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탁 / 편집기획위원·강원대 © |
전 세계인의 축제인 월드컵에 한국팀은 연속 6회 출전하는 기록을 세웠지만 그보다 더 중요하게 취급되어야 할 기억은 2002년 월드컵 유치일 터이다. 2002년의 월드컵 유치와 한국팀의 눈부신 선전을 통해 우리는 온전한 의미에서 월드컵이라는 축제를 온몸으로 경험했던 바, 그것은 차라리 하나의 ‘事件’이라 불러야 옳으리라. 개항 이후, 이 나라 역사 가운데서 온 국민이 그렇게 자발적이고 순수한 마음가짐으로 하나의 목표에 열광하고 동참한 적이 있었던가. 2002년 우리의 거리응원에 대해서는 전 세계인과 더불어 무엇보다 우리 자신이 깜작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번 2006년 독일 월드컵 때도 마찬가지이다. 우리 국민들은 젊은이들의 구호를 함께 외치며 전국 각지에서 열정적으로 한국팀을 응원했다. 우리 사회의 이러한 현상에 대하여 학자들의 분석이 가해지고 각자 나름대로 是是非非를 따지는 일도 일어나고 있다. 물론 지나친 월드컵 열기를 우려하는 목소리에는 경청할 만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나는 우리 국민들의 월드컵 매혹 현상을 부정적이기보다는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쪽이다. 우리 국민들의 일사분란한 대규모 거리응원에서 내가 목격한 것은 진정한 의미의 축제적 양상이다. 한 사회에서 축제는 견고한 일상의 틀을 깨는 ‘놀이’이고 ‘유희’이면서 ‘창조’를 의미한다. 모든 사회는 그러한 의미의 고유의 축제 양식을 가지고 있다. 여기서 내가 묻고 싶은 것은 지금까지 우리에게 그런 의미의 ‘살아있는’ 축제가 있었던가 하는 물음이다.
우리 국민들의 월드컵 응원 열기는 우리 사회의 무서운 잠재력, 역동성을 보여준 장면에 다름 아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젊은 세대들의 약동하는 생명력이 壓卷이었다. 자신의 몸을 온통 붉은 색으로 치장하고 목청껏 한국팀을 응원하는 그들의 기개는 전 세계인을 매료시켰다. 곰곰이 생각해 볼 때, 지금까지 그들에게는 자신의 열정을 표현할 수 있는 무대가 없었다. 여지껏 우리 사회가 젊은이들이 자유롭게 자신의 창조적 에너지를 표현할 수 있는 축제의 장을 마련해주지 못했다는 점에 대해서는 기성세대들의 책임이 크다. 이와 더불어 그동안 우리 국민들의 삶은 너무 엄격한 타율의 지배를 받아왔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하게 된다. 우리의 학교와 가정, 그리고 직장은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가. 우리 사회의 내면에서 지속되고 있는 지나친 ‘억압’들은 창조적 에너지를 표현하는 축제적 삶에 대해 여전히 적대적이다.
우리의 현대사는 일제 강점기의 압제와 해방기의 무질서, 산업화 시대의 사회 갈등으로 이어지는 고난의 연속이었다. 그리고 이 고난의 연속은 알게 모르게 우리 내면에 억압과 타율이라는 깊은 상처를 남겼다. 이제는 그 억압과 타율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야 할 순간이다. 지금, 월드컵을 통해 우리가 얻고 있는 경험은 바로 그것을 요구하고 있다. 지금 우리에게는 축제적 의미에서 삶을 즐길 수 있는 여유, 그 창조적 에너지가 필요하다. 앞으로 우리 사회에서 더 많은 축제의 형식들이 창출되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