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部棺斬屍의 格, 공자를 죽이거나 또는 살리거나
部棺斬屍의 格, 공자를 죽이거나 또는 살리거나
  • 김태만 한국해양대
  • 승인 2006.07.03 00:00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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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중국 현대 중국을 가로지르다』 전인갑 외 지음| 새물결| 350쪽| 2006

루쉰은 “광인”의 입을 빌려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 “식인의 역사”를 전복하고, 새 시대의 전사가 될 “아이들”을 구출하자고 외쳤다. 2천여 년 동안 한 번도 꺼지지 않았던 봉건예교의 등불을 꺼트리는 것이 그다운 근대기획의 첫 번째 임무였다. 그 이치로 본다면 5·4지식인들이 봉건예교의 창시자 공자에게 비수의 날 끝을 겨눈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그렇게, 중국의 모더니티는 죽은 공자를 다시 죽임으로서 시작됐다. 部棺斬屍도 格度가 있는 법. 죽인 자는 죽인 자 대로, 살린 자는 살린 자 대로 다들 이유가 있었다. 그러나, 그 정도로 쉽사리 공자가 죽거나 혹은 살거나 하지는 않는다. 그 처절했던 尊孔과 批孔의 길항 이면에, 거대한 정치권력의 극단적 욕망이 더 크게 작동하고 있었음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현재”가 요청하는 그 어떠한 형태로의 변용도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동아시아 각국의 현대화 과정에서 유교의 위상과 역할은 사뭇 다르다. 호치민에게 있어서 전통 유교가 프랑스의 식민문화에 대한 저항정신의 토대가 됐고, 식민지 조선에서 일본의 식민지화에 대항하기 위한 사상적 무기로도 간주됐다. 그러나, 중국의 경우 모택동은 줄곧 “유교문화 = 종법사회 = 봉건”이라는 시스템의 타도를 기본노선으로 채택했고, 문화대혁명 시기 “봉건종법의 사상과 제도”로 규정된 유교문화를 철저히 파괴했다는 점이 다르다.)

필자들은 20세기를 통틀어 비공존공의 반복 재현의 배경을 파악함으로써 궁극적으로 이러한 운동이 “강한 중국 기획”에 어떻게 작동했는지를 분석하고자 한다. 20세기를 가로질러 부침을 거듭한 공자의 이미지를 추적하는 그들의 여행은 “일상적 이미지”와, “기획된 이미지”라는 두 갈래로 진행됐다.

일상적 이미지 중 김지선의 글은 주로 30년대 소설에 드러난 유가적 가족관 또는 종법제도에 대한 저항 등을 다루고 있다. 종법제도를 근간으로 하고 있는 유가적 가족관의 해체와 돌파를 그리고 있는 소설을 통해 공자비판의 의도를 드러내고 있다. 이미 필자들은 20세기 중국의 10년대, 30년대, 60년대, 90년대 등 30년 주기로 비공과 존공이 반복해 나타난다는 전제에 동의하고 연구를 수행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 글은 30년대가 존공의 시기였음에도 불구하고 비공의 이미지를 다루고 있다. 주기와의 불일치를 설명해야 할 것이다. “대중매체”라고 명명한 제목도 “소설”로 축소함으로써 독자의 동의를 더 쉽게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천성림은 30년대 중국 여성들이 근대민족주의 운동에 참여함으로써 지위와 역할이 신장됐음을 밝히고 있다. 중국의 30년대적 에토스 속에서 민족주의 운동이 촉발시킨 유교의 긍정적 역할에 대한 논고이긴 하나, 같은 시기 세계사적 트렌드로서의 여권운동과의 관련성을 배제하고 있음이 아쉽다.

‘상해미전’, ‘누드크로키 사건’이야말로 “존공/비공”에 내포된 “기표/기의”의 배반을 보다 극명하게 보여주는 증거다. 예술과 예교 사이의 팽팽한 대립이 끝내 존공의 판정승으로 존공파의 위력을 확인시켜 준 사건이었다. 존공과 비공이 공자의 본질에 대한 존숭이나 비판보다는, 혁명과 반혁명의 힘겨루기에 다름 아님을 보여주는 좋은 예를 다루고 있다.

정문상은 상해 문묘의 기능변화를 통해, 박경석은 공자탄신기념을 통해 공자가 어떻게 기획되는지를 증명하고 있다. 학통·도통·정통이 일체화되는 사회를 지향했던 중국 전통시대에 있어서는 공자의 존재만으로도 권위가 선다. 유교가 정치와 사회체제의 골간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상해문묘의 기능이나, 공자탄신기념과 관련된 행사 집전 등은 통치권자에 있어서 유용한 상징조작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행위를 통해 공자는 또 다시 통치적 권위 확보를 위한 기획물이었음을 확인시켜 주고 있다.

김승욱은 ‘공자비판의 정치학’이란 제목으로 문화대혁명 때 임표와 공자를 한데 묶어 싸잡아 비판한 이유를 분석하면서 모택동의 유교비판을 설명한다. 공자와 함께 임표가 비판대상이 돼야했던 70년대 초 중국의 사정을 이해한다면, 그 이유는 금방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학술유교와 체제유교를 구분 짓고 전자는 계승하고 후자는 비판하자는 모택동의 신민주주의론의 함의야말로 그다운 유교해석이지 않나. 성실한 주석이 신뢰도를 높이는 반면, 213쪽의 정렬오류는 옥에 티라고나 할까. 그들의 긴 여행은 이정룡의 ‘‘인문정신 위기’ 논쟁과 공자기획‘으로 마무리된다.

국내에서 이미 여러 논자들의 정리가 있었던 주제라고 한다면, 시의성이나 통일성이 다소 덜한 것은 아닐까. 또한, 공자와는 전혀 무관한 듯 서술되어 오던 글이 ‘왜곡된 공자에 대한…’ 부분에 와서 갑자기 공자학술대회 관련 기사를 언급하고 있어 마치 기존의 어떤 것에 덧댄 글은 아닌지 하는 혐의를 느끼게 한다. 전후 내연관계를 보완해야 하지 않을까.

필자들을 따라 온 현대중국 가로지르기 여행은 여기서 끝이 났다. 학진프로젝트수행의 성과를 모은 글이라는 고백을 감안하더라도, 공자를 드러내기 위한 엄정한 역할분담이나 긴밀한 통일성의 교직을 느끼기에는 아쉬움이 남는다. 하지만 20세기를 통틀어 공자의 부침을 분석한 공은 인정돼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자가 책 속에 “녹아 있다”기 보다는 책에 “매달려 있다”는 느낌이 드는 것은 왜일까. 

이제 중국은 공자의 이름으로 전 세계 교육문화 사업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지금까지 전 세계에 1백여개 이상의 ‘공자학원’이 문을 열었다. 그러나 바야흐로 불이 붙은 21세기형 ‘존공’도 현실적 돌파를 위한 출로를 확보하지 못할 때 언제 건 ‘복고’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김태만 / 한국해양대·중국지역문화

필자는 북경대에서 ‘20世紀前半期中國知識分子小說與諷刺精神’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변화와 생존의 경계에 선 중국 지식인’ 등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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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itor 2006-07-05 13:33:06
감사합니다

진영모 2006-07-04 13:49:04
안녕하셔요.

7월 3일자 서평에 나오는 제목 중 "부관참시"의 '부'자가 이상합니다. '剖'(쪼갤 부)를 써야하지 않나요? 사전을 찾아보았으나, 기사의 한자가 잘못된 듯 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