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3-29 15:55 (금)
아름다운 전통 문화를 지키고 계승하자
아름다운 전통 문화를 지키고 계승하자
  • 김병희
  • 승인 2023.03.10 10:0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책 광고로 보는 시대의 표정18 한창기의 『뿌리깊은 나무』

우리나라 잡지의 역사에서 『뿌리깊은 나무』는 독보적 위치를 차지한다. 1976년 3월에 창간돼 1980년 8월에 통권 50호를 끝으로 전두환 신군부에 의해 강제로 폐간될 때 까지 이 월간지는 사회 전반에 큰 영향을 미쳤다. 잡지 제목이 네 글자를 넘으면 안 된다는 통념에서 벗어나 여섯 글자의 순우리말 제목을 채택한 것부터가 참신했다. 오랜 관행이던 세로쓰기를 버리고 가로쓰기를 도입했듯이 형식도 파격적이었고 내용을 봐도 이전에 없던 놀라운 기획물이 많았다.

한국브리태니커회사의 『뿌리깊은 나무』 창간호를 알리는 광고를 보자(동아일보, 1976. 2. 23.). 광고에서는 “찾는 분이 많을 줄이야 알았지만”이란 헤드라인에 이어 서브 헤드라인을 덧붙여 창간 잡지에 대한 기대감을 증폭시켰다.

한국브리태니커회사의 『뿌리깊은 나무』 창간호 광고(동아일보, 1976. 2. 23.)

“이토록 많으실 줄은 몰랐읍니다. 지난 며칠 동안에 책방에 이 잡지가 떨어져 헛걸음 하신 분들께 죄송합니다. 이제 넉넉한 분량을 마련하여 새로 전국의 책방에 골고루 풀어놓았읍니다.” 책방에 잡지가 없어 헛걸음한 사람이 실제로 몇 명이었는지 모르겠다. 광고 카피에서 허위 정보를 제공하면 안 되지만 애교스럽게 표현하면 큰 문제가 없기에, 이 정도의 표현은 기만 광고라 할 수 없다. 

이어서 “이 잡지에서만 볼 수 있는 8개의 새 기획물”을 차근차근 소개했다. 빼어난 글과 사진으로 파헤치는 ‘원색 화보’, 외곬으로 일하는 사람들의 세계를 소개하는 ‘그는 이렇게 산다’, 저명한 학자들의 빼어난 글로 우리 됨을 밝혀주는 ‘이 달의 길잡이 글’, 한국예술(미술, 음악, 연극, 문학, 영화)의 종합적 흐름을 한눈에 제시하는 ‘예술 비평’, 두 사람의 인생을 견주는 ‘이 땅의 이 사람들’, 현장에서 일상생활의 문제점을 파헤치는 ‘이것도 문제다’, 남다르게 사는 사람들의 삶을 취재한 ‘숨어사는 외톨박이’, 알려지지 않은 옛글과 현대인의 삶을 맺어주는 ‘옛글 갈무리’가 그 여덟 가지다.    

한국브리태니커회사
『뿌리깊은 나무』 창간호의 표지(1976. 3.)

지면의 중앙에는 8가지 기획물의 내용을 세세히 소개했다. “쌀을 먹고 사는 백성”(이규태)이란 제목의 원색 화보에서부터 “조선시대 선비의 대담한 애정 표현”(김일근) 같은 옛글 갈무리에 이르기까지 흥미로운 읽을거리를 빼곡하게 알렸다. 오영수의 「황혼」과 천승세의 「백중날」이란 소설을 실었고, “도랑을 파기도 하고, 보를 막기도 하고”라는 한창기(1936~1997) 발행인의 창간사도 실었다.

언론학자 최정호 교수가 “지난달의 신문 문화면”이란 글을 쓴 것은 당연해 보이지만, 소설가 박완서 선생이 “텔레비전을 보니”라는 미디어 비평을 쓴 것은 이례적이라 퍽 흥미롭다. 광고 지면의 오른 쪽에는 “독자들의 반응”이라는 제목으로 작가 문순태, 주부 김화숙, 기자 김차웅, 변호사 김진억의 잡지에 대한 사전 독후감도 소개했다.

편집과 내용 면에서 파란을 일으킨 『뿌리깊은 나무』는 우리나라 잡지 역사에서 큰 획을 그었다. 토박이 민중문화에 대해 5년 동안 연구한 끝에 창간호 발간에 착수했다고 한다. 순한글 가로쓰기를 적용한 이 잡지는 B5판 크기에 180쪽 안팎이었다. 편집 방침은 고유한 전통 문화의 맥을 지키는 동시에 시대정신과 민중의 목소리에 주목한다는 것이었다.

유럽과 미국의 잡지 스타일을 지향했지만 어려운 한자말이나 외래어를 쉬운 토박이말로 바꿔 쓰려는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다. 일각에서는 우리 것을 지나치게 강조함으로써 포용성이 부족하다며 비판했지만, 영어나 일본어에 오염된 일상어를 토속적인 우리말로 바꾸려고 시도한 편집진의 노력은 사회 전반에서 폭넓은 지지를 얻었다. 

독자들은 『뿌리깊은 나무』에서 쉽고도 수준 높은 글을 접했다. 편집자는 외국 것이 아무리 좋더라도 우리 문화와 무관하면 싣지 않는다는 원칙을 지켰다. 이 잡지는 당시의 대중지에 비해 편집 스타일이 고급스러웠고, 내용도 남녀노소 모두가 알기 쉽도록 토속적인 우리 한글을 골라 썼다. 창간호 표지에서 1976년 3월 발행이라 하지 않고 “일천구백칠십륙년 삼월”로 표기했듯이, 심지어 아라비아 숫자도 한글로 풀어썼다.

이 잡지는 한국 사회의 모순을 파헤쳐 독자에게 사회의식에 눈뜨게 함으로써, 바르게 살라는 가치를 환기하는 동시에 아름다운 전통 문화를 지키고 계승하자는 시대의 표정을 제시했다. 

브리태니커백과사전을 판매하던 한창기 발행인은 영어에 능통했지만 일상에서 영어를 섞어 쓰는 행위를 경계했고, 영어와 일본어의 잔재가 우리말을 망친다고 한탄했다. 그는 일본말에 동화된 우리말의 현실을 지적하며, 철공소 아닌 ‘대장간’으로, 식당 아닌 ‘밥집’으로, 양조장 아닌 ‘술도가’로, 서점 아닌 ‘책방’으로 써야 한다며 소신을 잡지에 반영했다.

1980년 8월에 폐간된 『뿌리깊은 나무』에 이어, 1984년 11월에 여성지 『샘이깊은 물』이 창간됐지만 이마저도 2001년 11월호로 폐간됐다. 한창기 발행인은 하늘의 별이 되었지만, 2011년에 그의 일생이 담긴 ‘뿌리깊은나무박물관’이 전남 순천시 낙안면에 개관했다. 그곳에 가면, 『뿌리깊은 나무』가 바르게 살라는 표정을 지으며 깊게 뿌리박고 있다. 

김병희 서원대 광고홍보학과 교수·편집기획위원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