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19 05:00 (금)
“뜻 중심의 새말짓기, 이젠 시작해야”
“뜻 중심의 새말짓기, 이젠 시작해야”
  • 김영환 부경대·신문방송학과
  • 승인 2017.01.16 14:44
  • 댓글 1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논단_ 올해의 사자성어와 우리말로 학문하기
<교수신문>은 지난 2016년을 나타내는 사자성어로 강물이 배를 뒤집듯 성난 백성이 임금을 뒤엎을 수 있다는 뜻의 ‘군주민수’를 뽑았다. 공감이 가는 내용이라 이번에는 언론의 메아리가 더 컸다. 덩달아서 정당의 지도자들도 경제부총리도 그럴듯한 사자성어를 내놓고 있다.
 
10여 년 전부터 해 오던 사자성어 뽑기 사업이 올해는 교수사회의 울타리를 넘어 점차 번진다는 느낌이 든다. 그런데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이 낡은 언어 형식에 기대어 표현된다는 점에 문제가 있다.
 
우리 현실을 중국 고전의 언어에 비추어 이해하려는 것은 우리 역사와 문화를 한자와 중화의 세계에 가두어 버릴 가능성이 크다. 우리는 조선조 시대부터 단군보다 기자를 더 찾았고 『삼국사기』보다 『춘추』를 더 많이 읽었다. 아직도 중화주의 색채가 짙은 『논어』와 『천자문』을 중국인보다 더 열심히 읽고 있는 것은 아닐까. 고전연구는 어려운 말을 외워 자랑하는 게 아니라 오늘을 이해하려는 한 방편일 뿐이다. 문치주의가 일찍부터 확립된 전통사회에서는 학문과 교육이란 곧 한문으로 된 유교 경전을 읽고 한문 쓰기를 익히는 것이었다. 그것이 선비가 입신양명하는 길이기도 했다.
 
지배 계급의 냉대로 우리 역사와 문학, 사상은 점차 가난해졌다. ‘조선의 공자’가 아니라 ‘공자의 조선’만을 뒤좇은 결과 중국과 비슷하다는 것을 자랑으로 알았다. 오랑캐를 벗어나 작은 중화라도 되기 위해 고유한 언어와 문화를 ‘오랑캐 풍속’으로 억눌러 온 게 천 년에 가깝다. 작은 중화를 뽐내며 가장 이상적인 알파벳인 한글을 속된 말을 적는 글자라며 돌아보지 않았다. ‘강산’마저 들어오니 ‘가람’과 ‘뫼’가 사라졌다.
 
해방 후에도 경성제대의 실증주의 국어학이 서울대학에 이어지면서 한자를 섞어 쓰자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세계 언어학계도 한글을 가장 뛰어난 표현력과 실용성을 가진 문자로 인정하고 있지만 막상 국어학계는 한글로만 쓰기를 두고 대립과 파쟁이 그칠 날이 없었다. 식민지 제국대학의 과학적 조선어학의 이데올로기를 그대로 받아들였다. 이런 ‘전통’이 또다시 미국말 숭배로 탈바꿈해 영어전용 강의는 아직도 대학에서 기승을 부리고 있다. 학문과 교육의 언어로 배달말을 인정하기에 우리 지식인은 아직도 퍽 인색한 셈이다.
 
오늘날 겉보기로는 한글로만 적기는 거의 이루어진 것처럼 보인다. 완고한 몇몇 신문사도 고집을 꺾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우리말의 실제 모습은 한글만 쓰기를 앞서 이끈 분들이 그리던 우리말의 모습과 거리가 멀다. 말다듬기와 새말 지어쓰기가 빠졌기 때문이다. 외래어의 대부분을 이루는 영어를 그대로 한글로 적고 있다. 뜻 중심으로 새로 지은 낱말은 매우 적다. 우리에게는 뜻 중심으로 새말을 짓는 습관이 매우 낯선 게 사실이다. 한자 문화권이니 중국이나 일본을 보고 따라하면 된다는 게으르고 줏대 없는 생각을 할 수도 있다. 이런 의식에 깊이 젖어 있는 대중의 통념에 ‘이름씨’니 ‘날틀’이니 하는 새말이 얼마나 낯설었을까.
 
경성제대의 이희승은 언어의 자연성을 내세우며 주시경과 조선어학회의 새말짓기를 인위적이어서 실패했다고 단정했다. 언어를 자연 현상이라 보던 관점은 한때 유행했으나 이미 폐기된 지 오래다. 토박이말 어근을 이용한 새말짓기야말로 100년이 넘은 한글전용운동의 완성이다.
 
중국에서는 버스, 컴퓨터, 텔레비전마저도 모두 뜻 중심으로 바꾸어 쓴다. 중국은 예부터 새로운 현상의 이름짓기에 익숙하다. 해외로 번진 우리식 대중문화를 ‘한류’라 이름붙인 것도 중국인이었다. 물론 배달말에서 새말지어쓰기운동은 현실적 한계가 있는 것은 사실이나 처음부터 외래어를 그대로 들여와 쓰는 게 능사일 수는 없다. 우리도 왕성한 상상력과 창조력을 발휘하여 새말을 지어쓰기에 머뭇거리지 말아야 할 것이다. 새말은 우리가 남에게 기대지 않고 나름대로 현실을 보는 새로운 눈이다.
 
우리 언어 현실에서는 한쪽으로는 한자와 중국 고전에 대한 낡은 태도가 버티고 있는 반면, 다른 한쪽으로는 미국말 숭배가 뿌리내리고 있다. 한글로만 쓰기는 단순히 대중의 글살이가 실용적이고 쉽게 된다는 데 그치지 않는다. 생각과 학문의 매개체로 온전하게 자리잡는 것을 뜻한다. 우리말로 학문하려면 또 우리 문화가 독립하려면 한문과 영어에 주어졌던 지나친 의미를 벗어나 제대로 된 배달말을 지어 학문하는 데까지 이르러야 한다.
 
김영환 부경대·신문방송학과
서울대에서 박사를 했다. 주요 논문으로 「중화주의로서의 유학」, 「과학적 국어학 비판」, 저서로『한글철학』 등이 있다. 한글학회, 한국철학회 등에서 활동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1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변희룡 2017-02-05 04:23:31
내 고향마을에는 가야 이전 부터 내려운 고유의 아름다운 명칭들이 산, 길, 언덕, 마을에 아직 많이 남아 있어요.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모두 한자어로 바뀌었는데, 점차 사라지고 있습니다. 다시 복원하는 작업을 국어학게에서 시작해 주기를 바랍니다. 옛 명칭에는 고대의 역사가 담겨있는 경우가 많이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