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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길을 걷다 보면
함께 길을 걷다 보면
  • 이현수 충북대
  • 승인 2006.07.21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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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강의시간

▲이현수/충북대·법학 ©
나의 전공은 공법, 그 가운데에서도 행정법이다. 매 학기 강의시간마다 학생들에게 가끔 행정법의, 더 나아가서 법학의 매력에 대해서 이야기를 한다. 마치 날마다 새로운 모습으로 나타나서 지루해질 틈을 주지 않는 상큼한 애인 같다는, 다소 간지러운 표현을 써 가며 말이다. 하지만 학생들의 반응은 영 신통치 않다. 그냥 무덤덤한 정도가 아니라 도저히 공감할 수 없는 말을 들었지만 반박하지 않기로 다짐한 사람들이 짓는, 어색하고 불편한 표정들이다. 내가 한 말에 학생들이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는데도 실망은 크지 않다. 왜냐하면 저 얼굴들은 20년 전 나의 얼굴이기 때문이다.


당시 은사님들께서는 학생들에게 하나라도 더 깨우쳐 주시려고 목청 높여 강의를 하셨지만 아둔하기 짝이 없는 제자는 선생님들께서 해 주시는 이야기들이 난해하게만 느껴졌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대학원에 진학한 후에도 학문으로서의 법학은 여전히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이었다.


그러나 ‘사람’은 가까이에 있었다. 말씀 하나 하나가 바로 정제된 문장이 되어 버리고야 마는 유려한 강의를 끝마치고 우아하게 강의실을 나가신 선생님이 연구실에 들어가셔서는 글 한 줄을 쓰시기 위해 머리를 쥐어 싸매고 책들이 수북이 펼쳐져 있는 책상 앞에서 안절부절 못하시는 것이었다. 나는 그 때까지만 해도 선생님들이 쓰시는 글들은 틀면 바로 나오는 수돗물처럼 선생님의 머리에서 좔좔 흘러나오는 줄로만 알고 있었다.


유난히 어수룩해서였을까, 어떻게 살아야 할 지, 뭘 하며 살아야 할 지 모르는 채로 부대끼면서 이미 영리하고 조숙한 친구들이 나름의 목표를 향해 질주하는 걸 보며 의기소침해 있던 그 시절, 한 선생님은 자신의 인생역정을 고해성사하듯이 제자들 앞에서 말씀하시면서 이렇게 마무리하셨다. “내가 이 나이 먹도록 인생이 뭔지 실은 잘 모릅니다.” 어머, 모든 걸 다 아시는 것 같은 선생님도 저런 말씀을 하시는구나. 바위 같이 훌륭한 선생님도 저런 말씀을 하시는데 나 같은 사람이 바람에 휘날리며 사는 것쯤이야.


그 시절 선생님들이 내게 해 주셨던 강의의 내용은 기억 속에서 이미 흐릿해져 버렸지만 선생님들에게서 저절로 풍겨 나왔던 귀중한 덕목의 향기는 비 온 뒤의 풀 냄새처럼 아직도 생생하다. 어쩌면 나는 학문 자체에 이끌려 논문 쓰고 학위 받고 그래서 오늘 대학에 몸담게 됐다기보다는 나보다 앞서 학문의 길을 걸었던 분들이 내게 보여준 그 유쾌하고도 진지한 풍모, 꾸밈없는 순수한 열정, 그들의 인간적 온기에 이끌려 그 무리 속에 남고자 이 길을 택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무리와 함께 길을 걷다 보니 어느 새 내가 딛고 있는 길의 아름다움에 눈뜨게 된 것이다.


갖가지 현란한 교수방법이 여기저기에 넘쳐 나는 시절이지만 그래도 나는 그 옛날 나의 선생님들이 보여 주셨던 모습들을 흉내 내고 싶어 한다. 마음 깊은 곳에는 내가 나의 선생님들의 강의시간을 소중하게 기억하듯 그렇게 내 강의의 학생들도 나의 강의시간을 기억해주기를 바라는 엉큼한 욕심이 뭉게뭉게 피어나고 있다.


그러나 어디 감히 될 말인가. 마음만 조급할 따름이다. 궁여지책으로 나는 나의 선생님들을 내게 전달해 주신 가장 소중한 과실을 먼저 공개하기로 한다. 줄거리를 조리 있게 이야기할 자신이 없는 이야기꾼이 결론부터 이야기하는 식이다. “행정법은 하다 보면 참 재미있어요. 여러분”, 이런 식이다. 내가 해 놓고도 맥 빠지는 이야기이고 학생들은 안 들은 셈 치는 표정이지만 실망은 이르다. 아직 시간이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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