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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적 ‘민족·자유주의’, 미국·일본이 뒤흔들었다
한국적 ‘민족·자유주의’, 미국·일본이 뒤흔들었다
  • 최승우
  • 승인 2023.02.13 09:0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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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 열린연단 ‘자유와 이성’ ㉟ 김경일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

네이버 ‘열린연단’이 시즌9를 맞이해 「자유와 이성」을 주제로 총 44회 강연을 시작했다. ‘자유’를 중심으로 인간과 자연의 본성, 재난과 질병에 대한 제약과 해방 등을 역사, 정치, 철학, 과학기술 등 다양한 학문 분야에서 살펴본다. 지난 7일 김경일 명예교수(한국학중앙연구원)가 「민족주의와 자유주의」를 강연했다. 주요 내용을 요약·발췌해 소개한다. 
제35강은 고세훈 고려대 명예교수(공공행정학부)의 「경제 발전과 자유주의의 문제」, 제36강은 신광영 중앙대 명예교수(사회학과)의 「능력주의, 사회적 아노미, 개인의 자유」, 제37강은 정과리 연세대 교수(국어국문학과)의 「한국 문학 속의 자유와 자유주의」가 예정돼 있다. 
자료제공=네이버문화재단
정리 최승우 기자 kantmania@kyosu.net

민족 전통의 실체, 한국적인 것의 대상과 내용은 근대 이후 한국적인 것의 형성에 영향을 미친 일본과 미국이라는 두 타자에 의해 주로 규정돼왔다고 할 수 있다.

서구 유럽에서 배태된 자유주의는 근대 시민정신 그 자체로 흔히 언급돼 왔다. 전통과의 대항에서 스스로를 정립해 나온 근대 시민사회의 정치 이데올로기가 바로 자유주의라고 할 때, ‘근대성에 대한 각성’에서 자유주의는 출현했다. 미국에서도 정치 이데올로기로서 자유주의는 근대화의 추동력에 대한 주요한 표상이 돼왔다. 따라서 진보의 선구자라고 하는 자유주의자들의 자기의식은 진보가 근대성의 특정 구조와 동일시되는 한 완벽하게 타당한 것으로 지적된다. 이 글에서는 자유주의·민족주의 이념이 걸어온 ‘보편’의 역사 변천을 살펴본 다음, 이를 준거로 해 한국의 사례를 검토해보기로 한다. 해방 이후의 시기에 주목하면 1950년대에 자유주의의 원형이 출현했으며, 1960년대에 민족주의가 본격화됐다는 점에서 한국 근현대에서 이 두 시기는 징후적이다.

근대 자본주의 체제에 연원을 둔 이들 이데올로기가 한국에서 어떠한 방식으로 작동해 왔는가를 살피는 것은 근대 한국 사회가 걸어온 특수한 발전의 길에 비춰 볼 때 매우 흥미로운 문제일 것이다. 이들 이데올로기에 조응하는 요소는 19세기 후반의 개항 이후 조성된 지정학에서 당시 한국 사회가 처한 ‘위기’에 대한 대응의 다양한 형태들, 예컨대 위정척사 운동, 개화파, 농민운동세력, 독립협회, 활빈당 등에서 각각 찾아볼 수 있다. 

 

김경일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는 “민족 전통에 대한 가장 독특한 입장의 사례로는 아무래도 김수영을 들어야 할 것이다”라며 “그는 정치권력이 기획한 민족중흥의 맥락에서 민족의 귀감이나 영웅이 아니라 오히려 민족에 희생당하고 배반당한 개인의 수난과 고통을 기꺼 이 민족의 전통으로 여겼다”라고 설명했다. 사진=네이버문화재단

1919년의 3·1 운동은 이후 식민지에서 전개된 주요 이념의 기원이 됐다. 자유와 인권, 개혁과 관용, 표현의 자유, 평등과 같은 자유주의의 일정한 편린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그것이 궁극에서 민족의 독립과 피압박 민족의 해방을 표방했다는 점에서 민족주의의 부활을 위한 주요한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민족주의의 시대는 유감스럽게도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보수주의는 비록 기본에서는 봉건과 전근대의 성격을 갖는다 하더라도 위정척사 운동의 일정한 요소를 내포했다. 자유주의는 개화파의 갑신정변이나 갑오농민혁명 운동과 독립협회에 나타난 자유와 개인의 권리, 그리고 평등의 원리에 조응한다. 마지막으로 사회주의는 횡포한 부호에 대한 엄징(嚴懲)을 내건 동학이나 활빈당 활동에서 일정한 편영을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서세동점과 제국주의의 대두를 배경으로 이 모든 이념은 궁극에서는 국권 침탈에 반대하거나 국권회복의 주장에서와 같이 민족주의라는 거대한 흐름으로 수렴돼가는 경향이 있었다. 일제 강점기 식민지배에 대한 저항은 물론 자유를 위한 것이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민족 전체의 해방과 독립을 위한 것이었지 개인의 주체적 자율성과 자결을 명시한 목표로 제시하지는 않았다. 

곧이어 조성된 이른바 해방 정국에서 첨예한 계급 대립과 냉전 체제의 도래는 자유의 문제가 실제 현실에서 어떠한 의미를 지니는가를 실험할 수 있는 공간 자체를 소멸시켜버렸다. 이러한 점에서 보자면 근대 의미에서의 자유가 처음으로 논의될 수 있는 것은 1950년대부터라고 봐도 좋을 것이다. 왜냐하면 개인의 자유가 그것에 의해 가능하고, 또 동시에 그에 맞서 주체를 자각하는 시민사회의 영역이 이 시기에 비로소 가능했기 때문이다. 이제 개인은 식민 지배로부터의 해방 투쟁이나 계급의 대의를 위한 헌신이라는 집합 압력과 부딪히지 않고 시민사회의 영역에서 직접 다른 개인과 대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시기에 시민사회의 영역은 정치권력에 의해 극도로 억압됐다. 따라서 자유에 대한 주체와 자각의 의식을 개인이 얻는 데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근대성의 핵심에 자리 잡은 주체의 미성숙은 모호하고 유동하는 자유의 개념이 자유민주주의에서의 자유 개념으로 정착한 정치 과정을 개인의 차원에서 표현한 것이었다.

