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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감한 변화 필요할 때 … "내가 행동과학연구소에 있거든" 하고 말할 수 있기를
과감한 변화 필요할 때 … "내가 행동과학연구소에 있거든" 하고 말할 수 있기를
  • 이성진 서울대 명예교수·대한민국학술원 회원
  • 승인 2017.02.21 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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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진, 한국행동과학연구소 40년을 말하다_ 20. 연구소에 대한 소망

한국행동과학연구소가 출발했을 때 그 이름이 생소했던지 “냉동과학연구소요?” 또는 “거기 데모 연구하는 뎁니까?”라는 웃지 못 할 말을 듣기도 했다. 그 연구소가 반세기 동안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본디 내걸었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충실히 일해 왔다. 행동과학은 이미 확립된 물리 및 생물과학처럼 그 방법론이 연구 문제를 정련하고, 주목받지 못하던 사소한 문제도 세밀하게 관찰하고 깊이 천착하면서 인간이해에 크게 도움을 주고 있다.

행동과학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학자들이 논의한 바 있으므로 여기서 중언부언할 필요는 없다. 이 글에서 나는 행동과학이 한국행동과학연구소(KIRBS)에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행동과학은 초기에 여러 인접 학문영역을 의미 있게 연결해 學際間 지식체계로 확립되기를 희망했다. 하지만 그 실현에는 몇 가지 장애가 있었다.

첫째, 이런 일에 주도적으로 참여했어야 했던 대학의 관련 학과들은 해당 학과의 전통적 교육과 연구에 전념해 인접한 타 전문분야에 관심을 돌릴 여유가 없었다. 또 사회과학 계통의 연구기관도 독립된 학문영역을 중심으로 구성돼 있어 각 영역간의 연결은 쉽지 않았다. 학제간(interdisciplinary)보다는 카페테리아와 같은 多學問(multidisciplinary)의 네트워크에 귀결되는 경향이 있었다.

인간연구가 한 학문영역의 전용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지만 여러 학문영역이 협력하면서 연구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던 것이다. 행동과학을 심리학, 사회학, 인류학 등 세 학문이 교차하는 영역이라고 하거나, 영어로 Behavioral Sciences라는 복수형을 쓰는 것도 행동과학이 여러 학문영역 즉 다학문의 집합체라는 사실을 시사하는 대목인 것처럼 보인다.

둘째, 학문간 연결이 어려웠던 다른 한 가지 이유는 사회과학내 여러 학문분야 간의 상호교류가 쉽지 않았다는 데 있다. 각 학문영역 자체의 특수성 때문이기도 하고 한 학문영역의 분화로 인한 전문분야간의 의사소통이 점점 더 어렵게 돼 가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학문영역 間, 그리고 학문영역 內에서의 세부 전공 간의 원활한 의사소통은 바람직한 것으로 생각하면서도 서로의 교류를 막는 실제적 벽은 곳곳에 존재했다.

컴퓨터의 융통성이 우리를 어디로 이끌어갈지 모른다.
분화도 재통합도 학문 발전의 숙명인 것처럼 보인다.
행동과학이 나아갈 이 숙명의 길에 방법론이 윤활유 역할을
하리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삼호소통이 어려워지고 여러 학문영역이 분리된 데 대한 불평불만이 여기저기에서 분출되자 인간연구는 여러 학문이 ‘協演’해야 그 성과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 중론으로 떠올랐다.

이런 생각이 1950년대 초반 미국 포드재단의 행동과학부 설립, 미국 팔로 알토(Palo Alto)에 들어선 행동과학고등연구센터의 설립 계기가 됐다. 행동과학이 등장할 때의 사정이 어떠했든, 우리나라의 한국행동과학연구소는 그 시작부터 인간에 대한 종합적 연구의 특징을 갖추고 있었다.

