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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학생독립운동 주역 박준채의 시 ‘제초소감’ 발굴
광주학생독립운동 주역 박준채의 시 ‘제초소감’ 발굴
  • 김재호
  • 승인 2023.03.01 10: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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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대 법정대학 재직, 대학원장 지낸 독립운동가
김정훈 전남과학대 교수가 ‘시인론’ 집필 중 발견

겨레의 단결과 희망을 호소한 독립운동가 해촌(海村) 박준채(1914∼2001)의 새로운 시가 추가 발굴됐다. 독립운동가였던 박준채는 조선대 법정대학에서 재직하며, 대학원장을 역임했다.  

 

해촌(海村) 박준채(1914∼2001)의 모습. 사진=김정훈

김정훈 전남과학대 교수가 일본 「시와 사상」에 박 시인에 대한 ‘시인론’ 집필하던 중 31편의 시가 적힌 노트 파일 사이에서 쪽지 형태로 끼워진 시 「제초소감(除初小感)」을 발견했다.

박준채는 일본의 문방구 마루젠에서 구매한 노트에 나주댕기머리 사건 발발한 해로부터 10여 년간 자필로 시를 써서 남겼다. 이 노트를 차남 형근 씨가 2010년 나주학생독립운동기념관에 기증했다.

 

나주역 사건 현장인 나주학생독립운동기념관이다. 사진=김정훈

지난해 김 교수의 원고 노트 분석을 통해 박준채가 나주댕기머리 사건이 발발한 1929년~40년까지 시 40편(현존 31편)을 집필한 것으로 밝혀졌다. 시 31편을 검증했고, 평론집 『민족 저항시인의 동아시아적 접근』(김정훈 편역) 속에 박준채가 남긴 시편에 대한 논고를 엮고, ’박준채의 시 31편 원문을 그대로 소개한 바 있다. 

김 교수는 소식을 접한 일본 「시와 사상」 편집자로부터 박 시인의 ‘시인론’ 집필을 의뢰받았다. 이번에는 박준채의 노트에 적힌 작품을 하나하나 다시 살펴보다가 원고 사이에 낀 새로운 시를 찾은 것이다.

 

일본 「시와 사상」 3월호 표지. 사진=김정훈

그런데 이번에 확인한 바로는 1950년에도 시를 집필한 것으로 드러났다. 「제초소감」(한 해를 보내며 느끼는 감상)이라는 제목의 시는 해방 후 5년이 지난 후 6·25 전쟁이 터진 1950년 12월 31일에 청계장(淸溪莊)에서 작성됐기 때문이다. 박준채의 시 창작에 대한 남다른 열정을 확인할 수 있다. 김 교수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육필 원고는 글씨체가 선명하고 이곳저곳 개작한 흔적이 있거니와 말미에 자신의 호 ‘해촌(海村)’을 뚜렷이 새겨넣어 리얼리티가 돋보입니다. 박준채는 직접 잉크로 쓴 필체 위에 볼펜으로 고쳐가며 쓰는 등 그 흔적을 고스란히 남겼죠.”

아래는 이번에 새로 발굴된 「제초소감」 시의 전문이다.

제초소감(除初小感)

북풍北風 불고 눈보라 치는 세상世相
우슴도 눈물도 업는 짙은 장막帳幕의
이 「아포리아」를 누구에게 하소연하랴
나라 업는 민족民族의 서름이여
님 업는 이 땅! 이 겨레!
다 같이 힘차게 뭉처라! 굳세게!
정의正義는 승리勝利하나니 
찬달 빛이는 창窓박으로
백팔百八의 종소리 사라지리라
이 강산江山에 새봄이 오면
썩은 고목枯木도 다시 싹이 트나니
배달의 아들 딸들아
함마를 억게에 힘차게 매고 싸우라!
일하라! 배우라!
미래未來의 새 삶을 위爲하여!
멀니서 들려오는 희망希望의 종소리
이땅의 겨레에게 자유自由를 주라
영원한 행복幸福을!

