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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연구자를 만나다
여성 연구자를 만나다
  • 천주희
  • 승인 2023.02.27 08:4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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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후속세대의 시선
천주희 연세대 미디어문화연구학과 박사수료

천주희 연세대 미디어문화연구학과 박사수료

지난해 《인문사회 분야 여성 신진연구자 실태에 관한 연구》(2022)에 참여했다. 연구를 위해 네 명이 모였고, 모두 여성이었다. 첫 연구 회의에서 우리는 여성 연구자의 삶에 대해 논의하다가, ‘도대체 그 많던 여성 연구자들은 어디로 갔을까?’라는 질문에 도달했다. 국내 대학원 진학률은 과거보다 증가했고, 여성 진학률도 증가했다. 하지만, 대학 학부부터 시작해 대학원 박사과정에 이르는 과정을 살펴보면, 여성의 비중은 반대로 줄어들고 있다. 몇몇 학술 통계자료만 보아도 학계가 얼마나 불균등한 성비를 지닌 곳인지 파악하기란 어렵지 않았다. 문제는 왜 줄어드는지 이유를 밝히는 선행 연구가 부족할 뿐만 아니라 선행 연구를 보아도 명쾌한 답을 찾기 어려웠다. 그렇다면, 연구자 중에 유독 여성들은 이곳에 남지 못하는 걸까?  그 답을 우리가 찾아보기로 했다. 

우리는 23명의 여성 연구자를 만났다. 대상은 박사과정부터 박사학위 취득 후 5년 이내의 사람들이었다. 연구자를 연구하는 경험은 내게도, 연구팀원들에게도 낯선 경험이었다. 인터뷰할 때, 우리는 학술적 언어와 일상 언어를 편하게 구사하며 서로의 경험과 의견을 나누었다. 연구 참여자들의 언어는 구체적이면서 명료했고, 다정하면서 날카로웠다. 인터뷰는 한여름에 이루어졌다. 여성 연구자들을 만날수록, 지치기보다 ‘우리’의 몸집이 단단하게 커지는 느낌을 받았다. 동시에 여성 연구자라고 할지라도 ‘우리’일 수 없는 차이가 선명해졌다. 지역에 따라 연구자들이 느끼는 고립감과 폐쇄성의 의미는 달랐고, 대학 형태(국립, 사립)에 따라 경제적 불안감도 달랐다. 또 한국에 유학 온 연구자들은 여성이라는 젠더 차이보다 국적, 언어, 학연 중심의 학계 문화에서 더 차별을 경험했다. 처음에는 ‘여성’이라는 공통점에서 시작했지만, 어떤 조건과 정체성은 ‘여성’보다 더 크게 작용하고 있었다. 교차적 관점, 교차적 읽기가 중요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를 막상 분석할 때는 다층적인 결을 드러내는 데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연구팀은 분석 과정에서 여성 연구자들이 어떤 학술 환경과 노동 환경에 놓여있는지 커다란 지형을 그려갈 수 있었다. 예전보다 차별이 많이 사라졌고, 평등을 지향한다고 말하지만, 노골적이고 직접적이던 차별이 은근한 차별로 바뀌었을 뿐 여전히 배제적인 문화와 구조는 지속되었다. 특히 국내 지식 생태계는 수도권, 남성, 학벌, 한국인을 중심으로 견고하게 구조화되어 있었다. 가장 큰 문제는 여성 연구자의 삶뿐만 아니라 인문사회 분야 연구자 기본 실태조차 공론화되지 않는 실정에서, 여성 연구자의 삶에 주목하는 일은 우선순위에서 덜 중요한 것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그러나 여성의 시선으로 보았을 때만 포착되는 것도 있다. 연구자가 임신 소식을 알리면, 남성은 축하를 받지만 여성은 연구를 지속할 수 없을 거라는 우려를 받는다. 취업이나 교수 자리를 두고도 여성은 뛰어난 성과뿐만 아니라 인품까지 완벽하기를 요구받는다. 또 무임으로 간사 노동, 행정 업무, 보조적인 역할을 더 많이 수행하며 지식 생태계를 지탱하고 있다. 즉 여성의 관점에서 출산/육아, 고용, 주체성, 지식노동을 바라보면, 이 생태계가 누구에게 기대어 있는지 발견할 수 있다. 

몇 개월에 걸쳐 연구를 마쳤을 때, 여성 연구자들이 왜 사라질 수밖에 없었는지 답을 찾을 수 있었다. 그것은 현재 나의 모습이었고, 마주하고 싶지 않은 미래이기도 했다. 하지만 여성 연구자들은 각자 놓인 현장에서 다음에 올 누군가를 위해 고군분투하며 선례를 만들고 있었고, 이전과 다른 방식으로 저항하고 균열을 내고 있었다. 연구하는 동안 23명의 이야기는 나에게 내일을 살아가는 힘을 주었고 연구자로서 자부심을 느끼게 했다. 나는 이 연구가 다른 이들에게도 힘이 되는 연구로 읽히기를 바란다. ‘학문 후속세대의 위기’, ‘인문학의 위기’, ‘대학의 위기’ 등 어디에서든 위기를 말한다. 그런데 나는 섣부르게 ‘위기’를 선언하기보다 아직 오지 않은 미래에 가능성을 걸어보기로 했다. 그 길에 더 많은 우리가 만나서 함께 걸으면 좋겠다. 

천주희 연세대 미디어문화연구학과 박사수료

문화연구자 겸 작가. 주로 청년, 여성, 예술가, 소수자, 비/노동, 금융/부채 분야에서 연구하고 글을 썼다. 대표 저작으로 『우리는 왜 공부할수록 가난해지는가』, 『회사가 괜찮으면 누가 퇴사해』가 있으며, 공저로 『무엇이 우리를 인간이게 하는가』, 『연구자의 탄생』 등이 있다. 현재 『문화/과학』 편집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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