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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은 누가 구제해야 하나?
가난은 누가 구제해야 하나?
  • 김정규
  • 승인 2023.03.10 10:1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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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으로 보는 세상_『순례 주택』 유은실 지음 | 비룡소 | 256쪽

보증금·월세 적게 받고 선물 사주는 집주인
사회복지로 디딤돌 역할하는 순례 씨가 곧 국가

오수림은 모지리야. 서른 명 중에 13등하고도 사는 게 행복하냐?” 엄마가 닦달하자, “그래 행복해. 선생님이 쓴 글을 봐.” 오수림이 들이민 담임선생님의 글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낙천적이고 성숙합니다. 생활지능이 높은 학생으로, 세상을 잘 헤쳐 나갈 것으로 기대됩니다.’

 

유은실의 청소년 소설 『순례 주택』(2021)에 나오는 이야기다. 배경은 명품 초고층 아파트 단지와 허름한 빌라촌이 이웃한 도시 변두리다. 경쾌하다. 그러면서도 개인의 욕망과 빈부격차, 차별, 기후 변화, 공유, 주택문제 등 매우 핫한 이슈를 심어놓았다. 소설의 주인공은 ‘생활지능’이 높은 열여섯 살 ‘오수림’과 순례 주택 건물주인 일흔다섯 살 ‘김순례’다.

순례 씨(75세)는 스물에 결혼하고 서른 다섯에 이혼했다. 순례 씨는 때를 밀어 달라는 사람이 줄을 설 정도로 유능한 세신사였다. 혼자 아이를 키우며 살아 보려고 뛰어든 일이었다. 그렇게 번 돈으로 마흔다섯에 1층 양옥집을 샀고, 그 집을 ‘때탑’이라 불렀다.

근처에 지하철역이 생기면서 땅값이 올랐고, 마당이 수용돼 받은 보상금으로 10년 전에 4층짜리 빌라를 신축했다. 빌라 이름은 ‘순례 주택’이라 붙였다. 순례 씨는 주변 빌라에 비해 보증금과 월세를 저렴하게 받고, 통장 잔고가 1천만 원이 넘으면 입주민들에게 뭔가를 사서 나눠주고, 잔고를 9,999,999원 이하로 유지하는 독특한 건물주다.

오수림은 초고층 아파트 ‘원더 그랜디움’ 1504호에 사는 아빠, 엄마, 언니를 ‘1군’이라 부른다. 1504호의 주인인 외할아버지는 딸과 사위가 밀고 들어오는 바람에 순례 주택으로 말려나 살게 된다. 그리고 돌싱 순례 씨와 연인 관계가 되고, 천덕꾸러기가 된 오수림을 순례 씨가 사실상 맡아서 키운다. 그렇게 해서 1.5군 오수림이 성장하게 된다. 

이 소설에는 두 사람의 명문대 출신 시간강사가 등장한다. 한 사람은 순례 주택에 세든 허성우 씨(44세). 그는 집도 돈도 없어 결혼을 포기하고, 청소 알바도 하면서 열심히 산다. 또 한 사람은 오수림의 아빠 오순택 씨(47세). 그는 돈이 없었지만 대학 후배와 결혼도 하고 ‘전임교수 될 때까지만 도와달라’고 하면서 누나들과 장인에게 돈을 얻어쓰면서 15년째 보따리장수로 연명하고 있다.

우등생 딸 오미림의 교육에 전념하기 위해 전업주부를 고수하는 오수림의 엄마는 카드 돌려막기를 하면서도 빌라촌 주민을 공공연하게 멸시한다. “솔직히 말해서, 빌라촌 애들이 관리가 잘 안 되는 건 사실이잖아요. 빌라촌 애들과 어울리는 게 걱정됩니다.” 1군들에게 원더 그랜디움은 하나의 성(城)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태양광 사기를 당해 1504호가 경매로 넘어가면서 성 밖으로 쫓겨나게 된 1군들. 오수림의 노력과 순례 씨의 배려로 1군들이 순례 주택으로 이사를 한다. 39평에서 14평으로 줄이는 고통과, 순례 주택 입주민들과의 충돌 속에서 1군들은 헛된 자존심에 내상을 입으며 적응해 간다. 이 소설의 저변에는 가난이 늦가을 새벽 안개처럼 짙게 드리워져 있다. 순례 주택 1층 상가에서 10년째 미용실을 하는 조 원장은 “우리 식구는 순례 주택을 딛고 일어섰어요”라고 자주 말한다. 보증금 낼 돈이 없었는데 순례 씨가 흔쾌하게 면제해준 거에 대한 고마움의 표현이다.

하지만 조 원장처럼 개인의 노력으로 가난을 벗어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최근 발표된 한 조사에 따르면, 2021년 통합소득 상위 0.1%의 연평균 소득은 18억4천970만 원이다. 연 소득이 2천660만 원인 통합소득 중위소득자의 69.5배에 달하는 금액이다. 더 암울한 것은 중위소득 대비 상위 0.1% 소득의 비율은 2018년 61.0배에서 2021년에는 69.5배로 늘었다는 점이다. 빈부격차가 점점 더 심화하고 있다.

이러한 소득 불균형 상태는 인력 수급 정책이나 서민 지원 정책 등 구조적으로 접근하지 않으면 해결이 어렵다. 순례 씨는 가난한 입주민들에게 디딤돌 역할을 해주었다. 그의 철학과 실천은 ‘사회복지’라 할 만하다. 사회복지가 국가의 책임이라면, 순례 씨는 곧 ‘국가’인 셈이다. 권력에 취한 위정자들이 입에 달고 다니는 그런 ‘국가’ 말고, 사회적 약자들을 스스로 일어설 수 있게 돕는 그런 ‘국가’ 말이다. 

 

 

 

김정규
한국대학출판협회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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