한국 근현대사에서 1950년대를 가장 서구 지향의 시대로 묘사할 수 있을 것이다. 후술하듯이 서구 민주주의와 민족 고유의 전통 사이의 연관에 대한 문제는 “이승만에 의해 전혀 고려되지 않았으며 그가 거듭 주장하는 것이 있었다면 한국 정치는 미국식 민주주의를 지향해야 한다는 것이었다”라는 평가에서 보듯이, 정치권력은 미국으로 대표되는 서구의 기준에 맞춰 한국의 현실을 재단하고자 했다.

이 시기 정착한 자유민주주의 개념은 서구에서 일반화된 그것과는 다른 한국의 특수성을 반영했다. 냉전 체제를 배경으로 ‘자유민주주의’의 수호는 실제로는 거의 전적으로 반공에 대한 전일의 지지로 귀결됐다. 남북 분단과 이데올로기 대립, 그리고 한국전쟁의 경험은 “공산주의 체제로부터 자유를 수호한다”라는 의미에 자유민주주의의 가장 중요한 가치를 부여한 것이다.

근대 세계의 산물로서 민족주의는 의심할 나위 없이 보편주의로 이끄는 수단이자 동시에 그에 대한 반동으로 작동해 왔다. 개인이 공동체의 구속으로부터 해방된 근대 초기의 민족주의는 확실히 근대성의 한 요소로 인식될 수 있었지만, 오늘날의 서구에서는 집합적 삶의 제한된 연대성으로의 회귀를 억압한다는 점에서 오히려 반동의 요소가 됐다. 

그러나 이른바 제3세계로 눈길을 옮겨 보면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서구와는 달리 오늘날 제3세계에서 그것은 전통 부족과 지역의 구속에서 개인을 해방시킨다는 점에서 근대화의 추동력으로 작동하는 반대의 기능을 행사한다. 이 경우 민족주의와 민족국가는 해방자이자 동시에 억압자로서 기능하는 것이다.

1950년대의 한국 사회를 만약 제3세계로 분류한다면, 이 시기의 민족주의는 근대성의 표지로 설정될 수 있겠지만 오히려 정반대로 그것은 때로는 전통의 영역에 가까운 어떤 것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하는 다의와 복합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국내에서 나타난 배타와 고립의 민족주의 현상은 국제 측면에서 미국에 대한 예속 지위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냉전 체제 안에서 미국 헤게모니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는 상황에서 이 시기 제3세계에서 나타난 민족주의의 근대성에 내포된 활력을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1950년대 후반 세계 무대에서 제3세계의 등장이나 비동맹의 이념은 한국에서 되돌아오지 않는 공허한 반향만을 낳았을 따름이다.

1960년대는 민족 주체성의 시대였으며, 이러한 시대 사조에서 민족의 전통은 근대화의 새로움을 강조하는 주체성의 표상이 되었다. 민족과 민족주의가 강조될수록 민족 전통이 주목받는 상황이 조성된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1960년대는 20세기 전반을 통틀어 민족 고유의 전통에 대한 모색과 추구가 가장 활발하게 나타난 시기였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1962년 『사상계』는 ‘한국적인 것’에 대한 성찰을 통해 전통론의 대안을 모색하고자 하는 취지에서 「신문학 50년 심포지움」을 기획했으며, 이 특집을 통해 전통에 대한 논쟁이 촉발됐다.

1960년대에 들어오면 한국의 전통과 고유성, 한국적인 것에 대한 인식의 지형은 매우 복합적이고 활발한 양상을 띠게 된다. 앞 시기와는 달리 이 시기에는 시대의 당위, 일종의 시대 정신으로 제시된 근대화의 추구에 대한 사회 합의를 배경으로 전통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생겨났다. 민족 전통의 실체로는 어떠한 것이 거론되고 있었는가? 일반으로 말하면 이 시기 한국적인 것의 대상과 내용은 근대 이후 한국적인 것의 형성에 영향을 미친 일본과 미국이라는 두 타자에 의해 주로 규정돼왔다고 할 수 있다.

민족 전통에 대한 가장 독특한 입장의 사례로는 아무래도 김수영을 들어야 할 것이다. 홍사중이나 유종호처럼 미국 유학의 경험을 가지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해서 조동일이나 김지하처럼 신세대에 속하지도 않았지만, 그의 전통 인식은 한국의 지성사에서 매우 독보적인 사유로서 평가되고 있다.

김수영은 정치권력이 기획한 ‘민족중흥’의 맥락에서 민족의 귀감이나 영웅이 아니라 오히려 민족에 희생당하고 배반당한 개인의 수난과 고통을 기꺼이 민족의 전통으로 받아들였다. 그의 전통론은 과거로부터 망각된 기억의 잔해를 하나하나 호명해 주체의 분열을 유도함으로써 역사적 모순과 위기를 더욱 극명하게 부각하는 전략을 택한다. 

이러한 점에서 그는 우와 좌, 보수와 진보를 막론하고 당시 지식인 대부분이 그러하듯이 민족주의 이념에 근거해 전통을 강조하지 않았으며, 이에 대신해 민족주의의 미망으로부터 자유로운 전통을 추구하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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