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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대회]21세기 진보·지성·대안
[학술대회]21세기 진보·지성·대안
  • 이세영 기자
  • 승인 2000.11.25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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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11-25 12:35:33
종속이론과 비판이론의 우회로를 경유하여 정통과 과학의 본진에 도달했다 믿었지만, 환희는 짧고 절망은 길었다. 견고해 보이던 모든 체제와 이념들이 궤주하고 있었다. “진보란 허구의 시나리오였을 뿐”이라는 이야기가 공공연히 나돌았다. ‘몰락 이후’ 10년. 한국의 진보진영은 여전히 침묵의 수면 아래 잠수중이다. 물론 10년이란 세월은 시인 김수영의 말대로, 한 사람이 준 상처조차 다스리기 어려운, 지극히 짧은 시간인지 모른다. 얼마나 더 깊이, 아래로 침잠해야만, 절망의 극에 도사리고 있다는 희망의 얼굴과 대면할 수 있는 것일까.

진보의 관건은 '연대' "노동, 시민운동 연대" 한 목소리

“진보에 대한 신념은 폐기될 수 없다”

지난 10일 이화여대에서는 국내 진보적 학술연구단체의 집결체라 할 수 있는 학술단체협의회(이하 학단협·공동의장 김교빈 호서대 교수)의 연합심포지엄이 열렸다. 올해로 13년째를 맞이한 연합심포지엄의 주제는 ‘21세기 진보·지성·대안’. 김동택 성균관대 연구교수의 ‘한국의 근대국가 형성에 관한 비판적 고찰’, 조명래 단국대 교수(사회과학부)의 ‘지구화와 국민국가 체제의 위기에 관한 재성찰’ 등 10편의 논문이 발표됐다. 정치학·철학·경제학·사회학 등 다방면에 걸친 논의들이었으나, 발표된 10편의 논문을 관류하는 문제의식은 동일하다. 안병욱 가톨릭대 교수(국사학과)의 기조발제에서 드러나듯 “진보에 대한 신념은 폐기될 수 없으며, 20세기 후반 민주화 운동의 유산을 계승하여 새로운 도전의 기반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학계의 일각에서 감지되는 ‘청산적’ 움직임에 제동을 걸고 나선 셈이다.

이병천 강원대 교수(경제학과)는 ‘한국형 발전 모델의 역사와 전망’이라는 논문을 통해 ‘새로운 지속가능한 내발적 발전모델로의 전환’을 주문하고 나섰다. 이교수에 따르면 한국은 “지난 40년 동안 주변부로부터 탈출하여 산업화와 민주화의 초기관문을 통과하고, 보기 드물게 양자의 결합에 성공한 나라”다. 하지만 이러한 ‘이중혁명’은 “미국 패권체제 속의 보수적/권위주의적 산업화가 보수적 민주화를 규정하고 보수적 민주화가 다시 발전모델의 보수적 전환을 재규정”하는 경로를 그려왔다는 점에서, 위기의 ‘수동혁명적’ 재편에 불과하다. 이교수는 97년의 경제위기를 이러한 보수적 근대화 모델의 실패로 규정한다.

문제는 현정부에 의해 추진되고 있는 ‘DJ노믹스’가 과거의 보수적 근대화 모델로부터 얼마나 벗어나 있냐는 것. 이교수의 평가는 냉혹하다. 한국경제가 처한 지금의 어려움은 그가 볼 때 “금융세계화에 편승한 섣부른 대외개방, 국제금융자본의 유입과 증권시장 부양을 통한 경기회복 방식, ‘한국형 주식회사’라 불려온 무책임 자본주의의 악조합”에서 기인한다는 점에서, IMF 전야와 유사한 구조적 문제점을 안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구조개혁을 통해 지속가능한 내발적 발전모델을 구축하지 못한다면 경제는 심각한 위기에 빠져들게 되고, 남북경협의 경제적 기반을 잠식함으로써 현정부의 ‘유일한’(?) 치적으로 평가받는 남북관계 개선에도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이 이교수의 전언이다.

김정훈 정신문화연구원 초빙연구원의 발표주제는 ‘시민사회의 두 얼굴’이다. 그는 여기서 진보성과 보수성을 동시에 갖는 한국 시민사회의 특성을 포착하기 위해 “시민사회를 단일한 주체로 상정하기 보다 ‘진보적 공론영역’과 ‘보수적 공론영역’이 경쟁하고 각축하는 장으로 인식”할 것을 제안한다. 이러한 김씨의 시각에서 볼 때, 87년 이후 한국의 시민사회는 일방적으로 보수화되거나 민주화된 것이 아니라, 두 개의 공론영역 사이의 끊임없는 갈등과 경합 과정에 놓여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물론 이러한 분화와 긴장은 진보적 공론영역 내부에서도 진행된다. 87년 이후 가시화된 시민운동세력과 민중운동세력의 분화가 그것이다. 문제는 양자의 분화가 운동의 다각화라는 긍정적 결과뿐만 아니라, 시민사회의 저항적 동력을 분산시키는 부정적 효과를 동반한다는 데 있다. 김씨는 이러한 난관을 타개하고 사회 전체의 합리화/민주화를 이루기 위해 “진보적 공론영역 내부의 연대”가 필수적이라고 말한다. 이 같은 문제의식은 김호기 연세대 교수(사회학과)의 논문 ‘한국 사회운동의 현황과 위상’에서도 마찬가지로 발견된다.

새로운 ‘역사적 블록’의 형성을 위하여

김교수의 화두는 ‘노동운동과 시민운동의 연대를 어떻게 창출한 것인가’로 집약된다. 그는 연대의 가능성을 두 가지 각도에서 탐색한다. 하나는 이슈별 연대사업을 활성화하는 것으로, 노동운동과 시민운동이 공유하는 사회개혁 이슈, 이를테면 재벌개혁, 사회복지, 조세 개혁 등의 관심사안들을 중심으로 ‘사회권 연대’를 추진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정치세력화를 통한 연대다. 이때 ‘연대의 핵심고리를 어디서 찾을 것인가’라는 문제가 제기된다. 김교수는 연대의 계기를 신자유주의에 대한 반대투쟁에서 발견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신자유주의는 ‘일하는 자의 빈곤’과 ‘중간계층의 몰락’을 동시에 가져오고 있지만, 이를 극복할 수 있는 독자적 역량은 시민운동이나 노동운동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

이날 행사에서는 근래의 학술행사로는 드물게 1백여명의 교수·연구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6시간에 걸쳐 진지한 논의가 이어졌다. 그러나 “노동운동과 시민운동이 연대해야 한다”는 목소리는 높았지만, 구체적 대안과는 거리가 먼 ‘강령적 요청’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는 인상을 지우기 힘들다. 절묘하게도 같은 날 있었던 노동자대회 전야제에서는 구조조정이 야기하는 파괴적 결과들에 대한 노동자들의 성토가 이어졌다. 과연 수십 만의 ‘밥줄’이 걸려있는 대우자동차 사태에 대해 한국의 ‘중도좌파-시민사회론자’들은 어떠한 진단과 처방을 제시할 수 있을까. ‘시장합리화와 노동자생존권 사이의 딜레마’는 결국 한국의 중도좌파가 새로운 ‘역사적 블록’의 접합제로 기능할 수 있을지를 가늠할 ‘역사적 시험대’가 되고 있는 셈이다.
이세영 기자 sylee@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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