한국 사회과학 연구기관의 대부분은 특성화돼 있어서 관련 학문영역에서 전문적인 연구를 수행하고 있다. 한국행동과학연구소의 연구는 특정한 한 학문영역에 한정되지 않고 여러 영역의 연구를 관련 연구자들이 함께 수행하고 있다는 점에서 타 연구기관과 다르다. KIRBS는 연구 활동에 있어서 행동과학의 종합성을 태생적으로 내재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KIRBS의 연구 전략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연구원의 다양한 전문성, 연구진행에 있어서의 팀 어프로치, 그리고 발표한 연구물 등에서 행동과학의 다학문적 특징들을 보여준다.

첫째, 연구원 전공분야의 다양성이다. KIRBS는 연구원을 공개적으로 모집했는데, 심리학, 사회학, 교육학, 인류학, 행정학, 아동학 등 인문·사회과학의 다양한 전공자들을 선발했다. 다학문적 성격이 연구원 모집에 이미 반영되고 있었다.

둘째, 연구원은 여러 부서 또는 프로젝트의 태스크 포스(TF)에 배치됐다. 대학원 전공을 고려했지만 여러 분야에서의 연구 경험을 강조하고 권장했다. 연구원들은 대개 3~4개 부서 또는 태스크 포스에 배치됐다. 행동과학의 다학문적 접근에 익숙하게 하려는 배려였다. 이로써 인접 학문 간의 네트워킹이 가능했다.

셋째, 행동과학의 다학문 학제적 특징은 연구원들이 발표한 연구논문의 다양성에서도 드러났다. 연구논문들은 행동과학 박람회를 방불케 했다. 여러 전공분야의 연구원들이 함께 쓴 논문들은 KIRBS의 다학문적 연구지향을 웅변으로 말해준다. KIRBS의 이런 연구체제는 그 저변에 깔려 있는 과학정신의 표현이었다.

인간연구의 과학적 접근이 여러 학문분야에서 유용하게 활용되고 있고 또 활용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였다는 점에 주목하면, 연구 방법론이 행동과학의 밑바탕을 관통하는 공통분모라는 것이 어렴풋이 드러난다. 인간행동은 학문분야에 따라 여러 가지로 달리 개념화되지만 많은 학문분야의 관심사이기도 하다. 이 여러 학문영역을 엮는 공통분모가 곧 행동과학의 과학적 연구지향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과학정신을 바탕으로 한 과학적 인간연구의 방법론이 우리 연구소의 핵심적 특징이다.

물론 과학적 방법을 연구의 완벽하고 유일한 방법이라고 주장할 수는 없지만, 종래에 물리세계와 생물학적 현상의 연구에서 대단히 경제적인 전략임이 밝혀졌다. 인간행동의 연구에서도 과학적 방법은 유용한 전략으로 확인되고 있다.

인간연구의 유용한 방법으로서 행동과학의 과학적 접근은 미구에 더 발전된 방법이 출현할 수 있다. 나는 이미 눈부신 발전을 거듭해 연구에 유용하게 사용되고 있는 컴퓨터 테크놀로지에 주목하고자 한다. 인간연구에 참여하는 여러 학문분야가 다양화되고 세분화 되는 등 분화를 겪는 데는 엄청난 융통성을 가지고 있는 컴퓨터가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컴퓨터 테크놀로지의 발전은 학문영역의 분화와 그 결과로 나타나는 학문의 급속한 특수화·전문화를 촉진할 것이다. 컴퓨터가 지식체계의 분화를 촉진하고 분화된 여러 지식체계를 묶는 재융합의 도구가 될지도 모른다. 즉, 컴퓨터는 학문영역을 분화하는 동시에 분화된 지식체계를 융합하는 양날의 칼과 같은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심리학, 사회학, 인류학 등이 학문영역 간에 견고하게 쌓아 올린 벽을 허물고, 각 학문영역 내에서 분화가 일어나서 인접 학문분야 간의 울타리가 느슨해지면 새로운 학문영역의 탄생이 쉬워질 것이다. 방법론이 발전해 지식체계의 재구성이 이뤄지리라는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컴퓨터의 융통성이 우리를 어디로 이끌어갈지 모른다. 분화도 재통합도 학문 발전의 숙명인 것처럼 보인다. 행동과학이 나아갈 이 숙명의 길에 방법론이 윤활유 역할을 하리라고 생각한다.

