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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계풍경]‘2000 서울 국제문학 포럼’으로 본 제3세계 문학의 오늘
[예술계풍경]‘2000 서울 국제문학 포럼’으로 본 제3세계 문학의 오늘
  • 김정아 기자
  • 승인 2001.08.13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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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08-13 12:43:57
‘2000 서울 국제문학 포럼’에 참가한 세계적인 작가들과 학자들은 탈식민적 상황에서 문학의 가능성을 조심스럽게 인정했다. 이들의 논의는 현재 우리 나라에서 진행되는 문학론의 위상을 점검할 수 있는 보다 보편적이고 포괄적인 맥락을 제공했다.

‘여러 가지 형태의 경계, 즉 언어, 문화, 민족 등의 경계를 초월해야 한다’는 포럼의 모토는, 아름다운 한글로 우리 문화를 창달한다는 민족적 사명감을 안고 있던 작가들에겐 위기로 느껴지는 듯하다. 한편으론, 지금 내가 쓰는 글이 한국문학사가 아닌 세계문학사 속에서 자리매김된다는 기대와 부담도 없지 않다. 미국대학 커리큘럼에 박완서의 ‘Naked Tree’가 포함되는 등 서구 문학 중심의 정전 구도가 제3세계 문학을 포함하는 방향으로 개편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동아시아 문학이라는 범주를 설정해서 세계문학과 국문학 사이에 다리를 놓으려는 시도도 다양하게 진행된다. 실제로 많은 논자들이 문화교배의 필요성과 생산성을 강조한다. 미국의 이미지즘 운동이 일본의 仙詩 전통을 흡수했던 것이나, 피카소의 입체파가 아프리카 예술 형식에서 영감을 얻었던 것은 그중 몇 가지 예일 뿐이다. 빈혈을 앓던 미국의 백인남성 정전에 젊은 피를 수혈한 것도 흑인들, 유태인들, 여성들, 인디언들, 그리고 아시아인들이다.

소통인가 포섭인가

이런 문화적 다양성을 아우르는 보편적인 문학성이 노벨문학상에서 구현된다고 주장한다면 수많은 반론이 일겠지만, 제3세계 문학이 세계문학에 진입하는 관문이 노벨상이라는 카자노바의 주장은 어느 정도 사실이다. 노벨상은 작가에 대한 인정인 동시에 국가의 문학에 대한 인정이기도 하다. 문제는 세계문학에 기여하기 위해서는 먼저 소통되어야 한다는 것. 그러니 우리 나라를 비롯한 비영어권 작가들은 세계공용어 특히 영어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부르디외를 비롯한 많은 논자들은 미국화, 기업화로 특징지워지는 세계화를 문학을 위협하는 부정적 요인으로 인식한다. 세계화가 작품의 번역이나 타문화와의 공감 등의 범주에서 출판산업 등 상업적인 범주로 옮겨온 것이다. 세계화로 인한 민족문학의 쇠퇴와 함께 문학의 위상 자체가 추락한다는 진단도 나온다. 인문학 분야에 등록하는 학생이나 채용되는 전임교수, 문학박사의 강의실 학생수나 저술의 인쇄 부수가 줄고 있는 현상도 세계화의 맥락에서 해석된다. 문학에 별다른 기대를 걸지 않는 논자도 적지 않다. 프랑스의 보수주의자 르팡이 해박한 독서가이고, 영국의 파시스트 정당인 국민전선을 이끄는 이노크 파월이 케임브리지 인문학부 최우등생이었면, 문학은 현실을 바꾸기는 고사하고 개인의 심성도 어쩌지 못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갖기도 한다. 문학제도에 집착하는 집단은 문학에 대한 호의와 충성심을 조작하면서 권력 획득을 노린다는 비판까지 제기된다. 지구화가 다문화주의를 조장한다는 경고도 여기서 나온다.

그러나 제3세계 작가들은 세계화의 긍정적 측면을 살려낸다. 문학 내지 문화의 ‘탈민족적 인터내셔널’을 구축해야 한다는 주장은 세계화의 부정적 측면을 강조하는 논자들을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동의하는 지점이다. 제3세계 작가들 중엔 민족적, 종교적, 이념적 억압에 고통 당한 사람들이 상당수 존재한다. 1996년 이후 그것도 유럽에서 극단적인 민족주의와 외국인 혐오증이 기승을 부리는 상황에서, 다양한 제3세계적 현상을 관통하며 ‘호메로스와 길가메시를 아우르는’ 보편적 문학성을 찾아내야 한다는 것이 소잉카의 주장이다.

한때 아프리카 문학 논쟁은 제국주의에 대한 저항의 매체와 수단을 둘러싸고 벌어졌다. 제국주의에 대한 효과적인 저항이 되기 위해서는 토착민중의 언어로 쓰여져야 한다는 편과, 권력자에게 영향을 미치는 데에는 모국어보다 식민통치국가의 언어가 효과적이라는 편이 논쟁을 벌였다. 그러나 바야흐로 세계화시대, 다문화세계 속에서 문학의 선결과제로 설정되는 것은 아이러닉하게도 문학의 자율성이다. 물론 이때의 자율성은 자본에 대한 자율성이다. 과거의 문학이 독재권력의 검열을 받았다면, 지금의 문학은 ‘돈’의 검열을 받는다는 것. 알바니아 출신의 소설가 카다레는 “훌륭한 문학 작품은 시장의 법칙에 복종하기를 거부할 줄 알아야 한다”고 말하며, 시인 루보는 “언어의 여러 가지 다양한 활용방식 가운데서 시의 양보할 수 없는 독자성”을 옹호한다. 역설적이게도, 문학적 자율성은 편재하는 자본에 대한 정치적 저항이 된다.

문학의 자율성과 정치성

이러한 문학 내부의 고민이 공허한 탐닉이나 문인의 자기위안으로 전락하지 않는 이유 중 하나는 이들이 말하는 ‘문학의 자율성’이 좁은 의미의 문학텍스트 및 문학제도가 아닌 넓은 의미의 문학성을 겨냥하기 때문이다. 이런 식의 선회는 ‘경계를 넘어 글쓰기’라는 포럼 제목을 좀더 시사적으로 만들어준다. 문학제도의 탈신비화 경향을 지적 유행으로 평가절하하는 시각이나 영상문화를 비속한 것으로 배척하는 시각을 고수하는 논자도 있지만, 대부분의 논자들은 제도적 틀로서의 문학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롭다. 이들은 문학이 멀티미디어적인 새로운 예술로 대체될 수 있지만 시와 스크린이 반드시 적대적인 것만은 아님을 인정하며, 카우리스마키, 키에슬로브스키, 키아로스타미, 구로사와 아키라의 영상까지도 인문학적 텍스트로 수용한다.

문학을 전면 부정하는 미요시 같은 극단적인 논자도 등장한다. “내가 알고 있는 유일한 사실은 사람들이 더 이상 문학을 읽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는 소설이 아직도 중요하다는 식으로 사태를 가장할 생각이 전혀 없다. 소설이 없어졌다는 것이 아니라, 소설의 주도권이 상실됐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그도 문학을 대체할 다른 무엇이 문학의 저항 역사에 빚질 것임을 부정하진 않을 것이다. “탈식민 상황에서 성실성을 지키며 ‘사심 없음’이라는 시금석을 적용하는 작가들”은 시대와 매체를 넘어서 보편적 문학성을 획득할 것이다.

<김정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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