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3-28 20:25 (목)
‘剝地技法’ 고려청자 제작에 사용된 증거 … 송나라 기법과 비교연구도 가능
‘剝地技法’ 고려청자 제작에 사용된 증거 … 송나라 기법과 비교연구도 가능
  • 김대환 상명대 석좌교수·문화재평론가
  • 승인 2016.06.22 17:3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김대환의 文響_ 33 청자철화박지보상화문대반 (靑磁鐵畵剝地寶相華文大盤)
▲ 사진③ 청자철화박지보상화문대반

새로운 문화재의 발견이 그동안 정설처럼 믿어왔던 통념을 깨뜨리는 경우는 다반사다. 필자가 전라북도 유천리의 고려청자 도요지에서 地表收拾해 부안청자박물관에 기증한 ‘靑磁鐵畵剝地蓮瓣文梅甁片’(사진 ①, ②)과 필자가 국내에서 처음으로 발표한 ‘靑磁鐵畵剝地寶相華文大盤’(사진 ③, ④)은 알려지지 않았던 고려청자의 剝地技法(粉靑沙器의 胎土로 그릇을 빚은 다음, 그릇 전체에 白土로 분장하고 施文하고자 하는 문양을 그린 뒤, 문양 이외의 배경 부분의 백토를 긁어낸 뒤 그 위에 투명한 회청색의 유약을 발라 문양을 나타내는 방법-편집자)을 세상에 알려주는 역할을 했다. 그동안 韓國陶磁史에서 박지기법은 조선시대 분청사기의 제작기법의 하나로만 인식됐고, 그 기원을 고려청자에 두지 못했다. 다만 어떤 이유에선지 모르겠지만 조선초기의 분청사기 제작자에 의해 자연히 생성된 것으로만 믿어왔던 것이다. 그러나 박지기법을 사용한 고려청자의 새로운 등장과 발표는 이런 잘못된 통념을 바꾸게 하는 충분한 계기가 됐다.

▲ 사진④ 청자대반의 바닥면

조선시대 분청사기의 박지기법은 그릇을 빚고 나서 몸통에 白土로 분장을 하고 문양을 그린 후에 문양의 바탕을 파내고 施釉를 해 燒成한 것으로(사진 ⑤), 주로 호남지방에서 제작됐다. 일설에는 분청사기의 面象嵌技法을 박지기법의 탄생으로 추측하는 경우도 있지만 아직 확실한 증거는 없는 상태다.
(사진 ①)은 靑磁梅甁의 몸통과 굽부분이 일부 남아있는 형태로 출토됐으며 바닥까지 酸化鐵顔料가 칠해져있고 내화토받침이 그대로 붙어있다. 철화문양을 자세히 살펴보면 몸통의 器壁에 산화철안료를 칠하고 문양의 외곽선을 따라서 바탕의 산화철안료를 파내는 박지기법으로 제작한 고려청자임을 알 수 있다. 비록 完形은 아니지만 고려청자의 제작기법 중에 박지기법을 사용한 사례를 확인할 수 있는 출처가 분명한 증거자료라고 할 수 있다.

(사진 ③)의 ‘靑磁鐵畵剝地寶相華文大盤’은 지름이 28cm이고 굽지름이 15.3cm, 높이가 5cm인 대형의 器物인데 커다란 접시로 볼 수 있다. 이 유물은 커다란 접시형태의 그릇을 빚은 후에 초벌구이를 마치고 몸체의 內外面에 붓으로 산화철안료를 칠한 것으로 확인된다(사진 ⑥). 이 靑磁大盤의 內面에는 상상의 꽃인 寶相華 한 송이가 큼직하게 자리 잡았고 주위로 연결된 넝쿨문양의 줄기와 잎을 역동적으로 새겼으며 그릇의 外面에도 잎과 줄기의 넝쿨문양이 활달하게 둘러져 있다. 붓으로 칠한 산화철안료에 문양을 그리고 문양의 외곽선을 따라 바탕을 파낸 흔적이 남아 있으며(사진 ⑦,⑧), 산화철안료가 남아있는 문양부분과 산화철안료를 파낸 바탕부분의 凹凸이 선명하다. 산화철안료를 사용하여 붓으로 직접 문양을 그려 넣는 鐵畵靑磁와는 확연히 구분되는 項目이다.
안정적인 낮은 굽에는 여덟 군데에 내화토받침을 사용한 흔적이 남아있으며 굽바닥의 유약은 일부 닦아냈다. 유약은 기포가 많은 비취색으로 두껍게 고루 시유됐으며 12세기초 전라북도 부안지역의 官窯作品으로 추정된다. 아울러 철화안료를 사용한 박지기법의 유일한 完形 고려청자로 한국도자사의 한 부분을 보완해 줄만한 중요한 의미를 지닌 유물이다.

  현존하는 고려시대의 鐵畵靑磁는 대부분이 산화철안료를 사용해 직접 문양을 그려 넣고 소성한 것이며 박지기법을 사용한 철화청자는 알려진 유물이 없었다. 그래서 고려청자의 제작기법 중에 박지기법은 제외돼온 것이다. 그러나 (사진 ①, ③)의 박지기법으로 생산한 고려청자의 등장은 고려청자의 제작기법을 확대해 연구할 수 있는 동기를 부여하게 됐다. 아울러 같은 시기에 중국 宋나라의 磁州窯에서도 박지기법의 도자기가 생산되고 있었음으로 고려청자의 박지기법과 宋나라 磁州窯의 박지기법은 어떤 관계가 있는지 상호 비교연구할 수 있는 계기도 마련됐다.
고려청자의 鐵畵剝地技法이 조선 분청사기의 박지기법에 영향을 준 것은 아닐까? 유독 호남지방에서만 나타나는 조선 분청사기의 박지기법은 고려청자의 대표적 王室官窯(전라북도 부안, 전라남도 강진)와 같은 지역권으로 생산지가 일치한다.

김대환 상명대 석좌교수·문화재평론가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