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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홍규의 아나키스트 열전 129] 잔인한 정부에 충성을 거부한 아나키스트
[박홍규의 아나키스트 열전 129] 잔인한 정부에 충성을 거부한 아나키스트
  • 박홍규 영남대 명예교수∙저술가
  • 승인 2023.02.27 08:4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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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딘 발루
아딘 발루(Adin Ballou, 1803~1890) 사진=위키미디어

개인주의가 미국 토착 아나키즘를 지배했지만, 대체로 기독교 영감에 기반한 자치체주의 전통이 있다. 단적으로 아딘 발루(Adin Ballou, 1803~1890)는 1830년대에 자치체와 함께 자유를 추구했다. 뒤에 톨스토이가 존경한 그는 신의 절대적 권위가 인류의 삶을 인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딘 발루는 “인간의 의지(인간 정부)는 한 명의 것이든, 1,000명의 것이든, 수백만 명의 것이든 관계없이 본질적으로 권위가 없고 도덕적 우월성도 없으며 인간의 충성에 대한 정당한 요구도 없다. 그것은 양심에 대한 독창적이고 고유한 권위가 없다”, “신의 나라는 설득과 사랑으로 양육되지만, 인간 정부는 부패, 감옥, 전쟁으로 표현되는 교활하고 물리적인 힘에 의존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천년이 이미 도래한 것처럼 행동해야 하며 투표, 입법 또는 투쟁을 통해 세속적 권위를 지지하는 것을 거부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발루는 인간 정부 대신 마을회의 같은 '자발적 결사에 의한 이웃 사회'를 제안하면서 그곳에서 여론은 무질서한 개인을 개혁하기에 충분하다고 했다. 그는 이러한 이상을 홉프데일(Hopedale) 자치체에서 실현하려고 노력했다. 

실천적 기독교인의 호프데일, 사회주의 노선으로 갈라지다

발루는 로드아일랜드의 컴벌랜드에 있는 농장에서 태어났다. 그는 대학에 가고 싶었지만 그의 아버지는 그가 가족 농장을 운영하기를 원했다. 1822년 초에 발루는 결혼을 하고 보편주의로 개종하고 설교했으나 뒤에 회중(유니테리언)교회에서 목회 활동을 했다. 1837년에 그는 노예 폐지론자로 공개적으로 커밍아웃하고 1838년에는 기독교 무저항이라고 하는 평화주의로 개종했다.

발루는 몇몇 목사 동료와 평신도들과 함께 1839년 <실천적 기독교의 표준>을 만들었다. 서명자들은 질서 유지를 위한 무력 사용에 의존하는 것으로 오염된 ‘세계 정부’에서 탈퇴한다고 발표했다. 그들은 정부에 참여할 수는 없었지만 반항하거나 "물리적 힘으로 그들의 명령에 저항하지" 않았다. 그들은 "우리는 육신의 무기나 어떠한 물리적 폭력도 사용할 수 없다. 우리의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서도 아니다. 우리는 악을 악으로 바꿀 수 없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호프데일은 1660년에 유럽에서 온 이민자들에 의한 정착이 시작됐다. 하지만 호프데일이란 이름을 지은 것은 발루와 실천적 기독교인들이다. 사진=위키미디어

발루와 동료들은 실천적 기독교인들이 그들의 신념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 부름을 받았다고 믿게 되고 새로운 문명을 형성하기 시작해야 한다고 믿었다. 이후 그들은 여러 유토피아 커뮤니티 계획을 연구한 후 자신의 커뮤니티를 설계하기 시작했다. 1840년부터 그들은 ‘원시 기독교의 전파’를 위해 <실천 기독교인(Practical Christian)>이라는 신문을 발행하고 1841년 밀포드 서부에 있는 농장을 구입하여 호프데일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러나 호프데일의 사회주의 형태에 대한 불일치는 첫해에 위기를 초래했다. 가난한 회원들은 모든 재산을 공유할 것을 요구했으나 발루는 과밀 커뮤니티 내의 긴장을 완화하는 데 필요한 것은 나중에 그가 썼듯이 "커뮤니티에서 개인의 흡수"가 아니라 "개인 은둔, 활동 및 개발을 위한 더 많은 기회"라고 느꼈다. 따라서 헌장은 더 많은 프라이버시를 허용하고 노력과 기여에 대한 경제적 보상을 증가하도록 수정되었다. 그 뒤 가장 비타협적인 공산주의자들은 호프데일을 떠났다. 1847년에 추가된 헌장 수정은 개인주의를 더욱 선호했다. 발루는 노예 제도 반대 강연을 펼치고 1843년부터는 뉴잉글랜드 비저항 협회의 회장을 역임했다. 

