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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료적 획일주의의 덫에 걸린 한국 학계, '자유의 정신' 지향하는 노력 필요하다.
관료적 획일주의의 덫에 걸린 한국 학계, '자유의 정신' 지향하는 노력 필요하다.
  • 최익현 기자
  • 승인 2017.03.24 11:5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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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제_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 <황해문화>에서 ‘학문 자율성’을 말하다

원로 정치학자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는 여러 곳에서, 그리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한국 사회과학 혹은 학문의 가치중립성을 강조해왔다. 그런 그가 최근 <황해문화>에 좀더 솔직한 목소리로 한국 사회과학 발전에 관한 생각을 털어놓았다. 기고글 「한국 사회과학 발전에 관한 하나의 숙고: 학문레짐의 자율성과 학문자유를 향하여」다.
 
이 글이 흥미로운 이유는 여럿 있지만,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학문에서 가장 기본적인 사항인 ‘자율성’을 언급한 대목이다. 익히 알려진 대로 학문공동체 그리고 대학 시스템에서 ‘자율성’ 혹은 ‘자유’는 언제나 가장 높이 펄럭이는 깃발이었다. 그런데도 그가 이것을 새삼 강조한 것은, 그 자율성 혹은 자유가 상당히, 그리고 구체적으로 왜곡됐다는 판단이 전제돼 있다.

또 하나 재미있는 것은, 그가 이 문제를 민주주의의 문제와 맞물려 고민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베버의 유명한 말을 빌려와 이렇게 말한다. “민주주의와 병행했던 관료체제는 시민적 자유와 시민사회의 자율성을 억제하는 기제로서 기능을 갖게 될 때 양자 간의 모순은 필연적이 된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사회의 학문 환경에 대해 비판적으로 말한다는 것은 베버가 거시사회변화의 틀에서 말했던 바의 민주주의와 관료체제의 모순이라는 현상을 훨씬 뛰어넘는다.”

국사회의 학문 환경을 가리켜 “한국사회에서 민주주의가 특정 형태로 작동하는 방식과 정부정책의 직접적인 산물”이라고 말하는 이 원로 정치학자는 국가중심의 교육진흥정책이 가져오는 대학과 학문의 자유와 자율성을 침해하는 부정적 결과를 짚어가면서 결국엔 정부 주도의 교육정책과 대학·학문정책이 민주주의 원리, 그리고 그 가치 및 규범과 심각하게 충돌한다고 우려한다. 이러한 간극에서 ‘민주화와 발전의 패러독스’를 체감한 최장집 교수는 사회과학 발전을 위한 조건으로의 제도(학문레짐의 자율성)와 학문을 위한 자유의 정신을 깊이 성찰하는 데 이른다.

“나는 한국사회라는 조건에서 부분체제로서 학문레짐이 지녀야 할 제일의 요건은 정치 내지 정치체제로부터 독립적이고, 자율성을 갖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자율성은 전체정치체제에서 학문레짐이라는 부분체제가 독자성을 유지하는 것을 통해 수직적·위계적으로 통합되지 않는 것, 특정 정부의 정치적 목적에 동원되거나 기여하지 않는 독자성을 유지하는 것을 뜻한다. 그것은 당연히 정치적 결정을 학문영역에서 수행하는 교육·학문을 담당하는 행정관료기구뿐만 아니라, 정부의 최고 정책 결정자인 대통령을 포함하는 정책결정자들에 의한 정부정책 결정으로부터의 자율성, 내지 독립성이 아닐 수 없다.”

최 교수는 교육과 학문연구의 외부적 환경으로서 학문공동체 내지는 학문레짐에 관해 언급한 다음,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한 학문하는 사람, 학문을 탐구하는 개인의 정신적 조선으로서 학문의 자유 문제를 탐색했다. 과연 그가 말하는 ‘학문을 위한 자유의 정신’은 어떤 것일까. 주요 내용을 따라가본다.

정리 최익현 기자 bukhak64@kyosu.net

학문레짐은 말할 것도 없이 한 사람의 개인 연구자, 학자들의 연구와 학문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예컨대 학진과 같은 정부 연구지원기관이 정부 정책방향에 잘 부합하는 방향으로 정치적 편향성을 갖는 것이다. 또 연구결과에 대한 평가는 교육부에 의해 면밀하게 지시되는 양적 지표에 의한 평가방식을 취하는 것이다. 학문의 주제선정과 평가에 대한 이러한 정책과 척도는 모두 연구자가 자신이 중요하다고 판단하는 주체에 대해 자유롭게 주제를 선정하고, 특정 가치와 문제의식을 가지고 이를 접근하는 것을 어렵게 한다. 더욱이 양적평가는 그동안 한국사회의 지배적인 행동양식, 쉽게 빨리하는 태도를 학문영역으로까지 확대하도록 제도화하는 것이나 다를 것이 없다. 그러한 관료적 획일주의는 당연히 학문하는 사람들의 학문적 자유를 크게 제약하게 된다. 학문하는 사람들의 학문과 연구에 대한 의지와 열정, 스스로 느끼는 보람과 가치란 모두 마음속에서 스스로 발생되는 자연스러움이 만들어내는 것이다. 어떤 것에 의해 강제되거나, 짧은 시간 내에 어떤 일정한 평가기준에 짜맞춰져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학문연구의 시작인 문제 또는 질문의 발견으로부터, 이론을 만들거나 선택하고, 자신의 주장을 조직해서 연구결과에 이르는 모든 작업과정은 긴 시간을 지탱할 수 있는 열정, 견인불발의 의지, 그리고 무엇보다 자유의 정신, 자유로운 마음의 상태에서 나오는 것이다.

