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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단의 경계를 뛰어넘는 교과서의 상상력
분단의 경계를 뛰어넘는 교과서의 상상력
  • 김명희 건국대 통일인문학연구단 HK연구교수·사회학
  • 승인 2017.02.21 10:4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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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신문-건국대 통일인문학연구단 공동 기획 '통일연구의 현재와 미래'_ 18. 교과서와 집합기억

한 때 유행했던 말 중에 “19세기 교실에서 20세기 교사가 21세기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는 말이 있다. 어쩌다 보니, 교육사회학이나 사회과 교육과정을 대학에서 연구하고 가르칠 입장에 놓인 필자가 20세기 교사는 아닌지 스스로에게 반문할 때 떠올리는 말이다. 더욱이 최근 동아시아와 한국사회 내부에서 벌어지고 있는 교과서 전쟁은 자칫 ‘20세기 교과서로 21세기 학생들을 가르칠’ 현실의 위기를 드러내고 있지 않은가. 특히 교육부가 최근 공개한 국정 역사교과서 현장검토본의 서술기조는 냉전반공주의로의 회귀와 안보프레임의 강화가 두드러진다는 점에서, 그간 진전된 통일교육 전반에도 퇴행을 가져올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하지만 눈앞에 닥친 현실적 위기가 우리 교육이 나아가야할 장기적인 방향에 대한 진지한 모색을 가로막는 장애가 될 수는 없다. 이럴 때일수록 보다 긴 호흡과 전망으로 독일통일의 역사적 경험과 세계의 교과서 대화를 참고하는 것은, 우리가 처한 역사반성의 딜레마와 통일교육의 답보 지점을 성찰할 비교사회학적 사유실험이 될 수 있다.

▲ 독일-폴란드 공동 역사교과서를 들고 활짝 웃고 있는 관계자들. <출처=Georg Eckert Institut>

독일의 역사적 경험에서 배우기:「독일문제에 관한 수업지침」(1978)

어떤 사회이든 교과서는 한 사회의 민주주의와 지적 성숙도를 보여주는 지표이자 해당 공동체 성원들의 집단기억을 매개하는 사회적 기능을 한다. 그렇기에 교과서는―한국의 교육과정 개편 역사가 보여주듯―정치사회적 맥락에서 분리돼 자기완결적 ‘사실’을 담는 텍스트가 아니다. 크게 학교교과서는 교육적 틀, 정치적 상황, 학문적 연구라는 삼차원의 결합물로 볼 수 있다. 이를테면 교과서는 교과과정 또는 교육 프로그램에 나타난 정치적 지침에 의해 그 틀이 형성된다. 그리고 그 내용은 과학적 발견에 기반해야 하며, 특정 연령대의 젊은이들의 이해를 위해 조정돼야 한다. 

이 교수학적 삼각형의 결실을 잘 보여주는 것이 독일통일 이전의 교육지침과 통일 이후의 교과서의 변화다. 특히 독일통일 이전, 1978년 11월 23일 서독 정부가 제정한 학교통일교육기본치침은 1999년 제정된 통일교육지원법을 근거로 매년 발간되고 있는 한국의 『통일교육기본지침서』의 현주소를 검토하는 준거로 거론되곤 한다. 「독일문제에 관한 수업지침」(1978)은 구시대의 관점에 머물러 있는 학교 통일교육을 문제로 여긴 州 문교부 장관들이 국가 차원에서 변화를 도모하기 위해 합의한 선언이었다. 이 지침서를 필두로 정치·사회·문화 차원에서 진행된 통일정책의 결과는, 1989~1990년 통일독일이 탄생하는 동력이 됐다. 특히 20페이지 남짓한 지침서의 3장에는 실제 수업에서 고려해야할 유의점들이 15개 조항으로 제시돼 있는데, 그 내용은 지면을 할애해 소개할 가치가 있다. 
   
1. 독일문제는 동시에 유럽문제다. 2. 독일문제의 점진적 해결은 평화지향적 정책을 통해 달성될 수 있다. 3. 독일의 항구적인 분단은 여러 가지 원인을 가지고 있다. 4. 민족적 통일을 위한 우리의 노력은 정당하다. 5. 역사적 유산에 대한 책임은 독일인 모두에게 공통적으로 관계된다. 5. 국경선 양편에 살고 있는 독일인들은 공통의 역사, 언어, 문화를 통해 결속돼 있다. 7. 독일의 국민들은 공동 국가를 갖고 있지는 않지만, 하나의 공동 국적을 가지고 있다. 8. 동독의 체제와 우리 고유의 사회 질서와의 비교는 기본법에 제시돼 있는 가치 척도 하에서 비롯된다. 9. 동독에 있는 독일인들의 인권이 보장돼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우리의 당연한 권리이며 인도주의적 의무다. 10. 인권에 대한 요구는 결코 내정간섭이 아니다. 11. 동독은 서방의 영향력에 폐쇄정책으로 대응하려고 한다. 12. 중요한 사실들은 동독주민들도 독일 통일에 강한 의지가 있다는 것은 말해 준다. 13. 동독의 독일인들도 동독의 발전에 나름대로 긍지를 갖고 있다. 14. 독일의 통일은 확고한 우리의 목표다. 15. 서독이 독일 전체를 대변하지는 않는다. 