1856년에 호프데일 자치체는 사실상 종료되고, 지역 유니테리언 협회에 소속되었다. 1880년까지 그곳의 목사로 재직한 발루는 뒤에 자신이 시도한 것이 시기상조지만 옳았다고 확신했다. 말년에 그는 톨스토이와 알게 되었고 톨스토이는 『신의 나라는 네 안에 있다』에서 발루에 대해 언급했다. 발루는 1890년에 호프데일에서 죽었다. 

정부에 적극적 저항은 하지 않았던 발루의 무저항

발루는 신의 법이 인간의 법보다 우월하다고 주장했다. 그의 가장 영향력 있는 책은 그가 1846년에 쓴 『기독교의 무저항』으로 이는 톨스토이에게 영향을 미쳤고, 소로가 세금 납부를 거부한 바로 그해에 출판되었다. 발루는 기독교 평화주의자들이 군대에 참여하지 않을 수 있으며 폭력을 사용하는 기관이나 정부에 적극적인 지원을 하지 않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이것이 절대 아나키스트는 아니라고 부정한다.

"그 교리가 모든 종교, 정부, 사회 조직, 헌법, 법률, 질서, 규칙, 규제에 어긋난다고는 하지 말라. 그것은 이것들 중 어느 것에도 어긋나지 않는다. 그것은 그들에게 가장 높은 의미와 가장 좋은 의미에 해당된다. 그것은 오직 그러한 종교, 정부, 사회 조직, 헌법, 법, 질서, 규칙, 규제와 구속에 반하는 것으로 그리스도의 법칙에 명백히 반하는 것이다."

발루가 1846년에 쓴 『기독교의 무저항』은 톨스토이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다. 사진=위키미디어

이것은 철학적 아나키즘의 한 형태를 나타내는 것이며, 이는 정치적 권위에 절대적으로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부당한 정치적 권위에만 반대하는 것이다. 발루는 나중에 정부가 본질적으로 신성한 것이라고 하면서도 신의 법에 반하는 인간 정부는 정당화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법과 정부에 절대적으로 반하는 모든 법과 정부는 도덕적으로 무효다"라고 말했다. 

발루는 대부분의 인간 정부가 불공평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소로와는 달리 발루의 무저항 원칙은 인간 정부에 대한 적극적인 저항을 허용하지 않고 대신에 기독교인들이 인간 정부에 복종하고 복종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사실, 발루는 그의 사상이 더 급진적으로 전투적이고 명백히 아나키스트적인 함의를 피하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발루는 군국주의적이고 잔인한 인간 정부는 우리의 충성을 받을 자격이 없다고 반대한다. 

“비저항은 전쟁, 사형, 노예제도, 그리고 모든 종류의 형벌상 상해를 위한 것이 될 수 없다. 또한 이러한 것들을 근본적으로 위한 것은 어떤 정부에게도 있을 수 없다. 이런 것들은 무저항과 화해할 수 없다. 그러므로 그것의 지지자들은 기존 정부에 자발적인 참여자가 될 수 없다. 그들이 정부에 반대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은 기존 정부들에서 좋은 모든 것이 분리할 수 없이 서로 얽혀 있는 이러한 근본적인 폐해에 완전히 반대하기 때문이다.”

 

박홍규 영남대 명예교수∙저술가

일본 오사카시립대에서 법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미국 하버드대, 영국 노팅엄대, 독일 프랑크푸르트대에서 연구하고, 일본 오사카대, 고베대, 리쓰메이칸대에서 강의했다. 현재는 영남대 교양학부 명예교수로 있다. 전공인 노동법 외에 헌법과 사법 개혁에 관한 책을 썼고, 1997년 『법은 무죄인가』로 백상출판문화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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