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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과 자본주의
산책과 자본주의
  • 김영민 한일장신대
  • 승인 2006.07.03 00:0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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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비평

자본주의는 모든 것의 移動이며, 심지어 (월드컵의 응원 열광에서 보듯) 샤머니즘에까지 이른 원격이동이기도 하다. (화상응원은 원격감응이라는 시대착오적, 외설적 주술에 다름 아닌 것!) 그러나 산책은 '이동이 아닌 걷기'다. 그래서 그것은 出場이 아니며, 관광이 아니며, 순례가 아니며, 배달은 더더욱 아니다. 마찬가지로 그것은 아도르노가 나치즘의 그늘 아래 인간의 품위를 부각시키면서 얼핏 시사하듯 '행진'도 아니며, 또한 '교통'(P. 비릴리오)도 아니다. 그러면 그것은 대체 무엇일까. 글쎄, 그것은 여전히 아무것도 아닌데, 바로 그 까닭에 그것은 내가 '동무'라고 불러왔던 무위와 부재의 副詞的 사귐이 가능한 사이공간이 된다. 그렇기에 산책은 자본주의적 환경 속에서 중요한 주제가 되는 것이다.

그러면 누가 걷는가. 혹은 산책의 '주체'(실상 이 말은 그 자체로 역설인데, 산책은 매우 중요한 의미에서 '주체보다 앞서가기', 혹은 '의도에서 벗어나기'이기 때문이다.)는 누구인가. 물론 (여기서 벤야민을 조금 연상해도 좋은데) 그것은 '상처받은 사람'이다. 조금 더 정확히는, 상처를 받은 탓에 세계가 세속이라는 迷路로 바뀐 사람을 말한다. 내 오래된 명제를 반복하자면, '당신들은 이동하지만, 상처받은 사람은 걷는다'. 그렇기에 파워워킹이나 혹은 슬로우워킹 같은 우스개들은 도무지 산책이 아니다. (굳이 분류하자면, 그것은 영락없는 자본주의다.)

물론 이 상처는 자본제적 삶의 양식, 그 체계적 식민화의 그늘과 같은 것이다. 말하자면, 상처를 매개로 산책과 자본주의는 창의적으로 싸우거나 우스꽝스레 사통한다. (물론 대체 싸울 수 있는가. 혹은 어떻게 싸우는가, 라는 물음이 논의의 아킬레스건이다.) 당연히, 여러 이론가들의 노작에 힘입어 우리는 산책조차 무해한 듯 점유하는 자본주의의 전포괄적 생리를, 그 '알리바이의 체계'(르페브르)를 잘 알고 있다. 가령, 청계천 복원이라는 찬사일색의 사건은 그 생리의 심연을 알리는 도시주의의 묵시록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산책은 문명과 인간관계의 상처로부터 도피해 숨을 수 있는 루소류의 자연을 향한 낭만주의, 원시주의가 아니다. 북친(M. Bookchin) 등의 반론이 드러내듯 그 같은 태도는 결국 무지와 정치적 방기에 이를 뿐이다.

근대화 일반이나 자본주의는 (마치 한국의 현대철학처럼) 상처의 문제를 체계적으로 회피하거나 억압한 자리를 가리킨다. 술자리가 아니면 상처를 말하지 않는 회사인간들처럼, 자본주의의 단말기로 혹은 그 배달부로 기능하며 쉼 없이 이동-하는/시키는 현대인들은 그 이동의 속도주의 속에서 상처를 외면한다. 상처는 모른 체하면서도, '건강(보신)'을 떠드는 꼴은 소란스럽기 짝이 없다. 그러므로, 자신의 意圖와 기능적 자기정체성이 일치하는 오만한 이데올로기적인 순간에는 걷지 않는 법이다. 한 해에 지구를 다섯 바퀴나 돈다고 해도 자본주의의 격자판을 좇아 이동할 뿐, 존재의 상처와 함께 세속의 미로 속으로 이탈하지 못한다.

산책은 '~워킹'이라는 기능화 된 1차원적 보행이 아니다; 그래서 산책은 자연스럽게 자본주의적 동선과 템포를 벗어난다. 그리고 인간의 상처를 다독이는 리듬을 저절로 배우면서 자본제적 도시의 인력으로부터 몸을 끄-을-며 벗어난다. 물론 그곳은 청계천도 아니며 지리산의 청학동도 아니다. 그곳은 오직 없는 관계를 향한 부정적(부재적) 삶의 양식이 밝혀내는 새로운 가치들이 번득이는 결절점들일 뿐이다.

▲금강송 ©
자본주의가 이동이면서 동시에 '교환'이라면, 산책의 탈자본주의적 창의성은 무엇보다도 너와 나 사이의 관계를 자본제적 교환의 바깥으로 외출하도록 돕는 데 있다. 구름과 바람, 소리쟁이와 기생초, 다슬기와 꺾지, 금강송 너머의 황혼 등은 단지 완상의 대상이거나 레저의 환경만이 아니다. 그것은 단번에, 그리고 총체적으로, 우리 삶의 원형적 모습이 등가적 교환의 외부에 기대고 있다는 사실을 일깨운다. 산책, 그것은 아직 아무것도 아니지만 우선 자본제적 체계와 생산적으로 불화하는 삶이다.

 

 

김영민 / 한일장신대·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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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자 2006-07-06 21:53:37
글을 읽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상처를 받고나서(상처 받아 온 것을 알고 나서) 그냥 실컷 걷자고 마음먹은 후 떠나는 길이라서 글에 공감 했습니다. 마치 길떠나는 동학에게 지어준 한 편의 시를 선사 받은 것 같군요. 내일부터 한 보름정도 마냥 걷기로 작정하고 떠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