이 지침서에서 가장 주목할 점은 통일문제가 곧 ‘독일문제’로 표현된다는 점이다. 이는 독일의 통일이 ‘독일문제’라고 할 만큼 중차대한 과제임을 강조함과 동시에, 세계 제2차 대전 전범국 독일의 재무장을 우려하는 주변국들에게 주는 메시지를 포함하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독일의 통일이 단지 ‘두 개의 국가’의 통합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유럽의 통합을 위해서도 불가결한 지역문제이자 국제문제라는 인식을 천명하는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독일 통일 이후, 생활세계를 담는 교과서의 상상력

독일통일 이후 역사를 비롯한 사회과 관련 교과서를 살펴보면, 이른바 ‘문화적 전환’이라고 부를만한 역사연구의 방법론적 성과가 두드러진다. 예컨대 1980년대 교과서의 주제영역이 정치·경제사에 집중된 반면, 2000년대 이후의 교과서는 여성·청소년·소비생활 등 사회사와 일상사에 무게가 실리면서 역사해석의 다양성이 보장되는 특징을 보인다. 또한 서술의 관점에 있어서도 동독과 서독이라는 두 국가의 개별적 병행사에서 민족사적 재구성이나 대비적 문제중심사, 흑은 클레스만(C. Klesmann)이 개념화한 ‘비대칭적 관계사’가 다양하게 시도된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한편으로 이러한 서술기조의 변화는 나름 성공적인 정치-경제적 통합 이후의 실질적 갈등이 그 체제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구체적인 생활세계에서 일어났다는 역사적 반성을 담고 있다. 역사교육이 문화사와 사회사에 역점을 둬야 하는 이유 또한 여기에 있다. 정치-외교사 중심의 전통적인 역사교육은 불가피하게 국가적 요소를 전면에 부각시키기에, 과거 정치적 갈등에 내재한 적대감 또한 부각될 수밖에 없다. 이것은 역사적 사건의 인과관계와 가해-피해 관계를 둘러싼 책임의 문제를 흐릿하게 하자는 말이 아니다. 국가 수준의 통합을 넘어설―뒤르케임이 ‘계약의 비계약적 토대’라 말한―생활문화적 통합의 기초를 발견하지 못한다면, 통일독일이 겪은 시행착오를 답습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러한 방법론적 전회는 유의미한 시사점을 준다. 
 

우리가 만드는 교과서가 시대의 자기반성 시계에 부합하고 있는지,
그것에 역행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진지한 성찰이 필요한 때다.

세계의 역사교과서 대화와 집단기억의 화해

▲ 독일-프랑스 공동 역사교과서

무엇보다 이러한 변화에는 역사교과서 개선을 위한 학계와 교육계, 그리고 시민사회의 활발한 참여가 있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자민족 중심의 역사교육에 문제의식을 갖고 있던 독일과 프랑스의 역사학자와 역사교육 관계자들은 1930년대부터 최근까지 역사교과서 협력활동을 전개해왔다. 특히 에케르트(G. Eckert)가 제2차 대전 직후 설립한 국제교과서연구소는 서독 역사교과서 개선은 물론 양국 역사교과서 편찬에 대한 권고안들을 만들어 실질적인 영향을 끼쳤다. 이러한 노력은 자국사의 편견과 오류를 바로잡고 역사분쟁을 해소할 교과서 협력 프로젝트로 결실을 맺었다. 2008년 한국에도 번역된 바 있는 『독일 프랑스 공동 역사 교과서』(원제 『1945년 이후의 유럽과 세계』, 2006)는 오랜 숙적 관계에 있던 양국이 공동 발간한 최초의 이중 국적을 가진 정규 역사교과서다. 세부목차에 적지 않은 물음표가 눈에 띄는 이 교과서는, 제2차 세계대전의 유산과 홀로코스트의 집단기억 자체가 양국의 성장세대가 능동적으로 질문하고 탐구해야할 공식적인 역사적 사실로 진입했다는 점을 일러준다. 더욱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교과서를 만들자는 아이디어가 ‘독일-프랑스 청소년 교환 제도’의 모임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이 성과는 『독일·폴란드 공동 역사 교과서』(2016)의 발간으로 이어졌고, 이 작업 또한 청소년 교환 제도와 밀접하게 병행됐다.

