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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용비평_한국 현대무용, 절충주의가 문제다
무용비평_한국 현대무용, 절충주의가 문제다
  • 김남수 무용평론가
  • 승인 2006.07.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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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무용의 태동은 신선했다. 무용의 ‘현대’는 일찌감치 ‘현재’·‘당대성’의 뉘앙스를 띠었다. 세계의 소박한 체험을 회복하는 신체라는 기본 방향이 정립되자, 밀란 쿤데라가 말한 ‘구체의 형이상학’이란 의미의 ‘현재’가 튀어나왔다. 유일하며 고유한 흐름, 마치 물고기가 물살을 느끼듯 전체를 살피는 무용의 개념. 이 개념은 매우 천천히 성립됐고, 무용사의 주역마다 견해는 달랐다.

이사도라 던컨은 그리스 정신에 경도된 취미판단에 머물렀지만, 결과적으로 발레중심의 미의 형이상학을 붕괴시켰다. 마사 그레이엄은 내재적인 호흡과 움직임을 총괄해 내면성의 구축으로 나갔다. 그런가 하면, 머스 커닝햄은 건축적 의지가 없는 상태에서 삶의 우연성, 흐름을 실험했다. 모더니즘의 바람이 불던 미국에선 추상적이지 않은 신체를 재발견하려 했고, 춤의 위상을 거짓 운동에서 실재적 운동으로, 일반적 운동에서 독특한 운동으로 돌려세우려 했다. 특히 저드슨 교회에 모인 무용가들은 예배 후에 춤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실험했다.


한국 현대무용은 미국 현대무용의 틀 속에서 진행됐다. 하지만 온전한 소개는 아니었고, 단지 그레이엄의 비중이 지나치게 높았다. 즉 내면탐구와 움직임의 구축이 그 방향이었는데, 현재는 한계가 명백해졌다. 게다가 그레이엄의 이념이 왜곡됐다. 그는 신체의 안팎이 세포막처럼 생명운동 하는 무용개념을 주장했지만, 한국에선 딱딱해진 세포막 위에 ‘긴장’과 ‘이완’의 소위 ‘그레이엄 테크닉’ 자체를 반복하는 것에 불과했다.

현대무용 1세대가 미국유학에서 돌아와 규범화된 테크닉, 공식적인 표현들을 선호했고, 배출된 무용가들도 답습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상이 악화된 건 1980년대 레이건정부가 들어선 정치적 기류와 맞물린다. 예술기금을 축소한 미국에서 더 이상 활동이 불가능해진 무용가들은 대거 엑소더스를 감행했다. 만신전에 오른 세계 최고의 안무가 그룹 중에서 윌리엄 포사이드, 존 노이마이어, 카롤린 칼송, 수잔 버지 같은 이들이 이때 뉴욕을 벗어나 유럽으로 빠져나갔다. 이렇게 되자, 한국 현대무용은 미국과의 실질적인 커넥션이 끊어진 채, 고립된 상황에서 주어진 테크닉을 동어반복하는 수준에 고착화됐다. 내부적으로 미학적 혁신을 위한 주체적인 자각이 있었어야 했지만, 별다른 움직임 없이 기존의 습속에 만족하는 경향이 다분했다.

유럽 컨템퍼러리 댄스의 물결 속에서

춤은 사회적이며 정치적 풍향계라는 사실을 가장 잘 보여주는 영역이 바로 유럽컨템퍼러리 댄스다. 울티마 베즈 무용단의 ‘블러쉬’, ‘순수’라든가 세드라베 무용단의 ‘믿음’, 사샤 발츠의 ‘육체’ 등등 많은 작품들이 전쟁과 정글 자본주의를 신체로서 표현한다. 음악을 타면서 낭만화된 감상에 빠져드는 춤 대신 신체의 현상학이 펼쳐내는 질서를 좀더 선호하게 됐다. 이것이 급박해지는 당대의 분위기를 가장 효과적이고 극적으로 드러내는 방식이다. 그런데 이런 경향은 독일의 거장 피나 바우쉬가 개척한 탄츠테아터(춤연극)에서 비롯돼 확대 강화된 것이다. 거기에 영상과 테크놀로지가 무대의 실재 공간과 신체와 결합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컨템퍼러리 아트가 진행되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 현대무용이 유럽산 현대무용을 바라보면서 여러 가지로 오해와 새로운 문제를 파생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가장 기본적 오해는 “춤이 없다”는 것이다. 미적으로 출렁이며 땀을 흘리는 일종의 매끈매끈한 춤을 선호하는 우리 풍토에서 신체 자체를 공격적으로 파고들어 기억, 질료, 변신을 다룬다는 발상은 낯설다. 정신의 관념적 아름다움보다는 신체의 물질적 상상력이 더욱 삶과 화해하게 만든다는 인식이 약하다.