이제 KIRBS 앞에 놓인 과제를 들여다보자. 진부한 레토릭이지만 현대의 급속한 사회변화는 인간의 가치관과 기대, 사고방식과 행동양식에 적지 않은 변화를 일으키고 있다. 과학은 또한 급속한 전문화를 거듭하고 있다. 학문세계의 변화가 눈부신 것이어서 1970년대의 패러다임은 이미 낡아졌다. KIRBS가 출범하던 1970년으로부터 반세기가 지나는 동안 연구소의 존재 방식도 크게 변화했다.

과거의 관행은 이미 타당성을 상실했다. 따라서 과거의 것을 벤치마킹하고 싶은 욕망을 눌러야 한다. 그동안 연구소를 지탱해온 강고한 운영의 이념에서도 과감하게 벗어나야 한다. 과거의 것에 익숙해져서는 거기서 벗어나기가 어렵고, 과거의 관행에 안주하고자 하는 유혹을 떨치기도 어렵다. 그러나 이런 고통을 벗어나서 과거의 연구 관행을 대체할 수 있는 새 길을 모색해야 한다.

나는 KIRBS가 더욱 발전하기 위해서 구체적으로 몇 가지 일에 힘 쓸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첫째, 전문인력을 더 확보해 현재의 튼튼한 연구역량을 더욱 보강해야 한다. 나는 전문인력이 KIRBS를 외면하기 시작할 때부터 연구소의 사회적·학술적 공헌 역량이 고갈되는 것을 감지하고 가까이 닥쳐올 위기감에 고민한 적도 있다. 인력 부족으로 연구 활동에 차질을 빚고 연구성과를 올리지 못할 때의 고통은 말할 수 없이 컸다. 어렵겠지만 고급인력을 더욱 보강해야 할 것이다.

둘째, 산출된 연구 결과물의 대중적 공유가 절실하다. KIRBS는 400편에 가까운 연구 보고서, 연구 노트와 수많은 단행본들을 산출했다. 이들 간행물은 주로 전문 학자들을 독자층으로 겨냥한 것이 대부분이었다. 연구소가 수준 높은 보고서와 간행물을 출간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지만, KIRBS의 연구 주제는 우리 사회의 거의 모든 구성원이 절실히 필요로 하는 정보를 담고 있다는 사실을 눈여겨봐야 한다. 이런 연구 결과를 전문가에게만 제공할 것이 아니라 더 많은 사람들이 접근할 수 있도록 하는 길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

셋째, 연구소의 성취를 제대로 알려야 한다. KIRBS는 많은 중요한 연구를 수행했고, 다수의 인재를 배출한 연구기관이다. 연구소의 이런 성취와 공헌을 아는 사람의 수가 점점 줄어들고 있고, 연구소의 명예도 시들어가고 있다. 연구소의 성취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정확하게 알지 못하고 있다. KIRBS의 축적된 연구 경력을 한국사회와 학계에 내세울 수 있어야 한다. 한국행동과학연구소에 대한 여과되지 않은 많은 왜곡된 정보가 퍼져 있다는 사실을 직시하고 그것을 바로잡는 일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한국행동과학연구소의 새로운 성공 스토리를 듣고 싶은 것은 과연 나만의 희원일까. 그것은 아마도 행동과학연구소를 거쳐 나간 수많은 사람들의 소망일 것이다. 한국행동과학연구소를 키운 그들은 아직도 “내가 옛날에 행동과학연구소에 있었거든” 라고 자랑스럽게 말한다. 지금도 앞으로도 “내가 행동과학연구소에 있거든”이라고 말할 수 있게 되기를 희원한다. ―끝

이성진 서울대 명예교수·대한민국학술원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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