즉 유럽의 교과서 프로젝트는 학문적 연구와 교육적 추동, 대중의 기억이 같이 움직인 성과였다. 교과서 협의는 역사교육의 수정을 통한 각 국민들 간의 관계는 물론, 역사연구의 시야와 방법을 재정립하는 데도 영향을 미쳤다. 오랜 반목 끝에, 공통의 정체성을 발견하고 만들어가고자 했던 교과서 협의의 노력 속에서 집단기억의 화해가 서서히 시작된 것이다.

교과서의 역사 자체가 교과서의 일부가 된다

우리의 맥락에서 교사와 학자로 구성된 전문단체들이 초국가 또는 지역 차원의 역사인식을 만들어내려는 시도를 ‘2007 개정 교육과정’을 통해 사회과에 신설된 ‘동아시아사’나 민간 차원의 교류에 기초한 『한중일이 함께 쓴 동아시아 근현대사』(2005~2012) 시리즈에서 찾을 수 있다.

▲ 한중일이 함께 쓴 동아시아 근현대사 교과서

특히 후자는 그 집필 목적이나 내용이 담고 있듯 이른바 ‘동아시아’에서 끝나지 않은 냉전과 역사갈등, 지체된 과거극복의 현실적 제약 속에서 여러 인식론적 난맥상을 반영하고 있지만, 다음의 점에서 중요한 진전을 이뤘다. 첫째, 국경을 넘는 동아시아적 시각을 공통된 역사인식의 지향점으로 제기했다는 점, 둘째, 국가 중심의 역사서술에서 주변화 됐던 여성·민중·소수자의 시각을 제공한 점 등이 그것이다.

하지만 그 성과에도 불구하고 동아시아사에 필수적인 북한과 대만 등이 제외돼 있다는 점은 동아시아 역사상의 진전을 위해 향후 보완해야할 지점이다. 이 지점에서 남북, 코리언 디아스포라의 교과서는 냉전과 분단의 경계를 넘어 평화와 협력의 시대를 준비할 풍부한 재구성의 자원이다. 이러한 협력을 위해선 단지 연대기적 사실의 ‘비어있는 구멍’을 메우는 것이 아니라, 남북 주민, 코리언 디아스포라를 아우르는 분단사와 분단 이후의 교과서를 ‘다시 쓰기’ 위한 새로운 관점과 언어, 주제영역을 적극 발굴할 필요가 있다. 예컨대 상호 적대하면서도 상호 의존하며 영향을 주고받은, 남북 교과서의 대쌍관계동학을 추출해본다면 어떨까. 또한 세계이해교육과 초국가사 교육이 강조되는 추세임에도 정작 코리언 디아스포라와 관련한 사회과 서술은 여전히 턱없이 부족하다. 실증주의적 역사서술을 넘어, 구조사와 사건사, 사회사와 심성사를 교직하는 역사방법론을 구축하는 것도 중요한 과제다. 이 모든 것은 분과학문의 경계를 넘어 범학제적이고 범교과적인 시야가 뒷받침될 때 가능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최근 교육과정 개편을 통해 한국·중국·북한이 전면적 또는 부분적으로 공히 추진하고 있는 통합교과의 향방에서 이데올로기의 언어를 대체할 새로운 대화의 언어를 찾아본다면 어떨까.

오늘날 교과서 문제는 한국문제를 가로지르는 갈등의 여러 수준을 응축하고 있다. 크게 동아시아 수준의 역사 갈등, 남북 갈등, 남남 갈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갈등의 축을 따라 역사교육과 통일교육, 민주주의 교육도 상호불가분한 관계를 맺는다. 따라서 복잡하게 얽힌 실타래를 풀어내는 가장 최선의 방법은 풀어야할 실타래의 짜임새를 정확히 파악하는 것이다. 연구에 입각한 교과서 협력과 교육통합의 노력을 더욱 촉진해야 할 이유도 여기에 있다. 나아가 우리가 걷는 길이 곧 길이 되듯, 교과서의 역사가 곧 미래의 교과서를 구성하는 일부가 된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만드는 교과서가 시대의 자기반성 시계에 부합하고 있는지, 그것에 역행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진지한 성찰이 필요한 때다.

 

김명희 건국대 통일인문학연구단 HK연구교수·사회학
성공회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외상과 자살을 窓으로 한국문제를 연구한다. 최근엔 코리언 디아스포라의 생활세계와 교과서 비교연구를 통해 사회통합 방안을 모색 중이다. 『트라우마로 읽는 대한민국』, 『세월호 이후의 사회과학』등을 함께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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