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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자’라는 이름으로
‘역사학자’라는 이름으로
  • 신명호 부경대·사학과
  • 승인 2017.09.21 1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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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學而思] 신명호 부경대·사학과
▲ 신명호 부경대 교수

역사학자는 근본적으로 과거를 연구하는 학자이다. 과거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연구 대상은 결국 과거 사람이다. 역사의 주체는 역시 사람일 수밖에 없기에 사람이 배제된 역사는 역사라고 할 수도 없다. 좋으나 싫으나 역사학자는 과거에 죽은 사람을 연구하고 논평하며 심지어 심판까지도 해야만 한다. 정확하고 공정한 논평 및 심판을 위해 역사학자는 조상들이 남겨준 모든 자료를 찾아 확인하고 고증해야 한다. 아울러 과거 사람들의 마음과 행동을 심층적으로 이해하는 통찰력도 있어야 한다. 그런 면에서 역사학자의 기본 사명은 고증과 통찰이라고도 할 수 있다.

『춘추』를 써서 동양 역사학을 일으킨 공자도 그렇게 하셨다. 공자는 이른바 ‘춘추필법’을 이용해 과거에 죽은 사람들을 연구하고 논평하며 심지어 심판까지도 했다. 공자의 ‘춘추필법’은 보는 이들을 감동해 울리기도 하고 또는 두려워 떨게도 함으로써 역사가 얼마나 무섭고 준엄한 학문인지 나아가 그런 역사를 연구하는 역사학자가 얼마나 무시무시한 존재인지를 유감없이 드러냈다.

그래서 언뜻 생각하면 역사학자는 과거에 죽은 사람들에게 절대적인 존재로 간주될 수 있다. 죽은 사람들은 말이 없고 변명도 없다. 그렇게 말도 없고 변명도 없는 죽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역사학자는 역사의 이름으로 또는 정의의 이름으로 논평하고 심판한다. 그렇게 논평하고 심판하는 역사학자에게 죽은 사람들은 변명도 하지 못하고 반론도 제기하지 못한다.

나 역시 역사학자라는 이름 하나로 과거에 죽은 무수한 사람들을 논평하고 심판해 왔다.  젊었을 때 특히 그런 경향이 강했다. 그런 나의 논평과 심판에 죽은 사람들은 변명도 하지 못했고 반론도 제기하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나의 논평과 심판에 죽은 사람들이 진정 굴복해서 그렇다고 착각했다. 죽은 사람들의 침묵을 나의 역사적 승리로 간주했던 것이다.
 
나에게 역사학자라는 이름을 붙여준 존재는 조선시대 왕과 왕실이었다. 나는 대학원 과정에서부터 조선시대 왕과 왕실에 큰 관심을 갖고 연구했다. 그렇게 석사논문과 박사논문을 쓰자 자연스럽게 역사학자라는 이름이 붙었다. 젊은 시절의 나는 역사학자라는 이름으로 조선시대 왕들을 너무나 쉽게 논평하고 너무나 쉽게 심판했다. 왕은 모름지기 어떠해야 한다는 당위성으로 또 공자가 썼다는 춘추필법으로 조선시대 왕들을 논평하고 심판했다. 나의 평가와 심판에 조선시대 왕들은 모두 침묵했고 그 침묵을 나는 나의 역사적 승리로 간주했다.

그런데 정확히 어느 때부터인지는 모르지만 과거에 죽은 왕들도 근본적으로 사람이란 생각이 깊어졌다. 그들은 단지 죽었을 뿐 사람은 사람이었다. 그런 죽은 왕들을 나는 단지 역사학자라는 이름 하나를 무기로 삼아 내 맘대로 평가하고 심판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반성도 들었다. 그런 반성에서 쓴 책이 2009년에 발간된 『왕을 위한 변명』이었다. 이 책에서 나는 왕은 모름지기 어떠해야 한다는 당위성 너머에 있는 실존적 인간으로서의 모습을 알아보고자 했다. 왕들 역시 실존적 인간으로서 자기 자신, 가정, 인간, 국가, 세계와 마주해 고민하고 갈등하며 결정하고 후회했다. 그래서 어느 왕이던 쉽게 논평하고 심판하기 어려웠다.

먼 옛날, 원효 대사는 해골 물을 마주하고 큰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당나라로 유학가기 위해 의상 대사와 함께 남양 바닷가에 도착한 원효 대사는 갈증에 시달렸다. 한 밤중 무덤가에서 찾은 해골 물은 감로수 같은 생명수였다. 하지만 날이 밝아 해골 물을 본 원효 대사는 불현듯 역겨움을 느꼈다. 같은 해골 물인데, 보는 눈에 따라 생명수도 되고 역겨움도 되는 사실에 원효 대사는 크게 깨달았다는 것이다.

해골 물을 생명수로 오해하거나 생명수를 해골 물로 오해하는 역사학자는 어리석은 역사학자가 분명하다. 그런 어리석음에서 벗어나기 위해 공정하게 실증하고 깊이 있게 통찰하는 것이 역사학자의 사명이다. 그 사명을 제대로 해내지 못하면 살아있는 사람은 물론 죽은 사람으로부터도 냉혹한 평가와 심판에 직면하는 것 또한 역사학자의 운명일 것이다.

신명호 부경대·사학과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사, 문화재청자문위원, 부경대 박물관장 등을 역임했다. 주요 저서로는 『고종과 메이지의 시대』, 『영조의 통치이념과 개혁』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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