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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조선 여성은 ‘어머니’와 ‘혁명가’일뿐인가
북조선 여성은 ‘어머니’와 ‘혁명가’일뿐인가
  • 김성경
  • 승인 2023.03.02 08:5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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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가 말하다_『살아남은 여자들은 세계를 만든다』 김성경 지음 | 창비 | 256쪽

이주한 150명 북조선 여성의 증언을 토대로
무채색 북조선 여성의 삶을 소설 쓰기로 복원

“우리 조선의 여성들은 어떻게든 살아남는다니까. 그렇게 생겨 먹었다고.”(146쪽) 연길에서 만난 순영 할머니는 북조선 여성들이 어떻게 억척스럽게 살아남았는지를 담담하게 증언했다. 그녀는 중국에서 태어나 결혼하고 아이까지 낳았지만 고향으로 돌아가겠다는 남편의 뜻을 꺾을 수 없어 북조선으로 이주했다. 

북조선에 정착한 초기에는 신바람 나게 일도 하고, 당에서도 인정받으면서 행복하게 살았다. 하지만 국가가 쇠락의 길을 걷자 할머니의 삶도 조금씩 파괴되기 시작했다. 결국 먹는 입이라도 하나 줄이는 것이 낫겠다는 판단으로 다시 중국으로 돌아가 나와 자식들에게 송금을 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녀의 삶은 언뜻 보면 드라마에나 나올 법한 기구한 한 여성의 삶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 시대를 살아온 상당수의 북조선 여성들이 공유하고 있는 역사이기도 하다.

 

북조선에서 여성은 두 개의 다른 이름으로 호명된다. ‘어머니’와 ‘혁명가’, 이 두 이름 사이의 간극에 대해서는 기존의 연구가 어느 정도 있었지만, 수많은 모습으로 존재하는 어머니‘들’과 ‘혁명의 한쪽 수레바퀴’라는 선전 구호 밖에 존재하는 다층적인 여성의 모습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별로 없다. 

북조선 공간(公刊) 문헌에서 재현되는 북조선 여성은 전형적인 ‘어머니’와 ‘혁명가’로 존재할 뿐이고, 북을 떠나온 여성들의 증언은 피해자 서사가 너무 강렬했던 까닭에 그녀들의 다면적인 모습이 충분히 드러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살아남은 여자들은 세계를 만든다』는 북조선 여성들의 삶에 깊게 새겨진 해방, 전쟁, 분단, 탈·냉전, 세계화 등을 그녀들의 경험 세계의 면면을 통해서 복원하려는 시도를 담고 있다. 

북조선 여성들의 역동적인 삶을 드러내기 위한 방법은 증언에 기반을 둔 ‘소설 쓰기’다. 최근에 국제정치학 분야에서 ‘소설 쓰기 방법론’을 활용하여 특정한 사건의 맥락을 복원하거나 젠더적 시각을 개입시키려는 시도가 이뤄진 바가 있다. 저자가 북조선 여성들의 이주를 연구하면서 만난 150여 명의 증언을 활용하여 북조선 체제가 선전을 위해 내세운 여성들의 삶과 경험을 상상력을 덧입혀 그려내는 것이다. 국가의 서사 이면의 북조선 여성의 생생한 삶에 다가가려는 시도이기도 하고, 그녀들의 일상이 국가 및 국제와 뗄 수 없다는 것을 밝혀내기 위함이기도 하다.

예컨대 이 책은 천리마작업반운동의 노동영웅으로 알려진 ‘길확실’의 삶이 단순히 ‘영웅’에만 머물지 않았으며, 청년 세대의 충성을 강조하는 북조선 영화 「한 녀학생의 일기」의 주인공 수련이 국가에 복종하는 삶을 거부할 수 있었음을 보여준다. 북조선 여성들의 다면적인 삶을 보여주기 위한 전략으로 활용된 ‘소설 쓰기 방법론’은 철저하게 ‘증언’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데, 이는 픽션과 논픽션의 경계를 넘나들기 위한 전략이기도 하다. 

분단의 국가를 살아가는 여성들은 북조선에만 존재하지 않는다. 조중접경지역에서 만난 조선족, 일본의 자이니찌, 남한의 여성들에게 미치고 있는 분단의 영향력은 막강하다. 『살아남은 여자들은 세계를 만든다』는 저자가 북조선 여성을 연구하며 중국, 일본, 남한에서 만난 여성들의 삶을 소개하면서도 저자 스스로에 대한 연구를 통해서 어떠한 변화를 겪게 되는지를 밝혀낸다. 연구자와 연구 참여자 사이의 위계의 문제에 조응하기 위해 연구자 자신을 분석 대상의 일부로 포함시켰다. 

저자는 분단과 북조선 연구에 천착한 계기를 탈식민주의와 페미니즘이라는 시각으로 자신의 삶을 성찰하면서 시작됐다고 분석하고 북조선 여성들과의 만남이 연구자의 시각과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음을 고백한다. 『살아남은 여자들은 세계를 만든다』는 북조선이라는 국가 담론 이면에 존재하는 사람들, 그것도 가장 낮은 자리에서 ‘살아남은’ 여자들의 존재를 소개하려는 시도이다.

지금까지 ‘국가’ 혹은 ‘피해자’라는 위치에서 무채색으로 존재했던 그녀들의 삶에 색을 덧입혀 북조선의 여성들의 다양한 얼굴을 복원하고자 했다. 그녀들의 삶에 대해 심도 있는 이해가 가능할 때 거울상으로 존재하는 남한 사회도 비로소 마주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김성경 
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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