그러니까 춤은 춤일 뿐이며, 그 외의 공연요소는 싹 제거하며 본다는 것이다. 장르적 가름으로 춤을 고수하는 것도 이제는 수상한 터에 외국공연 때문에 소외당했다고 반박하는 것은 본말이 전도됐다. 정확히 말하면, 타율에 의해 소외당했다기보다는 자율적으로 자기소외한 것이다. 예술이니까, 범박한 표현 대신에 미적인 표현을 써야 한다는 규제이념은 또 얼마나 완강한지. 그래서 “옷을 벗는다”, “현실에 너무 밀착했다”는 무용계의 반응도 일면 이해는 간다.


부정의 태도가 있는가 하면, 수용의 태도도 있다. 여기서 문제는 좀 복잡해진다. 정체된 미국 현대무용의 잔존물로써 거꾸로 유럽 컨템퍼러리 댄스를 해석하려는 절충적인 입장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한때 국내 현대무용의 정상급 안무가로 여겨지던 안애순은 관습적인 동작을 반복하는 가운데, 영상이나 설치미술을 외삽하고 있다. 공연요소들이 독립적인 상태로 외삽하는 방식은 제각각 따로 놀게 하며, 무의미한 장식의 효과 속에서 무너질 뿐이다.

‘Just-Feedback’, ‘SEVEN+1’ 같은 공연이 페미니즘의 시각, 종말론의 시각을 표방하고 있지만 일종의 소재주의로 비칠 수밖에 없는 것이 프로파간다에 가까운 공식성이 지나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현대무용의 ‘현대’는 들뢰즈가 말한 ‘nowhere’의 부재성이 ‘now’와 ‘here’의 현존성과 교차하는 생의 감각이란 생각이 든다. 그 감각의 더듬이를 놓치면서 안애순은 퇴락한 동어반복 속에서 약간의 유희를 섞어보려 하지만, 결국 미국 현대무용의 낡은 복제로 전락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안애순의 피드백 ©

반면, 국은미는 ‘25분’, ‘불안’, ‘공기의 꿈’을 통해 자신이 배운 미국 현대무용을 끈질기게 반복하고 있다. 영상을 사용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자신이 장기로 삼는 론도 형식의 패턴을 신체의 점성으로 표현하는 것이 이채롭게 느껴진다. 매우 건조하고 눈에 익은 방식이 그대로 채용되지만, 계속 반복함으로써 그 관습의 정체를 스르르 드러낸다고 할까.

미니멀리즘의 고집이 낳은 성취라고 할 수밖에 없는데, 그 끈질긴 신체의 운동은 먼 길을 우회해 유럽컨템퍼러리의 신체와도 만날 수 있을 것 같다. 무엇보다 신체가 기본적으로 눈이 없이 피부로 접촉하면서 더듬거리며 나아간다는 그 우직함, 불모성이 역설적으로 말을 하고 있다.


이러한 두가지 예는 개방된 현대무용의 환경에서 무용가들이 일반적인 경향이라고 생각된다. 대부분 영상으로 덧칠한 무대 너머로 춤을 숨기거나 아니면 춤을 의식적으로 드러내지만 잘 되지 않는 셈이다. 물론 국은미의 경우처럼 독자적인 행보를 통해 새로운 과정으로 나아가기보다 머무르는 것이 보통이다.

