴가, 취업준비와 같은 단어가 통용되는 정형(定型) 노동의 세계의 언어와 틀에서 살고, 사고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냥’의 의미를 계속 캐묻는 나의 질문 뒤에는 무엇이 자본주의적 생산성인지를 정의하는 권력의 관점을 경유해 노동의 세계를 이해하고자 하는 나의 틀이 있었다. ‘그냥 쉬었다’는 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배달 노동자에게 왜 쉬었냐고 물을 것이 아니라 쉬었다는 말에 집착하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나에게 물었어야 했다. 생산과 비생산의 경계가 뚜렷하게 구획된 시간관념에 익숙해져 있어, 그것이 뒤섞여 있는 상태를 이해하기도 어려웠던 나에게 말이다.

10년 가까이 대학원생 생활을 하며 일, 공부, 생활의 경계가 없는 삶을 살아왔음에도 생산적 시간 구획 개념에 여전히 붙들려 있다는 것이 놀라우면서도, 그 밑에 있는 욕망은 무엇일지를 고민하게 된다. 더불어 누군가, 무엇인가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된다는 것이 그대로 이해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새삼 다시 깨닫는다. 어쩌면 내가 이해할 수 있는 것은 고작 내가 가진 틀의 한계를 깨닫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박수민 연세대 사회학과 BK21사업단 연구원
연세대 사회학과에서 플랫폼 음식배달 노동에 관해 연구한 『플랫폼 경제의 부상과 노동과정의 변화』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플랫폼 음식배달 노동에 대한 연구를 이어가고 있으며, 주요 연구관심은 기술, 노동, 시간성의 교차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