'20년 동안 9편' 논문 쓴 존 롤즈

19세기 중반 J.S. 밀 이래 가장 중요한 자유주의 정치 철학자로 평가되는 철학자이자 윤리학자인 존 롤즈의 사례를 보자. 그는 1950년에 박사학위를 받은 뒤, 1962년 하버드대 철학과 교수가 되고, 그의 유명한 책 『정의론』은 1971년 하버드대출판부에서 출간됐다. 그가 처음 출간한 논문 「윤리를 위한 한 결정절차에 관한 윤곽」이 1951년 출간된 이래 ‘정의론’이 출간되는 20년 사이에 9편의 논문이 출판됐다. 롤즈가 한국에서 연구 활동을 했다면 이런 책을 쓰지도 못했을 것이고, 교수가 되지도 못했을 것이라고 언젠가 나는 혼자 생각하면서 웃은 적이 있다. 왜냐하면 20년 동안 9편밖에 못 썼다면, 10년에 다섯 편도 못썼고, 2년에 한편 꼴로 논문을 썼으니 말이다. 그의 연구결과는 한국에서 교육부가 시달하는 평가기준과 그에 따른 대학교수 평가기준에 턱없이 모자란다. 연구결과가 별로 없었는데도 롤즈는 몇몇 주요 대학을 거쳐 하버드대 교수가 됐고, 그 이후에도 그의 유명한 책이 출간될 때까지 이렇다 할 연구결과가 없었다. 그렇지만 동료학자들은 그의 연구결과가 출간되기 훨씬 이전에 이미 그가 무척 중요한 연구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10년이고, 20년이고 기다리고 있었다고 하겠다. 그것은 문화의 힘, 지적 환경 내지는 학문공동체의 힘이기도 하다. 롤즈가 정의론에 관해 그러한 윤리의식을 갖게 된 것은, 태평양전쟁에 참여했던 병사시절, 한 전선에서 포착된 윤리적 문제의식과 관계된 것 같다. 그것은 뭔가 시간에 쫓기면서 주제를 찾아야 하는 것도 아니다. 큰 연구로 발전하는 한 느낌과 생각의 실마리는 학문레짐을 떠받치는 전체 사회적·문화적·종교적 정신의 환경이 만들어내는 것이다. 한 사람의 큰 학자, 연구자가 나오는 것은 학문레짐보다 더 큰 사회적·정신적 환경이라 할 수 있다. 그 속에서 장기적으로 추상적 사고를 지속하는 학자의 마음 상태와 연구를 가능케 하는 지속성이 만들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언제부턴가 한국 사람의 말에서 정언적 명제를 듣기 어려워졌다. 예컨대 어떤 청량하고 공기 좋은 날 외출한 사람에게 마이크를 대면 “…기분이 좋은 것 같다”고 한다. 더운 날 한강변에 물놀이 나온 사람은 “가족과 함께 물놀이하니 시원해서 행복한 것 같다”는 식이다. 좋으면 좋은 것이고, 행복하면 행복한 것이지 자기 자신의 느낌을 ‘인 것 같다’라고 말하는 것은 무엇인가? 나는 이러한 표현이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자기 자신의 의견을 표현하려는 것을 제약하는 어떤 요소, 사회적 분위기의 어떤 반영으로 느끼게 된다. 감정표현이 상실되거나 뭔가에 의해 제약된 마음의 상태가 이런 식으로 표현되는 것이 아닐까. 왜 그럴까. 이것을 개인의 자유의지, 자유로운 생각이나 감정표현을 어떤 사회적 힘, 요소가 제약하고 있는 결과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한 말투는 획일주의, 또는 합일주의(conformism)의 한 표현형태, 어떤 공식적이거나 지배적 가치나 이념에 부합하도록 통제된 마음상태, 자기의 내면적 마음의 느낌과 생각을 억제하면서 남에게 보여주고자 하는 것, 남들이 듣기를 기대하는 것을 말해주려는 태도를 갖도록 하지 않을까. 한 사회에서 합일주의적 요소가 강할 때 개인의 자유로운 생각과 감정의 흐름, 개성적이고 창의적이고 대담한 사고가 제약되는 것은 분명하다.

