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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 너머 실재의 ‘반철학’…소피스트와는 다르다
진리 너머 실재의 ‘반철학’…소피스트와는 다르다
  • 박영진
  • 승인 2023.02.10 10:1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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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가 말하다_『알랭 바디우 세미나: 자크 라캉』 알랭 바디우 지음 | 문예출판사 | 360쪽

『알랭 바디우 세미나: 자크 라캉』(원제: Le Séminaire―Lacan: L’antiphilosophie 3』은 동시대 철학자 알랭 바디우(1937∼)가 정신분석가 자크 라캉(1901∼1981)을 반철학(antiphilosophie)의 관점에서 다룬 세미나를 옮긴 것이다. 바디우의 지적 여정의 맥락에서 이 세미나는 니체(1992~1993), 비트겐슈타인(1993~1994), 라캉(1994~1995), 사도 바울(1995~1996)을 다루는 일련의 반철학 시리즈 중 하나에 속한다.

 

프랑스의 정신분석가 자크 라캉. 사진=위키피디아

바디우에 따르면 서구 사유의 역사는 반철학과 철학 간의 끊임없는 대화로 이루어진다. 헤라클레이토스의 유동과 파르메니데스의 일자, 사도 바울의 부활의 뮈토스(mythos)와 그리스 철학자들의 로고스(logos), 파스칼의 은총과 데카르트의 이성, 루소의 감정과 백과전서파의 판단, 키르케고르의 단독성과 헤겔의 절대 지식, 니체의 삶과 플라톤의 이데아, 비트겐슈타인의 메타언어의 부재와 러셀의 유형이론, 라캉과 알튀세르, 그리고 무엇보다 라캉과 바디우 그 자신에 이르기까지 말이다. 

반철학자는 자기 고유의 행위를 통해 철학의 핵심 범주인 진리를 해임한다. 니체의 광기, 비트겐슈타인의 신비, 라캉의 분석 행위에서처럼 말이다. 의견의 상대성을 통해 진리의 보편성을 해체하는 소피스트와 달리, 반철학자는 진리를 초과하는 그 무엇을 자신의 삶과 행위를 통해 보여준다. 그 결과 철학적 진리는 내부적으로 논박되기보다는 외부로부터 그 권위가 실추된다. 라캉의 경우 진리는 실재(가령 트라우마, 성, 죽음, 악몽, 반복강박, 오르가슴, 육체적 증상)에 자리를 내어주게 된다. 이런 점에서 라캉 정신분석은 진리 너머의 실재를 정신분석 임상 행위를 통해 드러낸다는 점에서 하나의 독특한 반철학이다. 

 

바디우의 라캉 세미나는 총 9개의 강의로 이루어져 있다. 순차적으로 살펴보면, 바디우는 라캉 반철학의 쟁점을 소개하고, 하이데거와 라캉을 비교하고, 반철학이 철학을 시험에 빠트리는 지점을 검토하고, 라캉 반철학의 핵심 공식 세 가지를 제기하고, 어떻게 정치와 사랑이 반철학이 철학에 대항하는 장소가 되는지, 어떻게 반철학 일반의 특징이 라캉 정신분석에서 구체화되는지, 어떤 점에서 라캉에게 이론과 실천이 분리 불가능한지 해명한다. 

세미나라는 포맷이 갖는 생동감의 측면에서 여덟 번째 수업이 특히 관심을 끈다. 여기서 바디우는 정신분석 임상에서의 상징화 및 불안에 대해 다룬다. 그러던 도중 라캉이 정신분석 치료 과정에 대해서는 불명확하고 빈약한 유산만 남겼다는 사실을 지적하면서부터 불특정 다수의 청중들과 즉흥적인 논쟁을 벌인다. 청중들은 라캉이 정신분석 실천에 관한 해명과 지침(치료를 이끌기, 분석가 담론, 정신분석의 윤리)을 남겼다고 주장하는 반면, 바디우는 그 점을 부인한다. 

오히려 바디우에게는 라캉의 유산이 불명확하고 빈약하다는 사실이야말로 논리적이다. 모든 반철학자는 자신의 행위에 대한 통일적인 이론적 해명을 거부함으로써만 반철학자이기 때문이다. 분석 행위나 임상 절차에 대한 해명은 필연적으로 불확실하고 열린 것으로 남아 있어야만 한다. 이것은 철학, 반철학, 정신분석, 임상심리, 교육 등의 영역 너머로 확장되는 쟁점, 즉 ‘타인에게 무언가를 어떻게 전달하
고 어떻게 느끼게 할 것인가’와 관련된 본질적인 쟁점이다. 

적어도 우리는 ‘라캉의 통일적 이론의 부재 vs 바디우의 통일적 이론’과 같은 도식화를 경계해야 한다. 필자가 『라캉, 사랑, 바디우』 및 『사랑, 그 절대성의 여정』에서 밝혔듯, 우리는 바디우의 모든 저작에서 철학자와 반철학자가 식별 불가능하게 뒤얽혀 있음에 주목할 수 있다. 그 증거는 이번 세미나의 서문에서도 드러난다. 

2013년 2월 바디우는 이렇게 쓴다. 라캉은 정신분석의 목표가 “무능력함을 불가능성으로 격상시키는” 데에 있다고 말한 바 있는데, 이것이 곧 “철학의 정의에 다름 아니다.”

 

 

 

박영진 
한예종 강사·라캉정신분석연구소 분석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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