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3-29 08:40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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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 열린연단 ‘오늘의 세계’ ㉚ 신형철 서울대 교수(영어영문학과)] 간토대지진(1923) 당시 한 기쿠치 간(菊池寛)은 이렇게 탄식했다. “우리들 문예가에게 있어서 제일의 타격은 문예라고 하는 것이 생사존망의 갈림길에서는 골동 서화 따위와 마찬가지로 무용의 사치품임을 똑똑히 알았다는 점이다.” 재난은 반복되고 탄식도 그렇다. 동일본 대지진(2011) 당시 다카하시 가쓰히코(高橋克彦)의 고백은 한 세기 전 선배 작가의 목소리를 닮았다. “예술이니 뭐니 말할 상황이 아니다. 그것보다 우유와 가솔린의 확보가 소중하다. 이러한 사실에, 문예에 관계하고 있는 한 사람으로서 절망과 슬픔을 느낀다. 내가 해 왔던 일은 결국 무의미한 것이었을까?”이처럼 현실의 그라운드 제로는 그대로 문학의 그라운드 제로가 된다. 그렇다고 아무것도 쓰지 않는다면 문학은 결국 아무것도 아닌(아니었던) 것이 되고 만다. 지금껏 사회적으로 받아온 대접이 근거 있는 것이었음을 입증하기 위해서라도 문학은 무언가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라운드 제로’가 ‘출발점’이라는 뜻으로도 쓰이는 이유도 거기에 있을 것이다. 문학의 그라운드 제로는 문학이 “골동 서화”가 아니라 “우유와 가솔린”일 수도 있음을 새삼스럽게 입증하는 반론의 거점이 될 수 있다.

네이버 열린연단 ‘오늘의 세계’ | 최승우 | 2024-03-08 1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