나는 학문 연구에서 학자(연구자)들의 마음 상태도 이러한 조건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우리 모두는 한국사회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자유로운 사회와 획일적이고, 국가에 의해 권력과 정책으로 추구되고 있는 공식적인 이념, 가치, 그리고 그것을 담는 정책들이 국가와 사회를 이끌고가는 조선에서 학자, 연구자들을 포함해 우리 모두는 결코 자유로울 수 없고, 크든 적든 그것들에 의해 제약된다. 학문영역에 있어 이것은 극히 부정적인 효과를 갖는다. 서울대 공대교수들이 ‘축적’이라는 화두를 주제로 해서 제언하는 공학 분야에서는 공학적 이론, 자연과학이론과 더불어 공학 또는 기술발전을 연구주제로 다루면 된다. 그러나 사회과학분야는 그보다 훨씬 더 복합적인 제약에 직면한다. 연구의 주제선정부터, 주제와 문제 속에 포함된 가치, 그것을 다루는 방법론 모두에 있어 정치상황‥정치적‥사회적 가치와 지배적인 이념에 의해 제약되거나 큰 영향을 받는다.
 
몇 년 전 프랑스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는 서구 주요 자본주의 국가들에서 두 세기에 걸친 긴 시간 동안의 자본축적과정을 방대한 통계자료를 사용해 분석한 연구결과를 『21세기 자본』(2013년)으로 펴냈다. 그는 자본주의 성장은 최상층으로 부가 집중하는 불평등을 가져왔다고 주장해, 세계적인 하제를 불러온 바 있다.

그의 연구는 미국을 비롯해서 전 세계적으로 불평등문제를 정치적 어젠다로 만들었다. 프린스턴대의 경제학자 앵거스 디컨은 빈곤문제를 주제로 해서 삶의 질 개선의 결여를 인구집단별로 추적하는 측정방법을 발전시킨 공로로 2015년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바 있다. 그가 그의 부인 앤느 케이스와 함께 미국의 빈곤문제와 자살률간의 상관관계에 대해 공동으로 연구한 결과가 2015년 11월 언론에 보도됐을 때, 미국사회에 큰 충격을 던져줬다. 독일 사회과학연구의 중심이라 할 쾰른의 막스 플랑크연구소 소장을 지낸, 독일의 대표적인 사회학자이자 정치경제학자인 볼프강 슈트렉은 최근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와 세계적 금융위기, 그리고 그 속에서 EU와 독일의 문제를 분석한 『시간 벌기: 민주적 자본주의의 유예된 위기』(2013년)를 펴냈다. 그는 여기서 세계적 차원의 자본주의 작동방식과 그 결과를 분석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데 있어, 상당부분 마르크스 이론을 빌려 온다.

자유롭게 생각하고 말할 수 있는 사회
 
여기에서 몇 사람의 유명한 학자들의 연구 작업에 대한 사례를 통해 말하려는 것은, 한국사회에서는 이러 연구 작업이란 무척 어렵거나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한국사회에서 마르크스 이론을 적용하고 있는 학자가 한 나라의 중심적인 연구소 책임을 맡기 어려운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그러한 연구들이 이념적으로 문제가 되거나, 오로지 경제발전, 경제성장을 추구하는 정부정책이나 노동조합에 반대하는 사회적 콘센서스에 부정적 효과를 미치는 것으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연구들이란, 또는 그러한 연구를 수행하는 학자들이란 한국적 현실에서 그 연구를 위해 필요한 연구비에 접근하거나, 주요 대학에 교수직을 얻을 수 있는 기회가 여러 스크리닝 단계를 거치는 동안, 그 가능성이 적어질 수밖에 없다. 이러한 사회적 검열과정은 그런 범주에 들어가지 않는 사람들조차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내면적인 자기검열을 하도록 하는 가능성이 커진다.

르브론 제임스(미국 프로농구 선수)처럼 어떤 외부적 제약 없이, 아니 그것 자체를 의식할 필요조차 없이 자유롭게 생각하고, 그것을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사회라면, 그러한 사회적 환경은 학자나 연구자들의 연구환경 또한 자유로운 사회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 같다. 사회과학 분야에 있어 학자, 연구자들을 위해 자유로운 사회라는 조건이 크게 중요성을 갖게 되는 것은 공학 교수들이 한국사회의 공학발전을 위한 조건을 탐색할 때 고려해야 하는 것과 다른 종류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자유롭지 않은 사회가 만들어낼 수 있는 지식인 또는 학자들이란, 그런 것들을 초월할 수 있는 굉장한 사람이든가, 아니면 어떤 권력자의 의지나 이미 정해진 정책 방향을 따라 전문지식을 필요로 하는 정당이나 씽크탱크의 정책 전문가 또는 테크노크라트들일 가능성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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