의식없는 모방과 반복

젊은 세대의 안무가 미약하다는 것이 우리 현대무용의 미래를 어둡게 전망하는 근거이다. 정영두, 김윤진, 박근태, 김향진처럼 특출한 재능을 발휘하는 안무가에 대한 일정한 견제가 존재하는 상황에서 댄스신(Dance Scene)의 지평은 열리지 않는다. 무엇보다 주류 속에 성공적으로 편입해가는 층에서 실존적 자각 없는 유행 코드를 반복하거나 베끼는 현상이 만연하는 것은 도움이 안된다.


가령, LDP무용단의 공연 대부분은 포디즘의 대량생산품에 가깝고 전형적인 장면들이 반복적으로 나열되고 있다. 신체를 놀리는 통제력은 좋을지 몰라도 전혀 표현적이지 않다. 양철 탁자를 두드려 소음을 내거나 사과를 던지고 쫓는 장면, 난폭하게 여자무용수를 공격하는 장면은 매 공연마다 되풀이되는 폭력 타령이다. 대상없는 폭력의 자기복제가 빈번한 것으로 볼 때, 심한 페티시즘을 앓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런데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실기과 출신들이 결성한 이 단체가 폭력의 자기복제를 돌림병처럼 퍼뜨리고 있는 게 아닌가 우려스럽다.

▲LDP의 인간의 오점 ©

고정 안무가가 없어서 이 단체를 이끄는 무용원 미나유 교수라든가 해외의 이스마엘 이보, 이작 코박이 안무를 대행하지만, 늘 기계적인 반복, 복제라는 것이 그런 심증을 뒷받침한다. 그리고 객석을 몽땅 차지한 선후배들, 동료들이 환호와 갈채를 보내며 기분내기에 골몰한다. 일종의 내부자 거래인 셈이다. 이 단체는 유럽 컨템퍼러리 댄스 이전에 피나 바우쉬의 탄츠테아터 문법을 오해한 가운데, 매끈매끈한 춤과 탄츠테아터를 엉뚱하게 절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류석훈의 ‘그들이 원하는 것들…’이나 김성한의 ‘Story about Enemy’도 LDP무용단과 비슷한 코드를 공유한다. 무차별의 폭력 문화와 유희 아닌 유희에 젖어 있는 것. 과자를 주워먹거나 사과를 베어무는 장면이 즉물 이상의 어떤 의미를 가졌다고 과잉해석하기도 하고, 신문을 보면서 갑자기 앙천괴소를 터뜨리기도 한다. 자신들이 스테레오타입을 재현하면, 전혀 다른 의미가 생겨날 것이라고 가정하는 태도는 이상하기까지 하다. 게다가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잘 가꾼 몸매를 드러내며 과시욕에 빠져드는 패턴으로 방향전환한다. 폭력도 표현하고 자의식도 충족한다는 논리. 결국 배부른 중산층의 마인드로 주변주 정서를 흉내내는 것에 불과하다. 무엇보다 의미의 생성을 위해 춤이든 신체이든 표현의 새로운 영역, 조합을 탐색하기보다 그저 닳고닳은 클리쉐의 폭력 묘사에 만족하는 것은 무용의 ‘현대’와는 거의 관련이 없다.


근대를 지나 미국 현대무용을 받아들인 이후, 한국 현대무용은 그 자장이 너무 강했다. 현재는 각질화되고 진부해진 표현의 관습에 매달려서 삶의 현실을 보지 못하는 상태이다. 내부적인 자기조정에 안간힘을 다하지만 그것은 기본적으로 춤의 바깥과 결합하지 않으면 풀리지 않는 숙제다. 유럽 컨템퍼러리 댄스가 외파로서 영향을 줄 수도 있지만, 그 ‘당대성’  ‘정치성’과 함께 새로운 공연 문법에 심한 이질감을 느끼는 것 같다. 그렇다면 현대무용의 태동이 갖는 의미를 상기할 필요가 있다. 생활 세계와 신체의 발견이 춤에 가한 충격을 다시 음미할 필요가 있다. 젊은 세대라면 교육의 과정 속에서 해결할 수 있겠지만, 불행히도 순응적인 도제식 교육문화가 장애로 작용한다. 현대무용은 어차피 소수의 재능이 헤쳐 나아가는 장르이긴 하지만, 현재로선 어두운 전조를 벗어날 길이 멀어 보인다.

김남수 / 무용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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