1950一九五〇, 12十二, 31三一. 밤
淸溪莊에서  해촌海村

박준채는 해방 이후 5년이 지난 시점에서도 항일 학생운동을 일으킨 장본인이다. 그는 당시를 회고하며, ‘나라 업는 민족民族의 서름’를 되새기고, 다 같이 힘차게 뭉칠 것을 호소하며 이 땅의 모든 이들에게 ‘미래의 새 삶을 위해’ 투쟁할 것을 외치고 있다.

김 교수는 “해방 이후 민족 수난기인 6·25전쟁의 해에도 박 시인은 시 창작을 통해 광주학생운동을 돌이키고 민족의식을 불태웠다”라며 “근심 어린 시선으로 현실을 주시하면서 겨레의 앞날에 서광이 비치기를 간절히 소망하는 마음이 드러난 시”라고 평가했다.

 

「제초소감」의 친필 원고이다. 사진=김정훈

한편 김 교수는 일본 시 전문지 「시와 사상」 3월호(3월 1일 발행) ‘시인론’란에 ‘역사적 인물 박준채의 시 발굴―소환되는 사건·각인된 언어’라는 제목으로 독립운동가 박준채를 일본 독자에게 소개했다. 박준채는 한일의 역사적 인물로 자리매김할 예정이다.
 
김 교수는 도입부에서 작년 10월 하토야마 유키오 전 총리가 나주학생독립운동기념관(이명한 관장)과 박준채의 생가(남파고택)를 방문한 사실을 언급했다. 박준채를 거대한 항일 학생운동의 불씨를 지핀 장본인이자 한일의 역사를 거론할 때 빠뜨릴 수 없는 상징적 존재라고 소개했다. 

박준채가 일본어로 쓴 「환상」이라는 시를 김 교수가 시인론에 들춘 것은 일본 독자를 의식했기 때문이다. 시 「환상」은 박준채가 와세다대학 입학 직전의 해에 도쿄의 메지로(目白)에서 개작한 것으로 지나간 수년을 회고, 조선 식민지 현실에 대한 허무감을 형상화한 작품이다. 

김 교수가 본론에서 일본 독자들을 의식해 더욱 강조한 시는 박준채의 진면목을 확인할 수 있는 「1937년의 제석(除夕)」과 「촌감(寸感)」이다. 1937년은 일본제국주의가 조선에서 황민화 교육을 강화하며 조선의 병참 기지화를 노골적으로 강행하던 시기이다. 중일전쟁의 개시를 알리는 해이기도 하다.

박준채는 1937년 마지막 날 도쿄의 나카노(中野)구에 머물며 “오-즉 피끓는 젊은이여! / 두 팔을 걷으며 / 힘찬 그들의 철완으로 / 약자를 구할지어다 / 자유로운 우리들의 / 이상을 위하야! / 새 삶을 위하야!”(‘1937년의 제석’ 중에서)라는 시구를 새겼다. 김 교수는 이 시구에서 박준채의 독립을 향한 의지와 결기를 확인할 수 있다고 분석한다.

나아가 박준채가 이듬해인 1938년 집필한 「촌감」에서는 일본 제국주의에 맞선 학생운동으로 희생된 동료와 선배의 넋을 위령하는 마음을 담았기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고 보았다. 박준채는 도쿄의 한복판에서 “불타는 이 심금 / 살펴 아시리라 / 미래에 살아든 그들의 꿈 / 가신님들에게 / 행운의 그날이 있도록 / 부디 전하여 주소서!”라고 노래했다.

김 교수는 말미에 “박준채는 일본 제국주의의 권력이 조선 식민지정책을 강화하는 분위기를 조성할 시기에 거기에 찬물을 끼얹은 당사자다”라면서 “하지만 한일의 어두운 시대를 돌이키게 하고 두 번 다시 그와 같은 비극이 반복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환기시키는 상징적 인물이다”라며 한일간 논의의 필요성에 대해 강조한다. 

김 교수는 박준채의 존재가 일본 독자들에게도 알려지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암흑시대에 각인된 박준채의 언어가 1929년 조선 남부(광주~나주)에서 발생한 한일 학생들의 그 사건과 함께 새롭게 소생한다고 하며 글을 맺었다.

김재호 기자 kimyital@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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